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님은 내 영혼 안에도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루카2,1~14)
아기 예수님의 성탄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리고 기쁜 밤입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의 대림의 피정기간 동안 성탄을 깨어 기도하며 준비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봅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철저히 승복한 한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사랑하는 아내가 해산할 방 하나도 잡지 못해 아들을 구유에 눕힌 무능한 아버지를 보며,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순박했던 목동들과 구유에 누워 있는 하느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목동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았던 식민지의 땅 갈릴래아,
그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고을 베들레헴,
사람이 쉬지도 못할 마굿간, 짐승의 밥그릇에 놓인 아주 작은 아기의 탄생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중에 예수님보다 더 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먹잇통에 눕혀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왕중의 왕이신 주님께서 어찌하여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강생(降生)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생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고
또 그분이 우리를 접하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시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되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분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여물통 안에 누워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하느님답게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먹이통에 누인 아기에게는 누구나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어떠한 구분이나 차별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뱅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얼굴색이 노랗거나 까맣거나 하얗거나,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이러한 모습으로 보내주신 것은,
당신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모든 이의 모든 님(것)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하느님의 구원경륜(救援經綸) 안에서
세 번 이루어진다고 설파(說破)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천지 창조 이전 성부에 의한 영원으로부터의 탄생,
두 번째는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탄생은 내 영혼 안에서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천 번 만 번 이 세상에 오신다 해도
내 마음 안에 성탄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세 번째 탄생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해법을 오늘 제2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속된 욕망을 버리고 의로움을 추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틈이 있습니까?
우리들 내면은 너무나 많은 속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위해 들어오시려고 해도
욕망들로 가득 차 있으면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탄을 맞이하여 부족하고 유한한 우리 인간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감사의 선물은 우리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밤을 아기 예수님과 함께 기쁨 속에서 지내도록 합시다.
부족하고 유한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기쁜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온갖 욕망에서 벗어나 의로움을 추구하며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로 이끄시기 위해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