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 왜성
주소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산 211-1
경상남도 진해시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소서행장(少西幸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스페데스 신부 Gregorio de Cespedes (1551 또는 1552 ~ 1611)
카스티야 연합 왕국(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로 1569년에 살라망카의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알레한드로 발리그나노를 따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건너갔다가 1577년에 일본에 도착해 오오무라, 미야코, 코키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1585년에는 오사카에서 수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문을 받았으며, 1587년에는 히라도, 시마하라 주변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령을 발표하자 고생을 했다.
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공격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스페데스는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종군[1]해 나가사키에서 출발하고 대마도를 거쳤다가 조선으로 갔는데, 풍랑으로 되돌아가서 2번째 출항으로 1593년 말에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했다.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갔을 때, 조선은 전략상으로 일본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성들의 주변을 완전히 파괴하고 공터로 만들어 놓았다.
때문에 세스페데스는 조선의 주민들과 접촉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비밀리 조선에 간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처벌받을 뻔했다가 고니시 유키나가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이후 시마하라, 고쿠라 등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1년에 선종했다.
그가 조선을 방문하면서 남긴 편지 4통의 내용은 <선교사들의 역사>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조선을 꼬레이(Coray)라고 표기했다. 현존하는 기록상, 가톨릭 성직자이자, 유럽인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사람이 바로 그다.
전남 대흥사에서 보관 중이던 서산대사의 유물 중에 황금 십자가가 있는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문제의 황금 십자가는 70년대 도난을 당했다. 범인은 잡았지만, 유물은 이미 목포금방에서 불에 녹아서 유실되었다. 현재 복원 사업이 추진 중이다.
조선인과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창원시 진해구 웅천왜성 앞에 그를 기리는 세스페데스 공원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