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은 생산력 증대, 전쟁, 기후, 로봇과 같은 낱말들이 야기하는 변화하는 현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 변화를 확연히 느낄만큼 불확실한 변화가 확실해지고 있다는 것이겠다. 생산력 증대의 한계, 전쟁 위협과 기후 재난의 일상화, 로봇에 밀려나는 인간과 같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했던 말들이 점점 더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가올 삶에 대한 불확실성이 불안과 위기의 확실성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세상사에 확실한 것은 없다거나 그래도 이미 그런 불확실성을 예측해오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불확실성이 인류발전의 하나의 과정으로써 불가피하게 마주해야 할 시간이라고 한다면, 인류의 전환을 맞이할 때가 온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하겠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해소되는 사회로의 전환이 민주적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면, 민주적인 정부와 민주적인 정치인들의 의지만으로도 더 민주적으로 전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생산력 증대를 통한 무한 이윤 증식에 의해 굴러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일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하기 위해서 인간을 로봇으로 대체한다거나 자원 쟁탈을 위한 전쟁을 일삼는다거나 하는 일들이 일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을 위해서도 민주적인 정부와 정치인들의 의지가 필요하겠지만 자본주의 체제 전환이 그들의 의지만으로는 힘들어 보이지만 그럴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럴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성도 중할 것이다. 자본권력과 자신들만 살아남기 위한 방향으로의 전환은 결국 경제 양극화와 일상적인 전쟁 재난으로 인해 체제 붕괴 및 인류 파멸로 나아갈 가능성이 커보이는 것이다.
생산을 위한 수단을 자본가계급이 독점하고 있는 체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체제, 생존을 위해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사업자 노동자, 이주노동자 착취로 굴러가는 체제, 이제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 로봇에게 생존마저 위협받는 역사적 조건들을 형성하고 있는 체제.
전쟁 재난, 기후 재난, 실업 재난, 마침내 생존 재난이 일상이 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전환을 위해서 자본권력 아래의 정부와 정치인들의 의지보다 노동자민중의 의지가 더 중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크고 작은 조직들이 정당들이 조직되어 단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민중이 조직적으로 단결하는 것만이 체제 전환을 이룰 가능성을 키워 줄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규제적 이념과 생산수단
100년, 150년을 살아남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정답일 수도 있다. 삶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는 의미에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목적, 의미, 가치’와 같은 ‘이념’을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이든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일 테다.
만물이 그러하겠지만 인간에게 인간 개개인은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그러니 인간을 수단화하거나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칸트, 아도르노)
그처럼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며 칸트식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절대적인 정답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칸트 자신의 요청도 칸트 자신의 말대로 ‘규제적 이념으로 요청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럴 경우, ‘규제적 이념에 대한 요청’은 그 ‘이념’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 이들에 의해 수용되거나 존속할 것이다. 그 ‘이념’은 개개인이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로 존중받게 하는 것일 테다. 그럴 때 개개인의 공감이나 동의에 이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 ‘이념’이 ‘자본 권력’의 논리에 따라 강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회의 지배권력의 이념이 지배적인 이념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맑스) 하지만, 한낱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존중받고 싶은 개개인들에 의해 그 ‘이념’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칸트의 ‘요청’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면서 규제적인 힘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이념적 규제, 타인에 대한 요청과 공감과 동의에 의해 삶의 정답들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삶에서 인간 개개인이 ‘지배권력’과 맺는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나 맑스의 ‘소외된 노동’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인간에 의한 인간(자연)의 억압을 넘어서는 관계를 만드는 것일 테다. 누가 주인이, 지배권력이 되느냐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배와 억압이 없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억압적인 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평등한 삶’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억압당하기를 욕망하지 않는 인간들의 요청에 의해 가능할 ‘규제적 이념’일 뿐일 테다. ‘자본 권력’이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민주적인 삶’은 ‘생산수단’의 소유 방식을 민주화할 때 가능할 뿐일 테다.
