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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사원에서 환경운동가, 다시 지역운동가로
평범한 대기업 사원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환경운동가로 변신했다. 시민운동 불모지에서 지역 환경운동과 시민운동 버팀목으로 16년. 그는 또 한번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가 생활을 정리하고 지역공동체 복원을 꿈꾸며 농촌으로 들어갔다. 대구 환경운동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문창식(46·사진)씨다.
◆페놀사건 계기로 시민운동 = 문창식 대표가 시민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사건이다. 당시 그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며 아동복지시설 등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대구 남구에 있는 한 보육원에 갔는데 아이들이 페놀로 오염된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고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시민들은 팔공산 등에서 생수를 떠오느라 약수터마다 교통체증이 생길 정도였거든요. 환경오염 피해도 결국 소외된 경제적 약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구조적 모순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문 대표는 “환경운동이 복지운동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전신인 ‘공해추방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91년 9월 직장을 그만뒀다. 시민단체에서 사람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복지쪽에 대한 꿈을 뒤로 미루기로 한 것이다. 1993년에는 공추협 상근 사무국장을 맡아 시민공동대책위를 꾸려갔다. 3000여건에 달하는 피해사례를 접수, 피해가 구체적일 경우에는 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의뢰했다. 조정결과에 불복한 피해사례에 대해서는 법적 소송을 도왔다. 8년여에 걸친 싸움 끝에 법원의 조정을 이끌어냈다. 해당기업에서 ‘도의적 책임’에 따라 내놓은 보상금으로 대구시에 고도정수처리시설을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거창한 구호보다 평범한 가치 = 2002년은 또다른 변화의 계기였다. 그해 6월 발생한 ‘효순이 미순이 사건’의 시민단체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대구 중심가인 동성로에서 1개월 이상 집회를 열 때였다. 노동조합 불교계 등을 찾아다니며 무고하고 고귀한 생명과 평화에 대해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반미 등 이념적 접근은 자제했다. 1000여명이나 모일까 염려했는데 경찰 집계로 1만5000여명이 몰렸다. 깃발 대신 촛불을 든 시민들 가두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선동적인 구호나 거창한 슬로건보다 생명과 평화라는 평범한 가치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열악한 시민단체 동력을 모아 대응은 했지만 궁극적인 사회변화에는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던 차였다. 문 대표는 “생명과 평화, 풀뿌리 주민운동을 실행에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선배 활동가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 않고 안주해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 상근활동가 생활도 정리하기로 했다. 2003년 필리핀 NGO연수프로그램에 1년간 참가하면서 구체적 가능성을 타진했다. 활동가가 가족과 함께 시골로 들어가 지역사회 문제에 대한 기초조사부터 주민활동가 발굴, 지역주민공동체 조직까지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연수였다. 연수 후 대구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새로운 영역 개척해야 = 2007년 3월 간디문화센터라는 비영리 민간단체를 만들어 경북 군위군 소보면으로 들어가 옛 서경초등학교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진보진영이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하면서 시민단체의 어려움이 예상됐지만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고 인적·물적 토대도 없고 장기적 전망도 보이지 않는 일이예요. 고생하는 시민단체 후배들은 회피나 도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도 행복하면서 우리사회의 올바른 변화에도 기여하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청춘을 바쳐 시민단체에서 활동했지만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던가보다. 대구시내에서 군위군 소보면으로 무대를 옮긴 그의 표정은 밝았다. 봄이면 숙직실 생활을 정리한다고 들떠있다. 마을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기 위해 동네의 빈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문 대표는 “개개인의 변화를 통해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지역운동은 거시적 변화를 위한 시민사회운동만큼이나 필요한 시대적 요구”라고 말했다. 군위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간디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간디문화센터가 그리는 세상은 생명과 평화가 존중되는 사회다. 자연과 인간, 다양한 문화와 민족, 현 세대와 미래 세대,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다. 2007년 문창식 대표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힘을 모아 창립했다. 센터는 농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문화제 도농직거래사업 문화학교 다문화축제 공동육아 체험학습 등을 추진하고 있다. 청소년 대안교육과 아시아평화연대사업도 관심있게 실천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치유학교, 어린이계절학교, 소외계층인권캠프도 연중 실시하고 있다. 문화센터가 들어오면서 서경리 주민들도 신이 났다. 아이들 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된 마을에 아이들과 젊은이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센터는 군위군에서 처음으로 노동부 인증 사회적 일자리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올해는 농어촌유학학교와 장기적으로 평화와 생명을 교육하는 대안학교도 열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