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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은 죽었다
함석헌
주어진 제목
주어진 제목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종교인은 죽었다는 이 말은 좀 잘되지 못한 말입니다. 첫째는 너무 유행적인 것 같아서고 둘째는 좀 경솔한 것 같아서입니다. 이 제목은 본시 내가 붙인 것도 아니고, 이런 글을 내가 쓰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종교인이란 생각도 종교인이 죽었다는 생각도, 그 죽었다는 부고를 내거나 장례식을 지내는 것을 내가 하잔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종교계」의 편집부에서 이런 제목을 결정해 가지고 와서 나더러 글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6대 종교의 대표들이 모여 협의, 토론을 하였을 때 나는 물론 어떤 교파에도 들어 있지 않았으니, 그것을 알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종교계」를 내면서 그 첫 호에 대중과 종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라기에, 그것은 본래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었으므로 시원치 못한대로 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지난 6월호에「종교인에게 할말 있다」는 제목으로 여러분의 글을 모아 특집을 내고, 그 글들을 보고 편집위원들이 토론한 결과「종교인은 죽었다」는 단정을 내렸다는 것이고, 거기 대한 설명을 나 더러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안을 내렸으면 내린 그 사람이 쓰는 것이 제일이지 왜 나더러 쓰라느냐하고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양 거절을 하여도 이글은 내가 꼭 써야 한다고 졸라댔습니다. 왜 불속의 밤알은 내가 밤낮 집어내야 하는 거냐하고 반문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마는 (사실 나는 이날것 남의 말을 듣고 불속의 밤알을 집어낸 일이 많습니다. 물론 내가 욕심이 많고 어리석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얻어 먹지도 못할 밤알을 얼러 추는 바람에 속아서 하리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손을 데면서 급기야 끄집어 내면 먹기는 다른 사람이 먹는 것 인줄 알지만, 튀어나오는 밤알에 눈알이 터져 소경이 된 눈으로라도 네가 단밤알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본다면야 내가 먹으나 다르겠느냐 하는 생각이 조금은 있어서 한 것이었습니다. 남이라고 생각했으면이야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을 하는 내마음이 너무 얕작은 것도 같고, 또 기어이 써야 한다고 싸우듯이 강박하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잡지사의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절대적인 이의 보낸 심문과 같아서 마침내 생각해 봅시다 하고 꺽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것은 내게 주어진 제목입니다. 제목(題目)의 목(目)은 눈입니다. 제목을 내주면서 글을 쓰라니, 내 눈이 아니고 남의 눈으로 보란 말입니다. 남의 눈이 되어서 보려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엔 잘 맞지 않습니다. 「종교인」이라니 종교인은 다 뭐냐?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종교인 자신들도 종교인이라느냐? 종교인은 죽었다니, 하나님은 죽었다는 요새 유행하는 말 듣고 따라서 하는 소리 아닌가? 세상에 나는 유행처럼 싫은 것은 없다. 그것은 제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증거 아닌가? 또 아무리 6대 종교의 대표라 하고 잡지 편집의 위원이라 하고, 여러분의 논문을 보고서라 하더러도, 종교인은 죽었다 하고 단번에 묶어 선언해 버리는 것은 너무 경솔하지 않은가?「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 했어도 미치리만큼 생각을 한끝이고,「본회퍼」는 인간은 인젠 어른이 됐다 했어도 목을 졸리우면서 외친 소리니 그래도 좋지만 종교인은 죽었다는 사람들은 얼마만큼이나 생각을 했으며 어느 정도로나 토론을 했을까? 솔직히 내논 말로 잡지가 팔리도록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자는 잡지기술에서 나온 점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이것은 내게 강박되는 생각입니다.
