밀양박씨 三十二世 郁 삼십이세 박욱 삼한벽공도대장군
高麗太祖朝 三韓壁控都大將軍 墓所配位失傳 廟在推火山 爲密城主神 李文忠公齊賢云 密城之朴氏派流甚繁衍 原其本則皆出於公信然 謹按統合三韓之時至今不遠 以鎭撫其地之功臣皆稱 三韓壁上功臣三韓三重大(匡) 羅季麗初戰伐不休 三韓之地數爲反覆 公之爵三韓壁控都大將軍出於此矣 致祭享于武安景德壇東
고려태조조 삼한벽공도대장군 묘소배위실전 묘재추화산 위밀성주신 이문충공제현운 밀성지박씨파류심번연 원기본즉개출어공신연 근안통합삼한지시지금불원 이진무기지지공신개칭 삼한벽상공신삼한삼중대(광) 라계려초 전벌불휴 삼한지지수위반복 공지작삼한벽공도대장군출어차의 치제향우무안경덕단동
고려 태조조에 삼한벽공도대장군이셨는데 묘소와 배위가 실전이다. 묘(廟 主神祠)가 추화산(밀양 교동리 밀양읍성)에 있어 밀성주신이었다(밀주(密州) 추화산에 주신사(主神祠)가 있어 공의 소상을 봉안하고 이 고을에 인사들이 서로 나아가 제를 지냈다고 한다). 문충공 이제현이 말하기를 “밀성박씨 각파 심히 번창하나 그 근본을 보면 모두 대장군에서 나왔다”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삼한 통합의 때가 지금과 멀지 않는데, 그 땅을 진무(鎭撫))하는 공이 있는 신하들을 모두 칭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한(三韓)삼중대광(三重大匡)이라 하였다. 신라 말엽에서 고려 초에는 정벌하는 전투가 쉼 없어 삼한의 땅 주인이 반복하였다. 공의 작호인 삼한벽공도대장군이 이에서 나왔다. 제사는 무안 경덕단 동쪽에서 지낸다.
[보유] 高麗太祖朝 三韓壁控都大將軍 墓所配位失傳 高麗史考 配弁韓國夫人 申氏 開國功臣大將軍壯節公申崇謙 廟在推火山 爲密城主神 故奉塑像 李文忠公齊賢云 密城之朴氏派流甚繁衍 原其本則皆出於公信然 謹按統合三韓之時至今不遠 以鎭撫其地之功臣皆稱 三韓壁上功臣三韓三重大(匡) 羅季麗初戰伐不休 三韓之地數爲反覆 公之爵三韓壁控都大將軍出於此矣 致祭享于武安景德壇東配享翊聖祠
고려 태조조에 삼한벽공도대장군이셨는데 묘소와 배위가 실전이다. 고려사에 고증하면, 배는 변한국부인 신씨로서 개국공신대장군장절공신숭겸의 딸이다. 묘(廟 主神祠)가 추화산(밀양 교동리 밀양읍성)에 있어 밀성주신인데 소상으로 ㅁ셔졌다고 한다(밀주(密州) 추화산에 주신사(主神祠)가 있어 공의 소상을 봉안하고 이 고을에 인사들이 서로 나아가 제를 지냈다고 한다). 문충공 이제현이 말하기를 “밀성박씨 각파 심히 번창하나 그 근본을 보면 모두 대장군에서 나왔다”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삼한 통합의 때가 지금과 멀지 않는데, 그 땅을 진무(鎭撫))하는 공이 있는 신하들을 모두 칭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한(三韓)삼중대광(三重大匡)이라 하였다. 신라 말엽에서 고려 초에는 정벌하는 전투가 쉼 없어 삼한의 땅 주인이 반복하였다. 공의 작호인 삼한벽공도대장군이 이에서 나왔다. 제사는 무안 경덕단 밀성대군의 동에 있다. 익성사에 배향되어 있다.
