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 마천면 면사무소 소재지 가흥리는 무당의 사당이 많다고 하여 지금까지도 당벌(현지인들은 '땅벌'로 발음)로 불린다. 마천에서 무속 다음으로 마천소, 의탄소의 종이(창호지)와 숯이 유명했다. 하지만 이곳 특산물 종이와 곶감 등은 이미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근래는 토종꿀, 잎담배, 옻닭, 오석(烏石), 그리고 호도를 비롯한 각종 지리산 열매와 약초, 산채가 많이 산출된다. 마천 석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짓는 데도 사용됐을 만큼 유명하다.
아주 먼 옛날에는 마천 사람들이 지리산 주능선 장터목에서 시천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터목이란 이름도 장이 선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 하동바위 코스의 '참샘' 바로 위에 '소지봉'이 있다. 이곳을 '우장봉(牛場峰)'이라고도 하는데, 소시장이 열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산중 그 높은 곳에 소시장이 열렸다니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이 산중 장터들은 호랑이, 곰보다 더 무서운 산적들의 극성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근세에는 마천 사람들이 벽소령을 넘어 하동 화개장을 많이 이용했다. 산나물, 약초, 곶감, 한지, 벌꿀, 박바가지, 옻 등을 가지고 가서 돌아올 때는 소금, 미역, 명태, 멸치, 새우 등 해산물을 사오고는 했다. 일제시대에는 목화솜을 사오기도 했다. 화개장터는 음정마을을 거쳐 벽소령을 넘어갔는데, 그 중간에 '넝바우'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3가구의 집이 있었는데, 지리산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팔고 잠을 재워주는 주막이었다.
넝바우=광암
마을 이름이 광암동
마천의 명물 가운데 목기(木器)도 있다. 목기 제작소들은 대개 산중에 자리했다. 부산의 산악인들로 구성된 '칠선계곡 학술조사대'가 1964년 12월 처음 현지에 발을 들여놓고 가장 먼저 놀란 것이 아름드리 거목들이 마구 쓰러져 있는 참상이었다. 칠선계곡에는 밀림대가 형성된 해발 1,500미터까지 목기 제작업자들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다. 수령 300년으로 그 둥치가 세 아름이 넘었고, 초벌갈이를 한 지름 두 자(尺) 이상 되는 함지박들도 목격됐다.
"200~300년의 나이테의 나무들을 베낸 그루터기를 여남은 개나 보았다. 조금 더 올라가니 스무개 쯤의 함지박이 초벌갈이가 된 채 돌담 안에 포개져 있을 뿐 아무런 가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작업을 하던 목기꾼들이 아마 연장을 챙겨 도망친 모양이었다." 칠선계곡 학술조사대가 놀란 것은 이것 만이 아니었다. 산판도로를 낼 수 없는 험준한 지형에서도 도벌꾼들은 목재를 운반했다.이른바 '목마로(木馬路)'와 '도벌 댐'의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칠선계곡의 등산로가 개발된 것은 지난 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 등산로가 개발되기 훨씬 이전부터 도벌꾼들에 의해 '목마로'가 생겨났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먼저 굵은 기둥을 경사지게 세웠다. 그 위에다 경사지게 좀 작은 기둥으로 연결했다. 또 그 위에다 허벅지만한 통나무를 3미터 정도 길이로 잘라 착착 붙여서 목마로를 만들었다. 이 길에 사용된 나무가 도대체 몇 만 그루이겠는가?" 학술조사대 등반대장으로 참여한 성산의 울분에 찬 증언이다.
도벌한 목재의 운반 수단으로 '목마로'를 뺨치는 것이 '도벌 댐'이다. "계곡 중에 제일 협소한 곳을 막아 간이 댐을 만들었다. 그 속에다 마구 벤 나무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여름철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기다렸다는 듯 댐을 파괴했다. 거센 계곡물은 쌓여 있던 나무들을 삽시간에 가랑잎처럼 계곡 하류로 흘려보냈다. 이 나무들은 의탄리를 거쳐 엄천강으로 운반됐다. 물살이 세지 않은 곳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인부들이 이들 원목을 건져 트럭에 실었다."
마천면 일대 원시림 도벌은 지리산 수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칠선, 한신, 백무동계곡은 물론, 제석봉의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상나무, 전나무, 잣나무들도 깡그리 수난당했다. 백무동에서 첫나들이폭포에 이르는 편편한 길은 도벌 산판도로 유물이다. 제석봉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 그 높은 곳에서 아름드리 나무들을 결딴냈다. 이들은 또 도벌 사실을 숨기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러 고사목지대로 황폐화시켰다. 자연 파괴, 정녕 인간을 따를 자가 없겠다.
출처: 최화수선생 블로그
https://naver.me/G4LdJ9MU
첫댓글 박여량
바로 우리동(于里洞)이었다. 우리동 중간쯤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은 조금 움푹하였는데 ‘하동암(河東巖)’이라 불렀다.
우리동은 하동바위 아래에 있던 마을로 소시장에 팔 소를 맡겨두던 곳이라 그렇게 부른건 아닌가 생각한다
화개장터는 음정마을을 거쳐 벽소령을 넘어갔는데, 그 중간에 '넝바우'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3가구의 집이 있었는데, 지리산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팔고 잠을 재워주는 주막이었다.
넝바우는 어딜까?
광암
망바위골 =넝바우골???
백무동에 살던 무당들이 올라 천왕봉을 바라보며 소지를 올리던 곳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