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보고 싶은 묘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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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이루어지고
평화무드가 조성되어
남북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다.
지난 9월에는
백두산에서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치켜든 모습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도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분단의 역사가
민족의 비극으로 내려온 점에서 볼 때
통일의 염원이
노래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내 개인의 사적인 입장에서
통일을 원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북한의 명산대찰을 찾아가
자유롭게 참배하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통일을 원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사문으로서 절에 살아온 나는
북한의 명찰을 꼭 찾아가 보고 싶은 염원은
간절하고도 진심어린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한 때 갈 수 있었던 금강산도 가 보지 못하고
백두산도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행히
묘향산 보현사를 참배하고 온 적은 있다.
2005년에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북한의 조선 불교도연맹과
남한의 평화통일 불교협의회가 협의하여
당국의 허가를 받아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평양과 묘향산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때 은해사 승가대학원에 있을 때였는데
주지로 있던 법타 스님이
평화통일 불교협의회를 조직하여 이끌면서
북한측과 교섭하여 북한 방문을 주선하였다.
평양에 가서
만경대 밑의 김일성 주석의 생가라는 곳과
개선문, 주체탑을 가보고
저녁에는 5.1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지만
묘향산 보현사를 찾아가 참배했을 때가
가장 인상적이고 감회가 깊었다.
묘향산 보현사는 서산대사가 계셨던 절이다.
서산이 바로 묘향산을 두고 한 말이다.
북한에서 가장 잘 보존된 사찰이 보현사이다.
절 규모도 현대에 와서는 가장 큰 절이다.
우리가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릴 때
그곳에 살고 있던 80세의 노스님 한 분이
우리가 예불 드리면서
창불(唱佛)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였다.
알고 보니
해방 전 젊었을 적 10대의 시절에
통도사 해인사 등 남한의 절에서 생활하다가
이북으로 올라가 사신 스님으로
우리 예불 모습을 보고
옛날의 향수에 젖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였다.
그때의 보현사는
남한의 절처럼 수행의 공간이 아닌 것 같았다.
법당에 목탁도 없었다.
북한에도 300명 정도의 스님이 있다고 하지만
절 밑 마을에 살면서
절을 관리하기 위해서 출퇴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 하였다.
비구승들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간 목탁을 치면서 예불을 드렸다.
서산대사의 유적사찰이기도 한 절인데도
사찰 연혁이나 역사에 관한 소개는 아예 없었다.
다만 이런 글귀를 적은 작은 나무판이
몇 곳에 붙어 있었다.
“여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25번을 왔다 간 곳입니다.”
여기는 김정숙 여사가
17번을 왔다 간 곳입니다.
또 김정일 동지의 내왕도 소개 되어 있었다.
서산스님이나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사회 체제가 달라 종교의 신앙 활동이
제대로 이루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은 그냥 조석 예불도 없이
관리 형태로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절의 경내는 매우 쾌적했다.
정말 산 이름 그대로
미묘한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원래 묘향산은
측백나무의 묘한 향기가
풍긴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웅전을 위시해
영산전, 관음전의 법당이 있었고
절로 들어오는 문이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으로 이어졌고
만세루와 북한의 국보라는 8각 13층 석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또 한 쪽에 임진왜란 때
구국의 선봉장에 섰던
서산대사와 사명당
그리고 처영스님의 영전을 모신
수충사(酬忠祠)가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비석이 있었는데
사적비로 ‘보현사 사지기’라 제목이 되어 있고
고려의 문신 김부식이 짓고
문공유가 글씨를 썼다고 하였다.
절이 창건된 때는
고려 현종 19년(1028년)이며
그 당시는 산 이름도 연주산(延州山)이었고
절 이름도 안심사(安心寺)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직
만 천년이 되지 않은 절이다.
창건에 힘쓴 스님이
탐밀(探密)과 굉학(宏廓) 두 스님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묘향산에 갔을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정확히 10월 16일이었다.
절 경내를 살펴보고
절을 에워싸고 있는 산의 경치를 둘러보았다.
북녘이라 마침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에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탄복을 자아내는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모두들 조용한 탄성으로 경치를 감상하였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토록 절경을 이룬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등산객이나 관람객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산은 무주공산처럼
적정 속에 파묻혀 있고
군사지역이라도 되는지
아무도 산속으로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이 오건 안 오건
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서산 스님의 말을
기억하고 생각해 본 일이지만
정말 웅장하고 수려한 것 같았다.
서산대사가 묘향산을 평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사가 살아본
금강산과 지리산을 비교하면서
“금강산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하지만
묘향산은 웅장하고도 수려하다.”
고 하였다.
그래서 만년에 서산스님은
이곳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다.
산내 암자인
원적암에서 입적(入寂)을 하였다.
절로 들어가는 산문 입구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유물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국 정상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그 당시까지의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선물한 것도 죄다 전시되어 있었다.
김일성 주석 유물관에는
순금으로 된 옛날 장군도 같은
큰 칼이 여러 자루가 전시되어 있었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준 고속도로였다.
버스를 타고 가고 오는 왕복 네 시간 동안에
지나가는 차량을 보지 못했다.
남한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타고 가는 버스뿐이었다.
다만 돌아올 적에
군용트럭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은 보았다.
교통량이 없어
도로도 무척 산듯하고
쾌적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인상이 내게는 웬 일로 좋게 남아 있다.
등산객 없는 묘향산 오가는 차량이
눈에 띄지 않는 도로,
물론 지금은 또 변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때의 묘향산을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그리운 묘향산의 풍경이
추억이 되어 되살아난다.
ㅡ지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