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禦侮將軍 龍驤衛 副司果 諱 安藩公 年譜,어모장군 용양위 부사과 휘 안번공 년보,
公의 諱는 安藩이요, 字는 영보(寧甫)로 갑술(甲戌)1574년5월27일 영천 자양 노항리에서 출생 하시니, 오천정씨 始祖 추밀원 지주사를 지내시고,號가 형양선생(滎陽先生) 諱 襲明의 17世孫 이시고, 8世에 전하여, 봉익대부 전공판서,諱 仁彦께서 고려말 1392년 某月 日에 신군부 이성계의 亂에 대한 종손 夢周가 선죽교에서 禍를 당하기 전일에 그 禍를 미리 예견 하시고 집안의 안녕을 도모하기를 위함으로 피하여,고려 문하시중 몽주의 아들과 손자.손녀들은 경기도에 모두 각자 따로 은둔 시키고,본인은 둘째아들 한성윤 元厚의 가족들은 따라 오질 아니하고 본인은 장남 光厚의 치솔들을 모두 거느리고 처음으로 永川 南쪽 전촌리에 은둔 하시어,내려 오신 후로 그 자손들은 代代로 영천땅에 살았으며,광후는 문예(文裔)를 낳으니,영양이씨에게 장가 들면서 전촌에서 명산 대전촌으로 이거 하여 살았다, 문예는 휘 종소(從韶)를 낳으니 5형제 중에 장남으로 청통 은해사로 들어가 외숙 충장공 이보흠,과 유태재선생에게 수학하여,생원,진사에 입격하시고 세종 25년에 중시문과에 급재하시고 연이어 세종 29년에 또 문과에 응시하시어 을과 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여, 말직은 성균사성으로 역임하시고,외직으론 영주군수,예천,함양군수로 역임 중에 단종이 세조에게 화를 당하니, 낙향하시어,외숙부 이충장공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도운 유신으로 숙모전에 배향된다,종소가 諱 以揮를 낳으시니,3형제의 장남으로 문과(文科)하여 통정대부 지평(持平)과 장수도찰방(察訪)을 역임 하셨으니,公에게 고조(高祖)가 되시며,증조의 諱는 차근(次謹)으로 관직은 충순위 선무랑(忠順位 宣務郞)하셨는데, 연산군 무오사화의 禍를 피하여, 고향 대전촌를 떠나 처음으로 영천 자양 노항리.로 은거 하셨으니, 영천 노항의 입향조가 되었다,
선무랑공이 아들 윤량(允良)을 낳으니 장사랑 참능참봉,이요, 참봉공이 세아(世雅)를 낳으니 公의 考가 되시며,명종13년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의 벼슬에는 뜻을 두지아니하시고 고향산천 노항에서 학문에만 힘을쓰시다가 선조 임진 1592년 4월에 왜놈들이 바다건너 조선을 침범하여 조선의 임금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파천하게 되자, 모든 가산을 팔아서 군량미를 마련하여 아들과 의병을 모아서 영천의병장에 추증되어 영천성을 복원하고, 연이어 경주성 탈환 전투에 선봉이 되어 죽을 각오로 힘껫 싸워서 경주성도 복원하여 조선임금이 파천에서 한양으로 복귀하고 조선 남도를 안정시키고,모든 功은 남들에게 양보하고서 본인은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를 강호수(江湖叟)로 하여 자호정사인 강호정에서 지산 조호익,창석 이준,여헌 장현광,등의 현인들의 방문에 학문 토론을 하는데,힘쓰고,있을때 조정에서 선생의 소문을 듣고, 대신 오리 이원익공이 강호정에 찾아와서 국정의 안정을 도모하는 토론을 나누고,돌아간 오리 이원익대감의 누차 추천의 벼슬을 물리치다가, 이대감이 다시 황산도찰방을 추천하자 마지못하여,잠시 황산도 찰방의 임기를 마치고는 더 이상의 벼슬 추천에도 불응하고 학문에만 힘쓰다 1612년 윤 11월 초 3일에 생을 마치니,나라에서 증직을 자헌대부 병조참판,시호를 강의(剛義)로 내려 국불천위에 내려졌다, 公의 어머님은 일직손씨 비안현감 치운(致雲)의 따님으로 슬하에 4남 2녀를 두시니 公은 3남으로, 백형은 호가 백암(栢岩)으로 휘 의번(宜藩)은 아버지 진사공을 따라 의병장이 되어 영천성을 복원하고,경주성전투 경주서천전투에서 순절했고, 중형 처사공 諱 유번(維藩)공과 형수 흥양이씨는 병약하여,임란 전에
