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각. 자는 원손.
코에이 삼국지12 에서의 모습. 일국의 영웅을 간신 이미지로 만들어 놓았다.
집에 혼자 있다면 코에이 개쉑기들이라고 조용히 외쳐 보자.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권신 제갈각은 제갈량의 조카이며, 제갈근의 아들이다. 그가 위나라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와 싸우며 몰락하는 과정이 주는 시사점은 섬뜩한 데가 있다. 제갈각은 ‘동흥 전투’까지 승승장구했으나 이후 ‘합비신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국내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를 공포 정치로 억누르려 하다가 주살되었다. 이를 두고 당대 인사들이나 후대 유학자 지식인 계층, 역사학자들의 평은 제갈각이 분수에 넘치는 야욕을 부렸고 교만해져서 그랬다는 것이 주류다. 본인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지라 ‘동흥 전투’까지는 이길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에 주위와 화합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제갈각의 성정이 교만했다는 것이야 당대 서신들에서 충분히 확인되고 있으니 다른 이견이 존재할 수야 없다. 이후 삼국지 팬덤에서 형성된 제갈각의 이미지는 마치 ‘순리’를 거스르고, 자신의 알량한 재주, 조금 유능하긴 하지만 대단히 뛰어날 것까지는 없는 재주만 믿고, 일을 서두르는 철부지 헛똑똑이의 이미지다. 이는 제갈각의 숙부인 촉한의 명재상 제갈량의 ‘신중하고 꼼꼼한 리더쉽’과 대비되면서 더 부각되는 이미지다. 그런데 이런 프레임과 이미지 설정에서 놓치게 되는 부분은, 제갈각이 주위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일을 교만하게 추진했다고 했을 때 그 ‘주위 사람들’이 정말 제대로 된 사람들인가 하는 점이다.
당대 인사들이나 후대 사가들이나 제갈각이 ‘동흥 전투’의 승리까지 보인 대국적 행보가 모두 위대한 업적들의 연속이었다는 데 이견은 없다. 그 대국적 행보들 사이사이에 스며든 제갈각의 똘끼 넘치는 언행이나 스타일이 ‘나가도 너무 막나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후일 그의 몰락의 복선이었다는 평들은 많지만, ‘큰 행보’에서만큼은 충분히 한 국가의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가들의 부정적인 평가는 동흥 전투의 승리 이후에 곧바로 ‘다음 싸움’을 무리해서 벌이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즈음에서 밝히자면 나 또한 제갈각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단지 제갈각의 패인을 ‘주위와 화합할 줄 아는 제갈량 VS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제갈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적실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당시 오나라는 촉이나 위랑 비교해 봤을 때 중앙집권력이 약했고, 군사체제는 호족들 집안에 세습되는 사병 군대를 모아서 중앙군을 편성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는 수성전에서는 호족들의 단결로 큰 힘을 발휘했지만, 나아가는 공략전에서는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는 호족이 없을 때 ‘내 병사들만 손해볼 수야 없지’라는 꿍꿍이들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고 업적, 인기, 권모술수까지 뛰어났던 제갈각의 존재가 이런 분산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카드이기는 했다.
