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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강 12장 믿음의 단련과 인내 ~ 11장 믿음장 12장 소망의 능력
26.07.09(목)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3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오늘은 저희가 히브리서의 제11강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히브리서 제12장이고요. 주제는 믿음의 단련과 인내를 다루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본문을 살피면서 주목할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하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완전한 모범이신 예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목적을정리하겠고요. 끝으로 시온산에 들어가는 특권이 무엇인가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장은 11장과 형식에 있어서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긴밀하게 인상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할 수 있습니다.
12장은 세 단락으로 나눠지는데요.
먼저 1절부터 3절까지는 믿음의 완전한 모범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4절부터 13절은 단련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고요. 14절부터 29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의 위험이라는 주제하에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특권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완전한 모범이신 예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은 11장의 믿음의 모범들에 대한 칭송의 정점을 이룬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인내에 주제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 단락은 달리기 경주 비유를 통해서 믿음과 인내에 관한 권면을 효과적으로 연결해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요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구름같이 많은 증인을 가지고 있다 라고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경주자들은 11장에서 소개된 구약시대의 믿음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그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 경기장에 서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구약시대의 믿음의 영웅들은 자신의 경주를 다 마친 후에 관람석을 가득 메우고 우리가 그 경주를 잘 마치도록 응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자는 그들을 우리를 둘러싼 구름과 같이 많은 증인들이라고 묘사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믿음의 모범들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증언하기 위해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모든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려라 라고 권면합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주 육상 경기에 비유를 합니다.
대표적으로 고린도 전서 9장 24절부터 27절등이 그러합니다. 육상 경기에서는 달리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장애들을 모든 짐 곧 억메는 죄라고 기술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장애를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달리기 선수가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채 달리는 모습이란 상상하기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내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경주를 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준비한 경주자는 인내로 경주를 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경쟁적인 속도가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꾸준히 달리는 인내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경주는 순간적인 속도가 중요한 단거리 경주라기보다는 인내가 중요한 마라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앞에서 수신자들의 과거의 인내를 칭찬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고난의 큰 싸움을 인내해왔던 그러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여전히 변함없는 인내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한 번 인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함으로 그 경주를 마쳐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 2절을 보면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라고 합니다.
믿음의 주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라고 했는데요. 원문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번역하자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 님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믿음의 기반이 됩니다.
이처럼 믿음의 기반을 제공하시는 예수님은 모든 믿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자들은 달리는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구약시대 모범들이 멀리서부터 믿음으로 바라봤던 궁극적 목표 곧 구원을 이루시고 제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어서 그분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위하여 수치를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라고 얘기합니다.
이 믿음의 완성은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을 끝까지 참아내신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내 궁극적 목표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이처럼 영원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결정적으로 확정해주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죠.
우리는 여기에서 11장 1절에서 저자가 선언했던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의 행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확증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라는 말에 최종적인 모범을 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믿음의 궁극적 모범 완전한 모범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두 번째로 단련의 목적을 4절부터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에서 저자는 제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고난의 문제를 다룹니다.
제자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부성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자녀에 대한 단련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는 데 있어서 아직 피를 흘리기 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기술합니다. 앞 단락 1절부터 3절은 달리기 비유를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4절은 권투나 레슬링과 같은 격투기를 비유로 사용합니다. 수신자들이 싸우는 대적은 죄라고 합니다.
여기서 죄는 그들을 공격하는 죄인 적대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3절에서도 그러한 연결을 볼 수 있었고요.
그런데 수신자들은 그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저자는 선언합니다. 아마도 수신자들은 다양한 고난을 경험하였지만 아직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5절 6절을 보면요 그런데 아들들에게 주어지듯이 너희에게 주어진 권면을 너희가 잊었도다 라고 합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이 잠언 3장 11절부터 12절의 권면을 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했습니다. 징계하심을 이라고 했는데요.
이 번역은 좀 지나치게 부정적이다 라고 생각이 됩니다. 징계보다는 파이데이아라는 단어는 단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고요.
하나님의 단련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가지의 그릇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첫째 단련을 가볍게 여기는 반응입니다.
아버지가 단련하시는데 그것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그 반대로 단련 때문에 낙심하는 반응입니다.
자 그런데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단련하시고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시기 때문이다. 왜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해서는 안 되는가의 이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단련을 사랑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은 아들을 엄격하게 단련하고 잘못에 대해 회초리를 아끼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이 됩니다.
따라서 그분의 채찍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단련과 채찍에 직면할 때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낙심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 7절과 8절의 본문을 우리가 한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단련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단련은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7절에서 아버지가 단련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는가 라고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단련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입니다.
따라서 수신자들을 아들들과 같이 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단련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신자들이 지금 받는 단련은 근심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아들 신분을 확증해 주는 환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사생자들이지 아들들이 아니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단련받기를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련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단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당장은 좋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사생자는 아들처럼 기업을 받지 못하는 그러한 안타까운 결과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요 단련의 중요성과 유익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저자도 그 단련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단련이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보인다 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통찰력은 그 괴로운 단련의 진정한 유익 곧 그 궁극적인 결과를 내다보도록 해줍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연약해진 손과 힘이 빠진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라고 말합니다. 수신자들은 믿음의 오랜 경주로 말미암아서 거의 탈진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은 거리를 완주하기 위해서 연약해진 손과 힘이 빠진 무릎을 굳세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11~2강
이제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에 위험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 단락에서 저자는 앞 단락의 결론에서 언급된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와 연관된 그러한 권면을 두고 있습니다.
