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으로 아이를 키우려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요즘 많이들 하는 주말농장도 대표적인 예.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들이 직접 주체가 되어 농작물을 기르고 농사일을 배우는 곳이 있다. 일과 놀이가 하나가 되는 곳, 파주 어린농부학교 취재기.
‘유아기’는 생애 주기 중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다. 주변의 작은 변화도 민감하게 캐치하고 풍부하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기에 화초, 농작물을 가꾸는 원예활동은 사고력, 탐구력, 창의력, 사회성 등 아이가 유년기에 익혀야 할 인지·정서적 능력을 높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이탈리아 교육학자 몬테소리는 아이들이 식물을 돌보는 활동을 통해 자연 생태계의 질서와 식물의 생명주기를 이해하며 생태적 감수성을 키운다고 하였다. 자연친화적인 태도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며 아이의 공감 능력을 키우는 등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준다.
농사꾼 '돌쇠'로 변신!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에서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특히 식물을 직접 가꾼다는 건 쉽지 않다. 대부분 갇힌 건물 안에서 인공적인 교재와 교구를 가지고 놀 뿐이다. 집에서는 컴퓨터 게임, TV 시청 등 실내활동을 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파주도시농부학교를 주축으로 생긴 ‘어린농부’ 프로그램이 엄마들 사이에 큰 호응을 끌고있다는 소식은 매우 반갑다. 그간 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텃밭활동 프로그램은 제법 있었지만, 5~6세부터 참여할 수 있는 어린농부 프로그램이 생긴 것은 불과 1~2년밖에 되지 않는다. 미취학 어린 유아들이 한 달에 한두 차례 와서 농사일 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생각할 수 있지만 1년이라는 기간은 적지 않은 시간이다. 한 해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면 훌쩍 자란 키만큼이나 아이의 마음도 자랐음을 알게 될 것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생태프로그램, 어린농부학교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초, 파주 심학산 자락에 어린 농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도시농부를 꾸준히 배출하며 프로그램을 지원해 온 파주도시농부학교가 아이들을 위해 ‘어린농부학교’를 시작한 것. 올해로 2회째 맞이한 어린농부학교는 주말이면 텃밭을 일구고 풍성한 자연놀이를 즐기며 산과 밭에서 직접 재배한 신선한 먹거리를 맛보는 특별한 체험활동이다. 전인교육에 기반을 둔 발도르프 교육과 숲유치원의 프로그램이 합쳐진 것도 매력적.
어린농부학교가 여타의 생태 프로그램과 또다른 차이가 있다면, 단순한 일회성 맛보기 체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것부터 시작해 작물을 기르고 수확하기까지 일일이 아이들의 손길이 닿는다. 삶에서 꼭 익혀야 할 지식을 일하고 놀면서 배우는 ‘노작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노작’은 일과 놀이의 중간 단계로 결과물의 완성도보다는 일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배움 활동이다.
독일에서 교육사회학을 공부하고 어린농부학교를 이끌고 있는 서정만 교장은 유럽에서는 노작 교육이 지적·도덕적 능력 발달에 기반이 되기 때문에 공교육에도 적극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노작교육이 아이들의 오감 발달뿐 아니라 자존감, 자립심, 감수성, 인성, 창조성, 과학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 수업이 있던 날은 한마디로 혼을 쏙 빼놓은 하루였다. 고랑을 내라고 삽을 들려주니 다들 신이 났다. 일과 놀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흙 파내는 것 자체에 열을 올리는 아이, 제법 그럴듯한 고랑을 내고는 뿌듯해하는 아이, 밭 구석구석 남아 있는 전년도 ‘돼지감자’를 캐내고 신이 난 아이, 수돗물을 틀어 고랑을 물바다로 만든 아이…. 놀이인지 일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열심히 에너지를 풀어냈다는 듯 하나같이 상쾌한 표정이다.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 채 벌러덩 흙 위로 드러눕는 아이도 있다. ‘아, 덥다’, ‘힘들다’, ‘재밌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일 한만큼 배도 고프게 마련. 모닥불을 피워 감자를 굽는데 생각만큼 빨리 익지 않는다. 성질 급한 아이들은 설익은 감자를 먹으면서도 맛있단다. 소금, 설탕 찍지 않아도 감자의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는 기회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고, 진짜 미각교육은 ‘넘치는 음식’보다 다소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이루어지는 법이다.
어린농부 되는 법…
1. 잠시 몸을 푸는 시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심학산의 정기를 들이마시는 중.
2. 미리 준비된 나무 이름표에 각자의 이름을 적는다. 자기소개도 하며 서로의 이름을 익히는 자리.