남의 눈으로 보라니, 남이 누구입니까? 잡지 편집위원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왜 그런 선언을 하게 됩니까?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잘못을 하게 되는데는 뒤에 손이 있습니다. 유행이라 하더라도 그 유행의 물결을 미는 것은 누구입니까? 경솔했다 하면 그들은 누구의 손에 밀려서 경솔한 것입니까? 호기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대중이 그 호기심은 이제 가지게 됩니까? 남은 결국 전체입니다. 나는 세계와 역사를 종합한 자리에서 이것을 보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주어진 제목,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세상에서 죽었다, 살았다, 하는 하나님 나는 믿지 않습니다. 살았다 해도 그리 큰 일이 아니요 죽었다 해도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유(有), 무(無), 사(死), 선(善), 악(惡)의 코로 짠 인간 이성의 그물에 걸리는 생선, 잡혔거나 뛰쳐났거나 간에 그리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달팽이가 뿔을 내 두르며 높다높다 해도 그 뿔에는 한정이 있는 것이고 두꺼비가 뼘 쥈다 폈다 하며 넓다넓다 해도 그 뼘은 요컨데
두꺼비의 뼘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산 일도 없고, 살지 않았으니, 죽는 일도 없습니다.) 그 말을 가지고 온 사람이 누구 였던 간, 그 말하는 동기가 무엇이었던 간, 상관할 것 없이,내게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다만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곧 계시하는 하나님, 다시 말해서 묻는 이고, 사람은 거기 대해 대답하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말,말씀
말로 할수 없는 것을 말로밖에 할수 없으니 거기 괴로움이 있습니다.
대답을 하려면 알아 들어야 할 것이고, 알아듣기 위해서는 해석을 해야 할 것 입니다. 말은 깊이를 가집니다. 평면적이 아니요 입체적입니다. 공간적이 아니고 시간적입니다. 좀 더 옳게 말해서 시간=공간적입니다. 모든 말은 상징이요 비유입니다.
말을 하는 것은 말씀 곧 계시를 보았기 매문이요, 그 말씀에 대답을 하잔 것인데, 그러나 모든 말은 말씀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말 아니하고 있을 수는 없지만, 말씀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이 세계가 지어졌지만 이 세계는 말씀을 모릅니다. 말이 있을 뿐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밖에 할 수 없으니 거기 괴롬이 있습니다. 그 괴롬에서 시(詩)가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말은 결국 시입니다. 시만 시가 아니라 과학자의 객관적인 설명이라는 말도 따지면 결국 비유요 상징입니다.
시는 그대로는 못 받습니다. 마치 어떤 음식도 그대로는 생명이 될 수 없고 씹어 삭아져서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는 음미(吟味)해야 합니다. 음미라니 씹는 다는 말입니다. 삼켜서는 아니 됩니다. 우물우물 될수록 오래 씹으면서 이리 맛보고 저리 맛봐야 합니다. 그러면 말로 할 수 없는 맛이 납니다. 그것이 시입니다. 말의 원형이 없어진 데가 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는 음미해야지만, 씹고 해석해야지만 또 고정된 해석을 부쳐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면 시는 죽습니다. 말은 말로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잔 것이기 때문에 유머가 있습니다. 한 없이 진한 요점에서 부터 예델 같이 연한 지경에까지 그 뜻의 범위가 무한히 넓습니다. 그러므로 시에는 고정하는 것이 질식입니다.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라 했다고 머리 가락을 다 헤고 재려는 사람과 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시는 영원히 영원히 삼켜버릴 생각은 말고 다시 말하면 이해했다 할 생각 말고 그저 알 듯 모를 듯 우물우물 흥헐홍헐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읽고 해석해 달라 아니하는 사람도 둔하지만 해석해 주면 받아 쓰겠다. 노트들고 기다리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계시는 말씀을 전하는 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해석에는 탄력성, 늘었다 줄었다 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대에 살아 맞을 수가 있습니다. 무한한 탄력이 있게 신 말씀으로 받으면 석가요, 예수고, 하나에다 고정을 시키면 길가의 당주역쟁이입니다.