[첨언] 《文獻 高麗史考》에 의하면,
<공의 휘는 욱[郁]으로 고려태조[高麗太祖] 때 삼한벽공도 대장군 [三韓壁控都大將軍]을 지냈다. 신라[新羅]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지가 오래지 않으니 진무공신[鎭撫功臣]으로 삼한벽상공신[三漢壁上功臣] 또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이라 하겠다. "충렬왕 34년[1308]에 삼중대광이라고 하던 것을 충선왕때 벽상[壁上]삼한[三漢]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뒤에 몇 차례 개칭 하였다." 부인은 변한국부인 신씨[弁韓國夫人 申氏]로 그 부친은 고려 태사《文獻 高麗史考》 개국공신에 장절공이신 대장군 신숭겸[申崇謙]이다. 아들 박란(朴瀾)은 요동독포사로, 최승로(崔承老)의 사위라고 한다.>라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신라[新羅]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지가 오래지 않으니’가 아니라 ‘고려(高麗)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지가 오래지 않으니’라야 한다. 이 오류는 국역자들이 족보 원문의 <謹按統合三韓之時至今不遠>에서 ‘至今’을 ‘至公’ 또는 다른 말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박욱은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때보다 약 270년 후인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인물이다.
그런데 이 ‘至今’을 보면, 족보의 이 기사를 처음으로 쓴 때는 고려 초기인 950년에서 1000년 사이로 33세이신 永禎 할아버지인 것 같다.
[참고자료 4]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 三韓壁控都大將軍 木像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내일중앙길 14)에 있는 박욱의 목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3호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三韓壁控都大將軍木像)은 신라 말에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크게 공훈을 세워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이 된 박욱(朴郁)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한 목상이다. 박욱은 밀성대군 박언침(朴彦沈)의 아들이다. 원래는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추화산(推火山)에 있던 성황사(城隍祠)에서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시던 것이었다. 1894년(고종 31)에 밀성박씨 재실인 밀성재(密城齋) 권역에 옮겨 모셨으며, 이후 새 사당을 ‘익성사(翊聖祠)’로 개칭하였다.
익성사에는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을 중심으로 왼쪽엔 부인 2명의 목상, 오른쪽엔 아들 박란(朴瀾)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의 모사본이 밀양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지금은 사라졌지만 2016년까지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상부마을에 박욱과 박욱의 두 부인 및 손긍훈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충사(義忠祠)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정월 14일 밤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은 갑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이 아니라, 붉은 바탕에 구름무늬와 학을 새긴 흉배가 있는 청색의 문관복을 입은 채 두 손으로 칼을 잡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목상과 좌대는 분리되어 있다. 좌대의 크기는 가로 66㎝, 세로 43.5㎝, 높이 180㎝이고, 목상의 높이는 무릎을 구부린 것을 감안하면 180㎝ 정도이다.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은 원래 진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었다고 하나, 목상으로 바뀐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박욱은 「손대장군 박대장군」과 같은 무용담이 지금도 경상남도 밀양 지역의 설화로 채집될 정도로 손긍훈과 함께 밀양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밀성박씨 대종회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춘계]과 음력 9월 9일[추계]에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의 밀양 영남루 앞 밀성대군 단비 앞에서 제사를 지낸 뒤 익성사로 옮겨 박욱에게 제사를 올린다.
첫댓글 안동의 규정공 후 충정공 14대 손 박희용입니다. 1954년생으로 이제 족보를 정리할 때가 되어 한창 연구 편집하고 있습니다. 밀양박씨 32세 박욱 할아버지의 기사를 올립니다. 모든 박씨 족보에는 31세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연구한 바로는 3세 유리왕 다음에 4세가 일성왕이 아니라 갈문왕 박아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계대가 한대씩 늘어납니다. 다른 문중에서도 더 깊이 연구하시어 게대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휘 욱자 할아버지의 기사 중에 오자와 탈자가 있어 국역에서 문중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밀양박씨 각 문중의 조선 초기까지 계대와 기사가 거의 동일합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 대에서 더욱 연구하여 더 정리된 족보를 아랫대에 물려주어냐 합니다. 종친 여러분들의 참여를 당부드립니다. 의견이나 이견이 있으신 종친께서는 010-8587-4092로 통지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올린 글이 약간의 타당성이 있다고 여기시는 종친께서는 족보를 만드실 때에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