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롬 !!
우리는 한 치 앞도 못보고 예측할 숭도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국가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나를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체 다만 국가의 운명과 같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잘 되겠지, 잘될 것야 , 그래야 해 하는 아주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고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주체에게 미뤄버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항상 편치않아 어딘가에 의지하려고 듭니다.
지금 교회는 대림절 3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첫 째 주간엔 ‘음식’을 둘 째 주간엔 ‘노래’를 이번에는 ‘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구원의 글이 바로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직접 쓰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고백도 하는데 편지를 사용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입니다.
본문말씀 ; 다니엘서5:22-28<새번역>
“느부갓네살의 아드님이신 벨사살 임금님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시고, 하늘의 임금님이시오 주님이신 분을 거역하시고, 스스로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셔서, 임금님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은 보거나 듣거나 알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하시면서도, 임금님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글자는 바로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입니다.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린다.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은,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두고서 경솔하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이 명령을 어겼다가는 그 몸이 조각날 것이며, 집이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믿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은 다시없을 것이다.“
글 (A piece of Writing)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는 아직까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가 항상 강해서 행복하길 바라지만 대다수 사람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도 모른 체 국가의 운명과 함께 합니다. 오죽하면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나라의 운명이 곧 자기 운명과 직결한다는 것을 알기에, 신적 존재에게 나라의 운명에 대해 빕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글로 남겨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한 세대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후대에도 이어지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팔만대장경을 통해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에 감탄하고 자신을 돌아보아 그 정신을 이어갑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주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우사 완전한 평화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는 각자의 나라들이 한 주님의 나라가 될 것을 믿으며 현재 자기가 사는 국가가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치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백성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시시때때로 아버지 하나님께 이와 관련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때로 교회는 예수님이 직접 적으신 글이 남아 있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현재 교회가 가진 모든 글이 예수님이 직접 기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서 8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성과 그녀를 돌로 쳐 죽여야 하지 않냐고 성내며 묻는 군중 앞에서 예수님이 길바닥에 적으신 글이 오늘까지 전해졌으면 합니다. 오죽하면 성경 필사가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기록하신 글이 ‘그를 각자의 죄목’이라고 원본엔 없어 보이는 내용을 첨가했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적으신 글이 분명 사람들의 안녕과 구속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성난 군중을 위한 기도문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타당한 추측입니다. 그 글이 무슨 내용인지를 오늘날까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을 통하여 성난 군중과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은 목숨을 보전 받았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여성에게 돌을 던져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죄를 짓지 말아라.’
요한복음서 8장에 나온 모든 이들은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구속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여성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군중까지도 구원하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양심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심판받지 않았습니까. 야웨 하나님은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자기가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을지라도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회개했을 때 구원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지 못함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마음이 겸손하여 주님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 중요한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완전하게 임하시는 주님 나라를 고대하며 현재의 나라가 주님 보시기에 선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항상 그분의 일하심에 민감하며 겸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라는 잠언 3장 34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항상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열심히 일하시는 손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가 사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개인의 흥망성쇠와 직결한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야웨 하나님은 겸손히 자기의 보호를 믿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먼저 자기가 주님 백성답게 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성도가 사는 나라의 운명이 결단코 주님 백성의 평안한 삶을 뒤흔들지 못합니다.
주님 백성은 시편 95편저자가 노래하듯 주님이 크신 하나님으로서 온 세상이 다 그분 손으로 창조됐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시기에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노래해야 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이오. 신바벨로니아 제국의 쇠퇴와 페르시아 제국의 태동 속에서 그는 한나라의 운명이 꺼져가고 있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연회나 즐기던 벨사살 왕 앞에 나타났던 주님의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그는 연회 중에 갑자기 나타나 글을 쓰고 사라진 손이 온 민족의 운명을 이끄시는 주 하나님이시라고 전하며 벨사살 왕이 선대왕들처럼 주님 앞에 회개하지 않기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이 글을 해석했을 때까지도 주님은 벨사살 왕에게 올바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구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벨사살 왕은 연희 중에 갑자기 나타난 신적 존재의 손이 남긴 글씨에 혼란에 빠졌지만, 그가 다니엘이 해석하여 예언한 주님 말씀에 선대 왕 처럼 바로 반응해, 주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했다면 그는 다른 인생의 결말을 맞았을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그 말씀을 듣고도 그저 다니엘을 통치자로 삼기만 했고 결국 그는 그날 밤 살해당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전하시는 모든 기록되고 선포되는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 은혜의 손입니다. 또한 임마누엘 예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은혜의 손을 내미십니다.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그 은혜의 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