음미라니 다른 말 아니고 모순을 살려 받는 일입니다. 생명은 모순이요 진리는 모순입니다. 살기도 하지만 죽기도 하는 것이 생명이요, 선하기도 하지만 악도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으려 하지 말고, 추수 때까지 두라는 거요 죄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거냐 저거냐 하지만 진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보살을 보살에서만 찾으려는 사람 어리석습니다. 보살은 때로는 야차 속에 있습니다. 야차 속에 보살 있다고 야차가 되란 말 아닙니다. 유다도 하나님을 나타냈다 해서 유다가 옳단 말 아닙니다. 하지만 야챠의 얼굴도 존경으로 드려다 보고 유다의 죽음도 불쌍한 마음으로 대하는 마음이 아니고는 진리는 모르고 말 것입니다. 죽었단다고 정말 죽은 거로 알아서는 아니됩니다. 살았단다고 정말 산 줄로 알아서는 아니됩니다. 그 정말이란 정말은 눈과 귀로 하는 정말입니다. 그것은 정말로는 거짓입니다. 정말 참 정말은 모순입니다. 살았으면서도 죽었습니다. 죽었으면서도 살았습니다. 생명을 잃는 자는 얻고 얻는 자는 잃습니다.
죽었다
사람은 종교 없이도 모든 학문을 하게 됐고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됐습니다.
종교인은 죽었다.
왜 죽었다고 합니까?
첫째 권위가 없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종교는 본래 사람의 살림 전체에 걸쳐서 절대의 권위를 가지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입니다. 인류 문명의 시초에 있어서 종교 없이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먹는데도 종교, 입는데도 종교, 잘 때도 종교, 깰 때도 종교, 종교 없이 날수가 없고 종교 없이 죽을 수도 없는 것이 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고, 정치고, 예술이고, 교육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에 있어서 사람의 하는 일의 표준은 종교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임금이나, 관리가 없었고 종교가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 교육에 있어서까지 종교는 아무 권위를 가진 것이 없습니다. 실지로는 아직 적지 않은 수의 학교에 종교 교육이 들어 있으나, 실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 없단다고 이 정치나 문화가 유지 되어가지 못할 염려가 있는가 하면 조금도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종교적인 인도에 있어서 조차 네루는 늘 말끝마다 우리나라는 세속국가라는 것을 자랑처럼 말하며 새로 독립된 인도를 말했습니다.
정치는 또 그만둡시다. 종교 그 자체 안에서 조차 종교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기독교 교회가 서 가는 것은 기독교 때문이냐, 모든 불교 사원이 유지되어 가는 것은 불교 때문이냐 가만히 공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결코 아닙니다. 이 경제 때문이요 이 정치 때문입니다. 저 때에 칼자루 하나 밖에 든 것이 없는(?) 군인들이 정권을 뺏아 가지고 모든 사회단체는 등록해라 아니하면 해체시킨다 할 때에 모든 종교 단체가 서로 다투어 가며 등록했다는 그 사실과, 모든 종교 단체의 유지는 결국 돈 있는 기업가들의 손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더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는 믿음 위한 것도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단체적인 힘을 이용해 먹으려는 심산으로 오고 돈을 내고 부처를 만들어준다 교회당을 지어준다 하는 것이 빤히 드려다 뵈는 데도 불구하고, 종교 자체를 위해서나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나 깨끗이 거절을 못하고, 도리어 굽실 굽실 절을 하고 받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때에 만일 고맙게 안 것은 아닌데 이 사회에 있어서 별수가 없지 않으냐? 부득이한 정책으로 그랬다 하면 그것은 더욱더 종교에서 먼 일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해서 이제 이 나라에서 모든 종교단체가 다 싹 없어진다 해서 무슨 아픔을 느끼겠습니까?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그 좋은 증거로는 공산주의 나라에는 종교 없고, 있다 해도 완전히 정치의 종노릇을 할 뿐 아닙니까? 그리고 오십보백보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엄정한 의미에서 무엇이 공산주의 보다 잘하노라 양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있는, 부끄러워도 아파도 아니하고 있는 종교인 그것은 동구 앞의 천하대장군 아니겠습니까?