세상을 떠났고, 노항에는 양부모와 백형수 녕월신씨와 아우 수번(守藩)이 있었고, 公은 족 왕고모부인 경주 김호 의병장과 함께 울산에 잠유한 왜적을 물리치고 왕대고모부 김공과 계연전투에서 승전하고 족왕대고모부가 이젠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유에 의병진과 해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참고자료, 호수실기,영천읍지,영양군지,최벽남 임란일기,팔공산 회맹록,화왕산 회맹록,경주 회맹록,
만호공(萬戶公.安藩) 양력(略歷) 요약(要約)
* 1574년 5월 27일 영천 자양 노항리 옛집에서 公은 아버지 進士 湖叟 鄭世雅,어머님 일직손씨 사이에 4남 2녀 중에서 3남으로 출생 하셨다,
公은 어릴 때 부터 남다른 호연(浩然)한 기질(氣質)이 있어 장성함에 체격이 커 웅대한 기상과 기질로 작은 절개에는 얽매이지 않으셨다, 아버지 進士公의 훈육과 수업 하에 학문이 날로 깊어 장차 생원 진사 시험을 치루기 위해 더욱 공부에 열중하던중 19세 때에 왜적이 침입한 임진난(1592년 4월 13일)일이 발발하여 그 해 4월 23일 公은 부친 진사공,모친 일직손씨,백형 생원 宜藩, 형수 寧越辛氏, 아우 守藩,있었다, 부모 양친을 비롯하여 가족 모두을 뫼시고 노비(奴婢) 몇몇을 데리고 영천 북쪽 40여리의 기룡산(騎龍山) 궁륭암(穹隆岩) 성혈지(聖穴趾) 해발 940m로 피난하였다,
중형 維藩과 형수 흥양이씨는 피난 행열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임란 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씨(姉氏) 두분 장운익(張雲翼) 양우형(楊遇亨)에게 출가 해서 옛집에 없었으므로 피란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 해 5월 初 부친 진사공의 命으로 백형 생원 의번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할 격문을 짜고서 방을 붙혀 의병을 모집하여 어려운 중에도 가재(家財)를 털어 군량을 마련하여 부친 진사공을 영천 의병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구국항전(救國抗戰)에 앞서 公은 부친 진사공 앞에 나아가 백형과 함께 출전 하기를 청하니 진사공의 命은 "너의 형이 출전하니 너는 시어불리측(侍御不離側)하여 승전가사유업(承奠家事유業)하여 가계를 유지하라,는 엄명에 따라 낯선 보현산 심산유곡의 난민생활의 어려움을 격어면서 식구들의 양식을 구하려고 어린아우 守藩을 데리고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백 여리 길 달성 황천동 외가에 가서 쌀을 구하여 모친을 봉양하며 형수를 극진히 모셨다, 영천의병장 호수 鄭世雅를 전후하여 의병장(義兵將) 世雅公은 生員 최벽남(崔壁男)을 중위장(中衛將)에 임명하고 백형 宜藩을 비롯한 막료비장(幕僚裨將)과 향인의병 900여 의진을 지휘하여 그 해 7월27일 영천성를 탈환 수복 하였다, 이 때에 公도 모친께서 부군의 소식이 궁금하여 公에게 진영에 다녀 오라는 命에 혼자서 주평뜰(주남뜰)에 도착하니 마침 영천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公도 참가하려 하니 백형께서 만류함에도 公은 기여코 함께 참전하여 힘을 보태고 돌아가 모친께 승전 소식을 올리니 모친과 형수이하 온 집안식구들이 기뻐하여,소리치니 주위의 피난민들도 알아서 기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같은 해 8월 21일 영천의병장의 선봉이 되어 경주성에 잔류한 왜적들과 서천전투에서 영천의병장이 왜구들에 포위 되었음을 알고 백형 宜藩公은 부친을 구출하기 위한 격렬한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셨다, *公은 심산유곡에서 전사 소식의 비보(悲報)를 접한 형수 신씨와 노모 및 가족들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으며 가정의 앞날은 암담(暗澹)하기가 너무나 큰 나머지 公은 분괴하여 *백형의 원수를 값기로 맹세하고 노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왜구들이 있다는 울산을 향하여 달려갔다, 말은 경주를 거쳐 언양으로 달리는 도중 향인들의 의병들을 만나서 公의 사유를 이야기를 전하니 모두가 동요하여 슬퍼하고 公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고, 곧 의병장 김호(金虎) 장군께 안내하니, 김호장군은 公을 가까이 두어 복병장으로 삼아 함께 울산에 주둔한 왜적들이 울산주위를 다니며 노략질을 하는 무리들을 무찔렸다,