ㅣ노동과 자유 그리고 책임
아우슈비츠(Auschwiz) 제1수용소 입구에 걸려 있었다는 간판에 새겨진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에서 눈에 들어 온 것은 알파벳 ‘B’가 거꾸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간판을 만든 노동자들의 저항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노동이 노동하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여느 동물과 달리 계획하고 실행하고 반추하는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 우리가 먹을 쌀도, 입을 옷도, 살아갈 집도, 동물적인 반복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실천적 노동 안에는 맛과 멋이 있고 과학과 기술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노동은 예술적이기도 하고 과학적이기도 하며 달나라 여행을 꿈꾸게 하다 실제 달나라 여행을 가도록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면화 한 사회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화폐를 구매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이 생존을 위한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는 점에서 생존의 위협이라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고사하고 투잡·쓰리잡에 지역·성별·학력 차별에 직장 내 갑질과 괴롭힘에 시달려도 내 집 하나 마련하기 힘든 노동자들에게, 지구 곳곳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팔려다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그들에게 ‘노동이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언설은 새빨간 거짓으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언설이 거짓이라면, 그러한 거짓 현실을 견디며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현실은 진실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유를 약탈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지구상의 대부분의 자본독재국가에서는 자본권력에 의해 노동자들의 임금, 노동 시간, 고용과 해고, 목숨까지도 합법적으로 유연하고도 자유롭게 결정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는 노동에 의해 자유롭지 못했다.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장의 목적어는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관리하며 억압하고 착취하다 살해했던 나치(Nazis)였다.
ㅣ답습하지 않는
‘답습踏襲’이라는 말은 ‘전부터 해 내려오거나 있던 방식이나 수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것'을 말한다.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라는 의미로 답습이라는 말을 기억해 둘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歷史’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역사가 된 history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 historiai에는 ‘탐구探究’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사해서 배우거나 아는 것’, ‘진리나 학문 따위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것’이 탐구의 의미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지만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사’하거나 ‘연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역사 기술記述이 ‘조사’나 ‘연구’ 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제멋대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조사’나 ‘연구’ 일 것이기 때문이리라.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네 글자로 말해야 한다면 ‘권력투쟁’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흥망성쇠興亡盛衰’라고 말하고 싶다.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배반과 복수와 전쟁을 끝없이 반복하는 역사를 돌아보며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것이 ‘흥망성쇠’다.
‘흥망성쇠’의 과정에서 ‘권력투쟁’은 필연이었다. 역사에서 ‘권력투쟁’이 필연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탐구한 결과 역사가 권력투쟁에 따른 흥망성쇠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지금 ‘쇠’를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현 단계는 자본독점 권력이 성 할 대로 성해 이제 쇠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자본권력이 쇠한다면 그것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여야 한다.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역사적 탐구에 따르면 역사의 과정은 그러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을 봤을 때 자본권력과 권력투쟁을 벌여 승리할 세력은 노동계급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권력을 위한 전쟁의 역사가 멈추는 날을 헤로도토스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인 역사를. 결과를 말해주는 과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권력투쟁의 역사이지만,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로도 보인다.
억압적인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역사, 자연과 인류 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미지未知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인류는 권력투쟁의 전쟁이 멈춘 해방된 공존의 상태를 기획하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권력투쟁이 필연이라면 미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은 필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밖에서 벌어질 소행성과의 충돌이라는 미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후재앙과 독점 자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풍요롭고 평등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풍요롭고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은 중요해 보인다. 과정이 곧 결과라서, 과거가 담긴 지금이 곧 다가올 미래라서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하는 것일 테다.
'풍요롭고 평등한 삶'은 아주 새로운 가치가 아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존재했고 존재하는 미래이다. 하지만 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미래로 답습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우禹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잘못했거나, 어쨌거나 소중한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길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탐구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방향에 미약하나마 영향을 미치기 위한 기본자세로서 말이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