그담 지식적 사상적으로도「종교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옛날에는 해가 뜨는 것도 달이 지는 것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도, 다 종교적으로 알았습니다. 버러지가 새끼를 까고 똥을 싸는 것 까지 하나님이, 따라서 종교인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의 시대입니다. 사람은 종교 없이도 모든 학문을 하게 됐고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됐습니다. 아니요 참 바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종교의 간섭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토를 뺏기다 뺏기다 생명의 신비라는 최후의 한 점에 퇴각을 했는데 그것마저 뺏기는 날이 오려하고 있습니다.」그것만 아니라 그전에 성령의 힘이라 부처의 신통력 이라 하던 모든 것이 대부분 심리학 사회학 물리 화학으로 설명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신성하던 모든 것이 그 겉에 올린 도금을 긁히어 버렸고, 그전에 야비하던 모든 것이 그 속의 갇히었던 법칙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종교적이란 말은 곧 보수적, 미신 완고 고집 독단이란 뜻으로 들리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하고 소년소녀의 손에서 빵을 뺏아 먹는 것은, 그러면서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한낱 우상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종교는 종교요 현실은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사회악이 날 뛰든 것을 보면서도, 사실은 용기가 없어 비겁하고 목숨 하나가 아까워서 그러면서도, 말은 사랑해야 한다 용서하고 참아야 한다 하면서. 저 세상만을 열심으로 주장하니, 이 생보다, 죽어서 천당이나 정토에 가는 것이 중하다 하니 그야말로 죽은 사인종(死人種) 아닙니까? 동그란 지구에 서방정토가 어디 있습니까? 서방정토 찾아 가고가면 떠나던 그 인도에 되돌아오는 것밖에 없을 것이요 천당 찾아 올라가면 인공위성과 이마를 부딪칠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네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지로는 연극장 댄스홀을 천당으로 여기고 유치장 교도소를 가장 무서운 지옥으로 밖에 모르면서 가엾은 선남선녀에게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 그것은 절깐에 죽어 있는 목판과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역사는 거기 대해 사정없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천년 넘도록 기독교에서 자랐노라는 유럽의 일류 문명국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각 나라가 다 서로 서로 하나님 편이라면 이기게 해 달라 기도하면 4년 동안 전쟁을 하고난즉 기독교는 아주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불교, 마호메트교 세계의 모든 종교국이 다 한데 어우러져 전보다 더 심히 싸우며 사람의 조직적 계획적인 대량 학살을 했습니다. 오늘의 세계 혼란은 이렇게 하여서 온 것입니다. 이제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양심적인 것은 종교인이 아니고 거기 대하여 의심하고 비판하고 반항하는 사람입니다. 미쳐서 돌아가는「성난 젊은이」를 보면서도 그냥 어쩔줄을 모르는 손은 피라미드 안의 미이라의 손 아니겠습니까?
종교인은 죽었습니다.
죽지 않았다
1. 주격 목적격 없는 믿음
2. 믿는 사람만이 영원하다
그럼 종교인은 정말 죽었나?
아닙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스스로 종교인은 죽었다 하는 한 죽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미쳤다 하는 사람이 참말 미치지는 않은 것처럼 스스로 죽은 줄을 아는 사람은 아주 죽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살 가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 가망 있는 가는 생명을 건져 살게 할 수 있을까?
죽으면 될 것입니다?
내가 종교인은 죽지 않았다 할 때 두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하는 뜻에서고 또 하나는 부정하는 뜻에서 입니다. 긍정은 상대에서 하는 말이고 부정은 절대에서 하는 말입니다.
종교인 죽었다 할 때는 종교는 살려두는 뜻이 그 뒤에 숨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종교 아니고는 종교인을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현대에는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은 절대의 긍정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함으로 살아남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신종교를 말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이야 살든 죽든, 종교인이야 살든 죽든, 믿는 사람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종교는 살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종교라 하면 이미 제도화한 종교로 알기 쉬우나 차라리 단순히 믿음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혹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곧 하나님이라 합니다.