프로그램은 월 1회반과 격주로 운영하는 월 2회반이 있다. 수강료는 1회 기준 2만5000원. 평소에는 파주도시농부학교에서 농작물을 관리하다가 아이들 수업이 있는 날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수확을 하는 등 중요한 농사일을 진행하는 식으로 운영한다. 프로그램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주요 활동은 농사짓기, 자연놀이, 먹거리 체험이다. 일반 가정에서 많이들 하는 주말농장과 가장 큰 차이라면 아이들이 ‘주인공’이 된다는 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텃밭 지도사들이 아이들을 이끌어준다. 어린농부학교는 이전까지만 해도 초등생 대상의 프로그램 일색이었다. 간혹 유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구청 단위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일회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기획된 어린농부 프로그램은 한 해 동안 꾸준히 농작물을 키운다는 데 의의가 크다. 처음에 프로그램을 기획할 당시만 하더라도 토요일 2개 반만 개설할 예정이었는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 토요일·일요일 4개 반을 증설했다. 한 달에 1회, 또는 2회의 체험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자리가 난 반이 있을 경우 추가로 신청할 수도 있다. 단, 진행 프로그램이 일부 겹치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특별한 준비물은 필요 없다. 흙이 묻어도 되는 편안한 옷, 태양을 가려줄 모자, 고무장화 한 켤레, 마실 물만 준비하면 된다.
어린농부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나
어린농부들을 위한 호미. 아이들의 작은 손에 맞춰 대장간에서 특별 맞춤 제작했다. 무게도 가볍고 날도 일부러 무디게 만들어 안전하다.
아이들은 몸으로 세상을 배워나간다. 뛰고, 걷고, 숙이고, 쪼그리고, 다투고, 가꾸고…. 움직임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의 근육은 살아가는 데 ‘유용한’ 지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직접 농부가 되어 텃밭을 꾸린다는 건, 이 모든 걸 경험할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3월부터 12월까지 12절기 농사 흐름에 맞춰 감자, 상추, 열무, 당근, 고추, 가지, 토마토, 콩, 옥수수, 무, 배추 등 일상에서 흔히 보는 채소를 직접 ‘심고’, ‘가꾸고’, ‘수확’ 한다. 비록 주말에만 참여한다지만, 겨울을 제외한 10개월간의 긴 여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게다가 농사만 짓는 게 다가 아니다. 수확한 작물로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직접 요리도 한다. 평소 먹던 음식과 달리 다소 거칠고 밋밋한 맛이지만 직접 기른 작물을 최소한의 조리로 먹음으로써 보다 신선하고 건강한 맛에 눈뜰 수 있게 된다. 본격적인 수확철이면 직접 기른 농작물을 농부시장에서 팔아보는 소중한 체험도 한다.
재배부터 수확, 판매까지 한다
1. 전년도에 수확하고 여전히 밭에 남겨져 있던 돼지감자를 잔뜩 수확했다. 못났지만 최고의 건강식품.
2. ‘심학산 텃밭배움터’라는 간판 뒤로 250여 평 규모의 밭이 펼쳐져 있다.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아이들의 손길이 더해지고 계절이 깊어감에 따라 푸릇한 농작물로 가득찰 것이다.
3. 오늘은 밭에 고랑을 만드는 날이다. 통로가 되는 곳이 고랑, 작물을 심을 곳이 두둑, 고랑과 두둑을 합쳐 ‘이랑’이라고 부른다는 걸 배운다. 갈퀴, 호미 등 농기구 이름도 배운다.
작년에는 광화문에서 열린 ‘농부시장’에 아이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가져다 팔았다. 어른들은 공동 경작한 감자로 부친 감자전과 효소차를 만들어 팔았고, 아이들은 옆에서 고추, 호박, 가지 등의 채소를 팔았다. 한여름이라 제법 더운 날씨였음에도 신장개업해 의욕 충만한 가게 사장님처럼 열심이었다. ‘고추 사세요~’, ‘호박 사세요~’, ‘가지 사세요~’ 아이들의 예쁜 목소리에 지나가던 어른들도 기특하다며 하나씩 사주고, 결국 그날의 농산물은 완판되는 기록을 세웠는데, 아이들은 그게 그리 재밌었는지 두고두고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시장놀이를 좋아하기 마련인데 이건 놀이가 아니라 ‘진짜’다. 열심히 일해 수확한 작물을 진짜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체험이 아닌 ‘진짜’가 주는 산교육의 효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기르기도 하고 먹기도 하지만, 직접 수확하고 판매하는 체험은 어린농부학교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수확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다
농사지을 때 씨 뿌리고 모종을 심는 것도 즐겁지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수확의 기쁨 아닐까. 정성스레 기른 농작물을 수확하는 날이면 아이들도 신이 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이고 진지하다. 감자, 고구마처럼 부지런히 땅을 캐내야 하는 작물부터 토마토, 옥수수, 호박, 배추, 무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수확물은 아이들의 마음도 풍요롭게 만든다. 더불어 그간 키운 작물을 대하며 생명의 소중함과 농부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책에서 읽는다 한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설명을 듣는다 한들 절대 배워지지 않는 진리를 아이 스스로 깨닫는다. 더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다른 풍광을 만들어내는 심학산 숲을 놀이터 삼아 뛰노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경험. 풍성한 자연을 바탕으로 노작과 함께 숲 체험, 자연놀이가 함께 진행된다.