註) 김호(金虎) = 본관은 경주이며, 字는 덕원(德元)이요, 호는 월암(月菴)이며 신라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鐘)의 후손이다,
울산부사 급(伋)의 현손으로 내금위어모장군 숙린(叔燐)의 아들로 중종 29년 1534년 경주 탑동에서 출생하여 어릴때 부터 무술과 용맹이 뛰어나 선조 3년 157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를 지내고, 임진란이 일어나니 분기하여 아들 이충(以忠),이관(以寬),과 더불어 3부자가 의병을 일어켰다,
당시 公의 나이 59세의 노령에도 스스로 남면대장(南面大將)이라 부르며 대갈일성 적장을 꾸짖고 활을 쏘아 꺼꾸러뜨린 뒤 연이어 적을 격파하니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公의 용맹함을 들은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전략요충인 부산성 수비책임을 부여하였다, 公은 곧 만호(萬戶) 이홍정(李弘淨)과 수성대책을 세워 흐트러진 관군을 취합하고 의병 일천여 명을 모아 부산성을 중심으로 활약하니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대장으로 임명했다,
영천복성전에 참여하고, 당시 열박산령(咽薄山嶺)과 노곡(蘆谷)지구는 언양(彦陽)에서 두동(斗東) 斗西를 거쳐 진입하는 적의 길목으로 격전지였다,* *이 때에 마침 安藩公이 울산 왜적을 대적하려 내려 가는 길이 였으니, 또 김호장군은 오천정씨 부인을 맞아 장가 들었으니, 안번공과는 족왕대고모 뻘이된다,
十一代 亨之
:..................
12대 思和 思淳.
: :................................................
13대 世雄,世俊, 官 商 忱
:무후, : :
14대 世雄,世俊, 무남1녀 女壻 김호, 延年 延慶
이러하니 김호장군은 公에게는 족왕대고모부 뻘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오천정씨 호수(집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트라 가까운 촌수가 되겠다,
**鄭公도 김장군과 언양에서 울산으로 가는 당지교 다리밑에 잠복하여 지나는 왜적들을 많이 잡아 목을 쳤고 획득한 조총과 군마등 습득하였으며, 산길목에 잠복하여 왜적들을 참살한 적들이 많았였다,
언양주위의 전투인 두동전투에도 참여하여 많은 전승을 거두고 열박산 남쪽 전읍 전투의 승전을 거둔뒤에 울산 태화강 전투의 승전을 거둔뒤 안번공은 김장군과 작별의 정을 나누고, 고향 노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호장군은 1593년 2월 21일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주도하는 문경군 당교전투에도 참전하여 전승을 거두고, 1697년 12월 21일 울산 계연(雞淵)전투에서 혈전을 벌리다가 순절하니,
이 전사 소식을 들은 오천정씨 부인은 울부짖다가 자결하여 부군을 따라 순사(殉死) 하였다,
김호장군은 사후에 1605년에 절충장군으로 선무원종공신2등훈에 녹훈되고, 영조34년 1758년에 형조참판에 추증되어,사림의 공의로 남강사를 창건하여 제향하며,불천위를 모신다,
**公이 돌아오니, 부친의 의병진을 생원 조희익(曺希益)에게 넘기고 강호정에 계셨으나, 백형.등 순절사의 정을 잊지못해 病으로 고생하고 계시므로 公은 정성을 다하여 병 간호를 하였다,
**公은 부친의 病세가 호전되자, 公은 1593년 가을 부터 다시 공부를 하기위해 입암에 권동봉선생을 찾아뵙고, 학문에 더욱 힘을 쏟다가, 입암에 자주 들여서 학문을 읶히니, 동봉선생은 公을 귀하게 여겨서, 둘째 사위로 삼으니, **그 때가 丙申 1596년 公의 나이 22세 였으며, 권씨부안은 丁丑 1577년 5월 28일에 출생하시니, 19세에 혼인을 하시였다,
권씨부인은 오천정씨 생원 정거(鄭.王居)의 따님과 공조참의 안동권씨 권극립(權克立)의 따님 사이의 1남4녀중 둘째 따님이시다,