그래서 주격, 목적격이 붙은 것은 참 믿음이 아니라 합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신앙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것이라면 그 내가 아무리 큰「나」라도 그 신앙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또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라 목적을 한 한 그 목적이 아무리 높은 거라 하더라도 그 신앙은 상대적인 것밖에 못됩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에는 인칭이 불어서는 아니 된다 믿음이 곧 하나님이라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죽었다 할 때는 그가 죽는 대신 믿음도 그 믿음을 믿는 사람도 구원이 되니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종교인은 죽지 않았다 할 때는 그와는 또 다른 뜻이 하나 있습니다. 부정적이라 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죽지 않았다 했지 살았다 하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은 것과 산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은 상대계에서 하는 말, 그래서 더 분명히 말하면 죽지 못한 것이고, 살았다는 것은 절대계에서 하는 말, 그래서 참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종교인이 스스로를 죽었다 할 때 그 반면 살아있는 증거지만, 그 살아 있음은 상대적인 생명이지 절대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한편 다행이요, 고맙고 희망 있는 말이지만, 그가 그런 스스로 판단을 하고 있는 한은 참 절대적인 생명에는 못 들어갈 것입니다. 거기는 정말 죽어야 들어갑니다. 상대적인 사(死)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사(死)입니다. 그래서 엄정한 뜻에서는 못 죽은 거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종교인이란 말부터가 믿음과는 먼 말입니다. 사람이람 사람이 있고 믿음이람 믿음이 있지, 종교인이란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한개의 추상명사 뿐입니다. 종교인이란 종교전문인이란 말인데 그것은 분업화한 문명의 산물입니다. 문명 분업화하는 수밖에 없고 할 수록 더 발달할 것입니다. 사람은 그와 반대로 문명이 분업화 할수록 점점 더 내면적으로 종합화 통일화 하지 않고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직업에는 전문가가 좋아도 인간에서는 전문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 소인(素人)이지. 소인(素人)이란 말은 서양말의 아마추어를 번역한 말인데 그 본래 뜻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은 직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일 그 자체가 좋아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마음에서 하는 사람입니다. 직업선수 보다는 소인(素人) 운동가의 경기가 더 좋고 직업 예술인 보다는 소인(素人)의 예술품이 더 좋습니다. 그것은 그 기술이나 그 기술로 된 작품보다 그 정신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전문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문인 중에 가장 나쁜 폐해를 끼치는 것이 아마 종교 전문인, 즉 직업 종교인일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종교인이 스스로 종교인운운할 때는 그 분업화, 전문화, 다시 말해서 종교의 기업화 해 가는 경향을 긍정하는 것 같아서 나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그가 죽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종교인, 곧 믿음의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절대에 대답하자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말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 아니라 말씀이 있어서 나온 말이 곧 사람입니다. 말 중에 가장 높이 나온 것이 사람 곧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그 인격은 본질적으로 절대에 대면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의 말을 빌면 너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인 담에 의식하거나 못하거나 간에 너에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너는 절대적인 너입니다. 모른다 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이길 수 없는 절대자입니다. 제 속에 그것을 그보다도 그것 속에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 너는 나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묻습니다. 나는 거기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은 응하는 것, 대답하는 것입니다, response 하는 것입니다. response하기 때문에 responsibility를 가집니다. 책임지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 서로 응대하는 것은 서로 통하기 위해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commune입니다. 사람은 절대자와 서로 commune 하자는, 또 그러기 위해 사람 사람끼리 commune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하나 된 덩어리가 community 곧 교단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코뮤니즘이라는 말도 사실은 여기서 나왔다는 것을 알면 재미있습니다.
