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열 두 고개 / 정선례
논과 밭의 가을걷이가 얼추 마무리 되었다. 김장 밭 잡풀도 깔끔하게 해놓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렀다. 읍내 나갔을 때 바쁜 일이 없으면 들르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목욕탕과 도서관이다. 그것은 내가 가장 행복을 느끼는 사치이기도 하다. 평소에 자연의 혜택은 넘쳐나는데 관람, 공연, 콘서트의 문화는 접하기 어려워 갈증이 내 안에 쌓이곤 한다.
군립도서관은 내면의 갈증을 채워주는 고향 같은 존재이고 종합열람실의 널따란 책상에 앉아 책 읽는 시간이 있어 살만한 농촌 생활이다. 농촌에서는 일하느라 바빠 열람실은 늘 한가하다. 들어서자마자 신간 코너를 찬찬히 살펴보고 문학 장르가 꽂혀 있는 코너로 발길을 돌려 작가와 책 제목을 읽는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즐겨 읽었던 유안진, 문정희, 김남조, 공지영, 안도현, 등 눈에 익은 작가의 책이 정답게 보인다. 책의 숲에 놀러 와 걷는 자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거나 억새가 하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흔들거리는 모습에 지난날 나는 까닭 없이 공허해져서 덩달아 마음이 흔들거렸다. 혼란한 시기를 지나오면서 책 읽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약하기만 한 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서 균형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시절 유일한 즐거움은 책 읽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말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차곡차곡 쌓여 가는 어느 날 그 말들은 내 안에서 여물어 잘 익었는지 빠져나오고 싶어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새벽안개 자욱한 도로처럼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얹고 몇 시간째 첫 문장도 쓰지 못하고 앉아있었던 날이 몇 날이던가. 글쓰기에 관한 유시민, 강원국, 이슬아 유튜브는 다 찾아 들었지만 짙게 깔린 안개는 좀체 걷히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을 써야 한다. 문장을 짧게 써라, 글이 주제 안에서 놀게 해야 한다. 한가지 소재를 깊이 있게 써야 한다.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론으로는 충분히 알겠는데 글로 녹여내지 못한다는 게 내 고민이다.
내가 정한 문학의 열두 고개를 넘어서야 어떤 주제를 줘도 술술 써 내려 갈 텐데 이제 겨우 두 고개를 넘은 것 같다. 첫 번째 고개는 책을 좋아해서 쉽게 넘었다. 띄어쓰기, 맞춤법, 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쓰기인데 이 또한 크게 틀리지 않으니 두 번째 고개도 넘었다. 세 번째 고개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글쓰기인데 암봉이 우뚝 솟아 오르기가 버거워 주춤하고 있다. 물을 마시고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리라. 좋아하는 작가의 훌륭한 글을 시간 되는대로 필사 하다 보면 글쓰기가 습관이 붙어 고개를 훌쩍 넘어서는 순간을 맞이하겠지.
삼십 년 전 서툴고 실수투성이였던 초보 농군이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농사 박사가 되었다. 글쓰기 또한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또 한 고개를 넘어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성실과 꾸준함은 무형의 자산으로 우리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차례 경험했다. 문학은 내 생애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이고 글쓰기는 여전히 녹록지 않은 작업이지만 기도만큼 나를 성찰하는 데 좋은 행위인 것 같다.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부터 곱게 물들어 내려오는 가을이다. 내 안에도 문학이라는 나무에 글쓰기라는 울긋불긋 고운 단풍이 붉게 스며들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열두 고개를 다 넘어 예전에 힘들었던 시기에 즐겨 읽고 용기를 얻었던 작가들의 글처럼. 내가 쓰는 글도 누군가의 마음 밭에 희망의 싹이 돋아 마음을 치유해주기를 희망한다. 어느 날 문학의 암봉을 다 넘고 승리의 깃발을 꽂아 성공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나의 정체성이기에.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문학에도 열두 고개가 있었네요. 언제나 모두 오를 수 있을까요. 앞서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 할 텐데 선생님처럼 30년 후면 박사가 될 수 있을까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꾸준함은 큰 성과는 내지 않더라도 조금씩 나아지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리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게요.
끝이 없는 농사로도 정신 없이 바쁠텐데 몇 년째 글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하신지 모르겠어요. 농부와 책, 그리고 글쓰기 멋진 삶입니다.
교수님, 문우님들과 동행하니 가능한 것 같습니다.
바쁜 중에도 글쓰기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신 것을 보니 세번째 고개도 금방 넘을 것 같습니다.
'작가란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다' 라는 말에 용기 얻습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바쁜 농사일 틈틈이 책읽기와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박수 받아 충분합니다.
고개 다 넘으면 전문작가 되게요?
그냥 즐기시면 어떨까요?
지금도 충분히 잘 쓰셔요.
책읽기는 제 삶의 공기와 물, 햇볕입니다. 저도 아무 생각없이 독서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 살고 싶은데
이 나이 되도록 뭐 하나 이뤄놓은 게 없어 공허하기만 해서 글쓰기에서만이라도 성과를 내고 싶어요.
하루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글 잘 쓰고 싶은 마음 비누 거품처럼 몽글몽글 피어나서 없는
상상력 끄집어 내느라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책 읽는 시간이 줄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책읽고 글쓰기를 벗삼아 사시니 멋진 인생입니다. 선생님 고운 마음 담긴 글 제 마음에 안아봅니다. 푸근해지는군요. 저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아유, 저처럼 살면 안되어요.
선생님 곁에 언제나 책이 가까이 있고 더불어 문학의 향기 나는 글 술술 잘 쓰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