* 公께서는 甲戌:1574년 5월 27일 영천 자양 노항 옛 집에서 출생 하시다,
*公의 형제분들은 모두 아버지 호수공에게 글을 배우면서 성장하셨다,
*公 19세 壬辰: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동년 4월 백형 백암 宜藩,과 더불어 격문(檄文)을 짜고 방을 붙이고 의병을 모집하다,
*동년 4월 하순에 모친 손씨,형수 신씨, 아우 수번,을 거느리고 노항 기룡산 궁룡암으로 피난을 하다, 5월 초순 보현산 자락 아래로 피난처를 옮기다,
*동년 5월 부친 호수공과 백형 의번공을 찾아가 함께 영천성 복성전에 참가 하시다,
영천성이 복성하자 피난처에서 노항 집으로 돌아오다,
*동년 8월 21일 백형 宜藩公이 경주 서천전투에서 순국 하시다,
가을에 백형의 시총으로 장사 하다,
*동년 가을 백형의 장레를 치루고,곧 경남 언양 김호장군 진영으로 달려가 왜적을 무찌려다,
*公 20세 1593년 여름에 언양의병진에서 고향 노항으로 돌아오다,
이 해 가을에 입암 권동봉 선생님을 찾아가 뵙고 수학하다,
*公22세 1596년 9월 28일 부친 진사공을 모시고 원근동지와 팔공산에서 회맹하다,
*1596년 4월 양무공 李彦春장군의 군영에 가서 회맹 하다, 임란일기에도, 의병활동이 실려있다,
*公 23세 1596년 권동봉 선생의 2녀와 혼인을 하다,
*公24세 1597년 7월 21일 역시 부친을 모시고 경남 창녕 화왕산에 가서 회맹하다,
*동년 8월 19일 公의 장자 호인(好仁)을 영천 자양 입암 외가에서 출생하다,
*公 만26세 1600년 모월 장녀가 출생하다, 장적(長適)은 참봉 창녕 조진효이다,
*公27세 1601년에 부친 호수공의 命으로 영천북 10리 대전촌 고조부 선무랑공의 고향으로 분가 하였다, 공의 아우 수번공은 석동으로 분가 하였다,
公이 연산군 무오사화 이후에 처음 대전촌으로 이거하여 사시니,대전촌의 또 다른 입향조가 되시다,
*1601년 모월 일에 장자 호인(好仁)을 처음 글을 가리키며,부친 호수공에게 글을 배우게 하다,
*公31세 1605년 모월 모일에 장자 호인을 부친 호수공의 命으로 달성 황천동 외가 외종제 손모당에게 수업을 보내다,
*1605년 7월, 公은 문과를 원했으나, 당시 임란시에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의병 군량으로 사용했으므로, 가사를 위함으로 부친 호수공의 엄명으로 중시무과(重試武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초임으로 북변 수자리에 제수된 까닭으로 아우 守藩은 북변 수자리의 복무를 하였으므로 면제받은 특해를 받고 제포만호를 제수받았다,
그 후 외직으로 포이포만호와 내직으로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과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하였다, 萬戶公의 무과중시 임기시의 녹봉으로 집을 지었다,(임기 3년 녹봉)
만호공께서 벼슬을 그만두신 사유로는 1608년 모월 일에 때에 아우 수번이 조그마한 일로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으므로 公이 경상좌도 관찰사와 벼슬아치 들에게 아우의 일을 구명하는 변론을 청하니 관찰사가 거절하자,이에 불복하여 벼슬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라 하였다,
*公 31세, 1605년 10월 22일 차자 호문(好門)을 대전집에서 출생하다,
*公32세 1606년 모월 부터 公은 대전촌에 집을 짖기 시작하여 벼슬을 그 만두고 낙향하여 1608년에 완공하니, 안채를 비롯하여 안채아래 수칸의 집을 지어 십여채라 하고 방칸 수가 여러방이 되었으므로, 곧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는 대전동의 호수종택 이다,