자연놀이로 더욱 풍성해지는 텃밭 체험
텃밭 체험 중간중간에 자연놀이가 이어진다. 오늘은 산가지 쌓기 놀이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했다. 산에 있는 나뭇가지를 모아 순서를 정하고는 흐트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은 나뭇가지를 놀잇감으로 사용하려니 집에서 하던 ‘젠가’보다도 ‘텀블링 몽키’보다도 훨씬 어렵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할 때에는 다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논다. 실컷 땀 흘리고 뛰노느라 힘도 들었지만 여전히 에너지가 넘쳐 보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재밌어요’를 외친다. 어린농부의 다음번 프로그램은 모종 심고, 씨앗 뿌리기다. 또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배움이 있을지 사뭇 기대된다.
Interview
“아이들에게 텃밭은 어른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공간입니다” - 신동섭(어린농부학교 기획팀 팀장)
작년에 경주로 가족여행을 갔다가 거의 25년 만에 모교에 들를 기회가 있었지요. 그런데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학교가 너무 작은 거예요. 촬영이 종료된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이랄까. 어릴 땐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 길은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더군요. 순간 크기감, 거리감이란 게 단지 물리적인 수치로만 환산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심학산배움터의 어린농부들을 위한 텃밭은 약 250여 평. 어른들에게는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죠.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그럴까요. 아마 아이들에게는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아주 새롭고 넓은 세상’일 거예요. 옥수수, 방울토마토처럼 키 큰 작물이 훌쩍 자라 아이들 키를 넘길 무렵이면 체감 효과는 더할 겁니다. 텃밭 안에서 만나는 각종 채소, 곤충, 두더지 굴, 비탈길, 흙먼지, 수로, 모닥불, 비, 흙 놀이, 무당벌레, 호미…. 앞으로 1년간 겪게 될 농사일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길까요. 상상하는 이상일 거예요. 저도 도시에서 자란 터라 농사 경험은 없지만, 보리밟기라든지 산에서 놀던 기억, 학교 가는 길에 논두렁을 걷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종종 떠올라요. 세월의 강을 건너 다시 만나게 된‘작아진 학교’의 충격을 받은 다음부터는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들 눈높이에서 보면 텃밭이라는 공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고 풍성한 공간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저처럼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요.
Mom’s talk
① “삽질하는 모습 보니, 제법 어린 농부 태가 나네요” - 박준오(7세) 엄마 권종현 씨
어릴 때를 기억해보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던 순간이 가장 즐거웠어요. 흙냄새, 풀냄새가 주는 유년기의 평온함이 기억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어요. 준오에게도 그런 어린 시절을 누리게 하고 싶어서 평소에 숲도 많이 다녔지요. 그 덕분인지 저희 아이는 남자아이답지 않게 꽃도 좋아하고 나무도 참 좋아해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 모든 게 다 있네요. 지금은 잎이 나지 않았지만 조만간 나무의 녹음이 풍성해지겠죠. 친구도 많이 사귈 거고 자연의 넉넉한 품 안에서 즐겁게 놀 모습을 생각하면 제가 다 즐거워져요. 오늘 텃밭 활동하면서 준오는 난생처음 삽을 만져봤어요. 처음에는 삽질이 어색한지 서툴게 고랑을 만들더니 금세 익숙해져 곧잘 하더라고요.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갈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②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어요” - 전우영(6세) 엄마 김수희
할머니 할아버지도 도시에 살고 계시니 아이들이 시골 갈 기회가 전혀 없더라고요. 아이를 자연 속에서 즐겁게 뛰어놀게 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더군요. 우영이는 어린농부학교에 참여하면서 심학산에 처음 와봤어요. 가까운 일산에 살면서 한 번도 오지 못한 곳이었는데 이렇게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어 너무 좋네요. 아이가 신나게 땀 흘리며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앞으로 농작물도 심고 직접 수확해 먹는다고 하니 기대감이 정말 커요. 특별한 프로그램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