이 단락은 밀접하게 연결된 3개의 소 단락으로 구분이 되는데요.
먼저 14절부터 17절은 추구할 것과 조심할 것을 연결해서 교훈합니다.
그리고 18절부터 24절은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부터 29절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의 위험 마지막 다섯 번째 경고 단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먼저 추구할 것과 조심할 것이 14절부터 17절에서 다루어지고요.
이어서 18절부터 24절에서는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하면서 수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8절부터 22절에서는 시내산 언약 체결의 상황과 그들이 그곳에서 겪었던 경험을 묘사해 줍니다. 구약의 출애굽기 19장 16절부터 19절이 바로 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열된 시내산 경험은 두려움과 격리로 특징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22절부터 24절은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당히 긴 문장인데요. 시내산과 대조되는 시온산의 광경을 기술해주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시작하는 너희가 나아갔다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요. 이 나아갔다는 직설법 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시온산에 나아간 경험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시온산은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경험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수신자들이 나아간 곳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그 경험이죠. 이 나아간 곳은 둘씩 짝을 이루는 여덟 개의 조항들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보면 첫 번째 쌍은 장소와 관련된 것인데요.
시온산은 앞선 단락에서 시내산이라는 표현 자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암시되고 있는데요. 그 암시된 시내산에 대응하는 장소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시편 84편 7절에 보면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데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 그게 시온입니다. 그런가 하면 멜기세덱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 다스리실 곳으로도 소개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그의 권능의 주를 내보내시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온은 다스리는 장소고요.
그러면 그 다스리는 이가 누구냐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 이 제사장이 시온에서 다스릴 것을 내다보고 있는 그러한 곳이 시온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기대가 성취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시온산에 이르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온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묘사가 됩니다. 이제 수신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몸소 거하시는 도시 곧 천상의 예루살렘에 나아가 놀라운 특권을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두 번째 쌍은요 천상의 예루살렘이 있는 자들로 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언급입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번역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합니다. 저자는 그들을 장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자는 상속과 축복의 특별한 권리를 소유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앞서서 1장 6절에 보면 또 그가 맏 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을 장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장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라고 2장 11절에 기술해 줍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장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장자이시고 우리는 차자가 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장자이신데 우리도 그 장자의 특권을 형제로 누리게 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자 세 번째로 셋째 쌍은 우리 모두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을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에 힘입어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은 천상의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영들에는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서 구약시대의 믿음으로 죽었던 영들 죽은 자들 그들의 영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끝으로 넷째쌍은 세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뿌려진 피를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새 언약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뿌리신 분이십니다.
9장 15절을 보면요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엿 언약의 중보자와 피 흘려 죽으시는 그 죽음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뿌려진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훌륭하게 훨씬 더 훌륭하게 말하는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벨의 피는 보복을 호소하였습니다.
4장 10절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예 보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앞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9장 15절에서 보았듯이 구속의 은혜를 증언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훌륭한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시온산의 광경묘사는 종결됩니다.
이처럼 수신자들이 시온산에 나아간다라고 하는 사실은 구약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은혜의 특권이다 라고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자 이제 끝으로 25절부터 29절을 저희들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락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경고 단락입니다.
이 경고 단락은 앞 단락 18절부터 24절의 따뜻한 격려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권면을 할 때 격려와 경고 아니면 경고와 격려를 균형 있게 항상 연결시켜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하는데요.
2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일을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먼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수신자들은 땅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보다 그 책임이 훨씬 더 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6절 27절에서 저자는 시내산의 흔들림을 학게서 2장 6절이 약속된 하늘까지 흔드심과 대조를 시킵니다.
학게가 약속한 하나님의 흔드심의 목적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세계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연약하고 변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것만 남아 있으려면 그것은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고 있으니 감사드리자
수신자들이 지금 받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시온산에 나아가는 신자들에게 이미 시행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온산에 나가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는 마땅히 기대되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사의 방은 자연스럽게 예배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당연하죠.
그런데 시온산에 나아가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기 위해서는 신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외함과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이 권면 단락이 29절에서는 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옛 언약에서 강조되었던 하나님의 엄중한 성품은 새 언약에도 결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선언과 더불어서 저자의 경고는 훨씬 더 엄중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다루었던 본문 이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경주에서 나의 장애는 무엇이 있는가 믿음의 경주 할 때는 장애를 벗어버려라 라고 했는데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벗어야 할 장애가 무엇인가
두 번째로 하나님의 연단을 불평하지 말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자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속에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을 겪을 수 있는데, 그 어려움 자체를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단련이구나 라고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겠고요.
끝으로 하늘 예루살렘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특권인가를 깊이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시온산 그 시온산에서 천만 천사와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그러한 우리의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려진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특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특권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 오늘 이렇게 해서 12장 본문을 살피며 모든 주제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히브리서 본문 강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13장을 살펴보겠고요. 오늘 저의 강의를 들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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