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커튼이 쳐진 빨래판
장옥관
다 늙은 빨래판이 측은해 서재로 가져온 게 어저께의 일이다
이 빨래판을 어떻게 요리할까 책상 위 자판으로 올려놓고 레시피를 찾는다 주름투성이 속을 긁어내 호박범벅을 만들까 뼈다귀를 토막내 곰탕으로 고아볼까 얇게 채 썰어 생채로 무쳐 먹기엔 너무 딱딱하겠지 어쩔까 어쩔까 고민이 깊어진다
아내가 탐내 자기 방으로 가져가면 어쩌나 아내의 방은 내 방과 층이 져 발 디밀 수 없는데 아내는 이미 안개의 주민이 된 듯하고 아득한 전생에 우리 빨래판에 함께 누워 본 적 있었을까 보송보송한 그 이불에선 샤프렌 향기가 났을 테지
이 익숙한 주름살 앞에서 얼마 전 딸이 엄마, 하고 부른 적 있는데 그때 빨래판에서 하얗게 머리 센 장모님이 오냐, 대꾸하며 걸어 나오셨지 땟국물 속에서 삭은 한평생은 열아홉 평 신접살림에서부터 지금까지 따라온 것
치대고 문지른 달력 앞에서 웃음도 울음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 대략 난감에 요리 옷 입힐 궁리를 하였던 것인데 갑자기 발뒤꿈치 각질 부스스한 빨래판이 내게 여보, 하며 희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다
_현대시학 2023년 5-6월호 발표
_장옥관 시인
1987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달진문학상, 일연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용악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