안채만 남아있는 이유는 세월도 오래 되었거니와 구한말을 격고 또 6.25사변과 기해년 1959년 사라호 태풍을 당하여 완전 붕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라호 태풍 때에 삼귀못 뚝이 터졌는데, 삼귀못 굴방망이가 종가집 안채 돌 뚝담위에 있었다고 내가 집안어른들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지금 종택의 안내문에 1608년에 손자 해남현감 호례(好禮)가 지었다는 설명문은 잘못된 기록으로 문화재 신청 시에 종손이 지었다고 해야 만이 문화재 건물 승인이 난다고 하여 그렇게 적은 것이다,
萬戶公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항여 양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양부모님을 대전에 묘셨으나, 호수공은 자양 노항 맏며느리 신씨가 혼자 기거한 사정으로 강호정에 자주 거쳐하셨고, 손씨 할머님은 막네 며느리 조씨가 일찍 죽고,막네아들은 벼슬을 변방등 여러곳에 다녔기에 석동에는 어린손자 3형제가 있었기에 석동과 노항에 오가시면서 살았었다,
호수공께서 대전에 기거하신 기록은 창대공이 病으로 고을 군수자리를 사임하고 대전에서 기거함에 호수공이 창대를 찾아 두분이 임란전투 후유증을 깊이 나눴셨다는 창대실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 창대공이 病으로 끝내 卒하자 호수공이 직접 창대 喪에 관여하였다는 기록이 호수실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창대공의 집이 호수종택 옆에 살았다고 전한다,
*창대일기,월암실기,오천정씨 형지공보록,손모당일기,임란용사일기,
*公36세 1610년 庚戌에 장자 호인을 별사항시에 뽑히다, 항시에는 여러번 응시하여 뽑히다,
*公37세 1611년 5월 初2일, 입암 장인,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卒하다, 公의 字는 강재(强載)이요, 호는 東峯으로 명종13.1588년 3월 24일, 영천 언하리에서 출생하여, 오천정씨 생원 鄭거.의 따님과 혼인하여 임진란 때에 자양으로 피난하여 입암에 자리잡고 살면서, 윤암 손우남,우헌 정사상, 수암 정사진, 여헌 장현광,과 더불어 입암의 5현으로 불리였다,
*公38세 1612년 윤 11월 초3일 부친 진사공 世雅 별세(別世),향수(享壽) 78세,묘는 考 참봉공 묘상(墓上) 제일위 임좌 분(墳)으로 장례,임진란 영천성복성 공가(功加)로 누증(屢贈) 자헌대부 병조판서와 증시(贈諡) 강의(剛義)을 제수 하고 불천위에 命하다,
*公41세 1615년 부친 호수공(湖叟公) 복(服)을 마치다,
*公42세 1616년 丙辰5월10일에 장자 好仁을 장가 보내다, 맏며느리는 월성손씨 孫魯의 女를 맞이하다, 계천군 손소의 현손이다,
*公44세 1618년 10월에 장자 호인이 진사시에 제3등 29인에 뽑히다,
*公46세 1620년 5월 12일에 대전집에서 장손자(長孫子) 시행(時행)이 출생하다,
*公47세 1621년 7월 27일에 아우 수번(守藩)이 나이 42세에 등창으로 고생하다가 달성병영(達城兵營) 임소에서 죽다, 公이 직접 달성감영으로 가서 10월4일에 하천선영 考墓下 임좌 언덕에 장사(葬事) 했다,
무신(戊申) 1608년에 제수 曺氏가 죽어 장사를 하였는데,또 몇해 사이에 아우가 죽어니,슬프하여 몸을 재대로 가름하기 힘들어 하며,슬피 울면서 어린 조카 셋을 부덩켜않고 한없이 한탄하여, 이 때 부터 病이 나서 누웠는데, 또 모친 孫氏가 病이 드셔서 자리에 누우시니,公은 더욱 힘을 내어 겨우 일어나서 어머님의 병간호에 열중 하셨다,
*公48세 1622년 6월 12일 어머님 孫氏가 끝내 돌아가시니,향수(享壽) 84세 이며, 부친 묘소 좌부(左袝)에 장례하였다,
*公49세 1623년에 장자 호인을 문과시험 과거에 응시케 하다,
*公51세 1625년에 모친 손씨 喪의 服을 양부모의 아들중 혼자 살아 있었기에 상복을 마친다,
양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아우(弟) 수번과 제수인 조씨도 죽고 없어 석동에 어린조카 들이 살아 있기에 公이 직접 방문 하면서,글을 가리키고 조카들이 6.8세 드는 해에 모두 외가의 외4촌 손모당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으며, 조카들이 황천동에 보내기 전에는 公은 조카들의