나에 맞서는 너가 절대기 때문에 사람이 그와 대화를 하려면 절대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절대의 자리에 설 때 모든 차별은 없어집니다. 그 때에 보통 때에 하는 삶은 삶이 아니요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내가 위에서 채 죽지 못했다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종교인은 죽었다」는 거짓말입니다. 정말 죽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정말 죽었으면 하나님 죽었다. 종교인 죽었다 하는 소리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옛날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를 배우려 스님한테 갔더니, 그 스님 말이 외손벽의 소리를 들어봐라 그랬더랍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고 생각해도 알 수 없어 스님 보고 절망하는 소리를 했더니, 스님은 말하기를 네가 먹는데, 입는데, 사는데 애착이 많아서 그렇다. 차라리 네가 죽으면 깨달을 거다 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만났을 때 스님은 이놈아 외손벽의 우는 소리를 들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는 곧 스님 앞에서 죽는 시늉을 했습니다. 스님은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오, 정말 죽기는 죽는구나, 허나, 너 그 소리는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했습니다. 죽던 제자는 못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 스님은「이놈아 아직 아니 죽었구나, 죽은 놈이 어디서 대답을 하더냐? 나가거라」하고 내쫓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 종교인은 죽었다 하는 종교인들 쫓겨나지 않을까요?
물론 죽었다는 말은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치는 데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절대의 음성은 못듣습니다. 절대에 직면한다니 곧 죽는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하 나님의 얼굴 보면 죽는다 믿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는 소리는 죽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요, 죽은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고자 하는자는 잃고 잃는 자는 얻는다는 말은 역시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는 길
「종교인은 축었다」하는 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요점은 삶, 죽음을 뛰어 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느니 종교인 죽었느니 하는 말은 역시 생에 유(有)에 위(爲)에 달라붙는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절대자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지간히 받친 마음의 태도로 들었고 또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지혜가 조금 발달되자 약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 이후 차차 자세하게 보여 마음을 뺏은 것은 상대차별의 세계로 절대는 점점 잊게 됐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생에다가 거머리처럼 이빨을 꼭 박아 넣고 빨아먹게 됐습니다. 그래서 살았다야 좋고 달다야 좋고 많고, 늘이라야 좋고 어서 어서라야 좋습니다. 그 결과 그 반동으로 온 것이 하나님은 죽었다입니다. 자기네에게 맛있는 생을 주는 복을 주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알게 되니 죽었다 한 것입니다. 생(生)을 생(生)으로 아니 아는 사람에게 사(死)가 사(死)일리가 없고 사(死)가 사(死)가 못된다면 하나님 죽었다 할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일 죽지 않아서 지금도 눈물로 간구하면 비도 주고 떡도 주고 원수도 죽여 준다면 그 하나님 믿는 종교인 죽었다고 할리가 없습니다.
「종교인은 죽었다」누구의 입에서 나왔던 간 하늘 말씀입니다. 역사의 판결문입니다. 본래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지은거요, 되어진 일은 다 역사의 발전이요 나온 말은 다 절대의 말입니다.
살려거든 거기 대한 해석을 바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받는 태도가 옳아야 한단 말입니다. 재(才), 부재(不才)에 있지 않습니다. 덕(德) 부덕(不德)에도 있지 않습니다. 절대에 대면하면 그 차별이 없이 다 무력합니다. 남는 것은 오직 절대에 직면하는 그 담대람 담 대, 겸손이람 겸손에 있습니다. 믿음은 본시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이전은 또 몰라도 적어도 이제 부터는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니요 전체입니다. 네 믿음도 내 믿음도 아닌, 그저 믿음이라면 나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겸손히 절대 앞에 설 때 정말 죽을 때 생(生) 사(死)는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서 더한 용기가 어디 있습니까?
눈을 뜨면 거기 절대의 너가 서 있습니다. 살았다 할 수도 죽었다 할 수도 없는, 그러면서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유도 아닌 무도 아닌 그러면서도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하는 것도 없고 아니하는 것도 없는, 그러면서도 일으키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이가 있습니다. 나에 대해 절대지만 또 나 말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너와 내가 대화를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절대의 전류가 흐르는 한 대화의 불꽃은 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는 한 무슨 죽었다 살았다가 있겠습니까?
종교인 죽었다.
그래 나는 죽었다 하리만큼 거짓 살았다.
벌써 죽었더람 죽지 않았지.
종교게 1966년 7,8월호
저작집30; 16-253
전집20; 3-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