오나라의 더 심각한 문제는 대국적인 비전의 부재였다. 오나라의 개국공신인 주유나 노숙의 시대에서는 ‘중원을 통일하거나, 촉한과 반반 갈라 먹는다’는 대국적인 비전이 존재했던 반면, 노숙의 죽음 이후론 그 비전이 상실된 채로 ‘장강 이남에서 지방 정권으로 살면 그만이지’ 하는 다분히 자위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중앙집권력도 없고 대국적인 비전도 없으면 조직의 기조는 현실 변혁이 아닌 현상 유지로 흐르게 된다. 물론 이런 기조를 갖고 있다고 해서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위나라가 넘어가 주는 것은 아니었고, 야심만만하고 패기가 넘치는 제갈각이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동흥 전투에서 대승하고 돌아온 제갈각은 곧바로 다음 전쟁을 기획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파한다. 이 입장은 진수의 삼국지와 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첫머리가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오와 위는 양립할 수 없으니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를 병탄해야만 하다는 명료한 대국적 인식이다. 장강 이남에서 ‘현상 유지’하면서 지방 정권으로 살겠다는 건 두 나라의 건국 이념으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니깐, 오나라가 위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위나라에게 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는 주유와 노숙 이후로 ‘거시적인 비전 없이’ 오나라 국정을 이끌었던 지도층들의 무사안일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의 패기로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제갈각은 본인이 능력이 있고, 이번에 큰 승리를 거뒀으니 여세를 몰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이후로 벌어진 합비 신성 전투는 대패로 끝났고, 나는 제갈각을 칭찬하거나 옹호할 생각이 없다. 단지 그의 패인이 ‘현명한’ 주위 사람과 ‘독불장군’ 제갈각이라는 프레임에 가려져 있는 것이 싫을 뿐이다. 당시 제갈각의 합비 신성 전투를 반대하는 여론은 많았지만, 반대 의견들의 주요 근거로는 ‘연이은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다’, ‘각료 여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등이 주로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 전쟁이 무리라면, '대국적인 비전과 중앙집권력의 부재’는 자기들이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제갈각의 전쟁 기획은 단순히 땅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상 유지’ 수준으로만 머무른 국가 체질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 ‘합비’에만 병력을 몰빵했던 것도 그가 어떤 상징적인 효과를 중요시하고 있었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제갈각이 독불장군이라는 데는 내가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그 독불장군 제갈각은 당시 국가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 의지가 있었던 것이고, 독불장군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수술 의지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환부를 만들어낸 장본인들, 제갈각이 싫어했던 무사안일주의 기조를 퇴적시켜 왔던 장본인들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제갈각은 어쨌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깐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현상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기도 어려웠고, 정작 그 사람들이 무능력하기까지 했는데, 그들 밑에서 억눌려 오면서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을 착실하게 쌓아왔던 제갈각이었다. 이런 억눌림은 합비 전투의 패배 이후로 폭발한 걸로 보인다. 그 결과 공포 정치로 흑화하다가 정적들에게 주살을 당했다.
제갈각이 잘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의 잘못은 ‘그가 현명한 주위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무능력한 주위 사람들의 뿌리를 끊고’, 국가에 새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신흥 세력들을 키우지 못했던 데 있다. 제갈각의 국가 개혁 의지는 훌륭했지만, 그의 잘못은 그 방법론을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운 전쟁과 국가 단위의 퍼포먼스만으로 하려고 했던 데 있다.
정치는 언제나 지지세력으로 하는 것이다. 제갈각을 반대했던 중신들의 대다수는 ‘제갈각이 화합했어야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제갈각이 숙청했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 숙청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 사상, 담론, 경제적 구조 변동이라는 밑바닥 층위에서부터 세력을 형성해 갔어야 했는데, 제갈각은 몇 번의 전쟁 승리와 퍼포먼스, 요행수 같은 걸로 그걸 실현해낼 줄 알았으리라. 그가 유능했기 때문에 몇 번의 번뜩이는 효과는 있었을 줄 모르나, 그런 번뜩임은 지속가능하게 재생산되지 않고, 후대와 타인으로 대물림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몇 번의 표면적인 승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위태로운 구도 속에서,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만다.
제갈각의 몰락이 ‘고립되었기 때문’이라는 주류 사가들의 평가는 정확히 맞다. 근데 그 ‘고립됨’을 기존 호족들과의 상생으로 해결했어야 했다는 주류 사가들의 암묵적인 뉘앙스와 프레임은 잘못되었다. 고립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호족들과 상생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적대하고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 세력 형성을 몇 번의 퍼포먼스와 요행수로 할 것이 아니라 밑바닥 담론 층위에서부터 개진시켰어야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상생하는 게 아니라, 주위의 썩은 물들을 싸그리 물갈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위 사람들’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는 이 패착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 개혁에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서도 자신의 패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호도하는 프레임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황송 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