공부를 종용하고, 권씨 부인은 매번 석동의 시조카에게 자주 들여서 옷과 음식을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수시로 여종들을 석동에 보내어 부엌에 쌀단지를 살피게 하여 부족하면 언제나
하인들에게 쌀단지를 채우도록 명령하였으며,권씨께서 방문할 때에는 직접 손수 밥을 지어 먹였다고 한다,
*公53세 1627년에 장남 호인이 문과별시에 급제하다,
*公54세 1628년 이로 부터 公과 숙부인 권씨는 病석에 눕게 되다,
*公이 병석에 누워 장남 호인과 차자 호문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벼슬하며 살아가는 어려움이 없을 진져, 이 집은 조부 호수공의 고가(古宅)으로 삼아서 물러 주도록 하여라," 命하시며, 누차 당부의 말씀을 남기시다,
*公56세 1630년 4월 13일 대전집 정침에서 서거하다, 영천북 자양동(紫陽洞) 후산 술좌지원(戌坐之原)에 장사 하였다,
*公 사후 1년,1631년 7월 初4일 배위 숙인권씨 별세하다, 향년 54세, 영천군북 대전집 앞 오며리(五旀里) 자좌지원(子坐原)에 장사 하였다,
*公 사후 12년 1642년 某월 모일에 公의 아들 好仁이 울주 청량면 덕하리 구산(求山)에 이장
울주 화정리 산 정자방(亭子坊) 동폄(東窆)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묘역개장(墓域改葬)하고 족숙 대군사부 쌍봉(雙峯) 극후(鄭克後)에게 묘갈문을 청하여 짓고, 묘지문은 영천최씨 자인현감 유춘정(留春亭) 최우직(崔友稷) 公에게 청하여 지었고, 묘비를 세워 개장천봉(改葬遷奉)하였다,(양산군수 임기 1639~1641년,)이다,
*개장후 입비 사실은 언제 몇 차래 입비 하였는지는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아 모르고,현 비석은 쌍봉선생이 찬술한 글로, 숭정 후 三 甲午 1774년 10월 모일 선생의 六세손 노우(魯宇) 충필(忠弼)公이 서역(書役) 했으니 노우공의 나이 50세 때 였다,
*또 후에 비석의 글자가 비바람에 노화되어 문자를 알아보기 힘들고 앞으로 자손들이 알아보이 도록 개갈을 1980년 모월 모일에 東자 항렬의 자손들이 의논하여, 쌍봉선생의 찬문으로 개갈 하였다,
*만호공 휘 안번(安藩)의 年譜을 정리하며, 우리들에게 傳해오는 기록들을 惑 빠진 부분이 또 있지않을까, 옛 선비들의 남기신 문적을 두루 살피여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함은 꾸준히 노력하여
보충 하여야 하겠습니다,
양계선조께서 1627년에 문과하여, 외직으로 양산군수로 제수 받아 양산임기를 마치시고, 公의 부모산소를 개장 하실 때에 울주 청량 덕하리에 산3필지, 논 일만여평, 밭 일만여평을 준비하시어
부묘를 지키게 하면서, 공의 아랫대 들은 덕하리에 이거 정착하여 살아주기를 원하셨으나, 공의 장남 무공랑 휘 시행(時行)께서는 덕하리 검단촌에 산 3필지와 여러 땅을 구입하시어 부친 양산군수의 장례를 치루고, 아버지 목사공의 喪중 1656년에 서거 하시고, 차자 학암공 휘 時衍公과 時衎께서는 당시 모친 월성손씨가 살아 계셔서 대전에서 봉양 함으로,무공랑의 장사도 부군 산소 아래에 하였고, 부군의 뜻을 이루질 못함은 장조카 양곡.휘 碩胄와 남어지 두조카도 어린 나이라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리라 사료됩니다,
(검단리의 산,과 지주땅은 잃어 버리고 현재는 관리 하지 못하고 있다)
또 양계공께서 처음 덕하재를 건립하시고,덕하재기를 누구에게 청하여 있었으리라 믿어지나, 옛 덕하재 재산 목록과 기문, 울산 검단리 선산의 목록을 자손들이 관리부족으로 모두 분실하여 傳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손된 사람으로 한탄 스러울 뿐입니다,
기문은 당시에 양계선조님과 친분이 가까우신 쌍봉선생,자인현감 유춘정.등등 께 청하여 짓지 않았을까 하고, 쌍봉집,을 보았으나 없었으며, 유춘정집은 아직 얻어보질 못했으니, 꾸준하게 공부에 힘써 찾아보아 현판을 하여야 겠습니다,
2020년 5월 初 1일 만호공 13세손 玎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