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작품/ 김현재 시인
사람의 방
작은 심장, 어서 와
미친 듯이 두서없는 이런 고백
강이 푸르다, 고 쓰면 강은 왜 푸른가
함께 죽자던 물고기를 강물에 던져버린 적이 있다 우는 모래를 모른 척 내버려둔 적이 있다 머리통을 뚫은 머리카락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번번이 내가 아니고 싶어
차가운 강물을 길어 맨발에 붓고 또 붓고 목에서 새 얼굴이 돋기를 기다린다
시체가 묻는다 혹시 저를 기다리는 분이 맞습니까?
목적어를 숨기는 어법 종일 행간에 숨어있다 말을 잃었다고 할까 주머니에 남은 몇 알의 낱말을 세다 최후의 혼잣말을 강 한가운데에 남겨둔다
시퍼런 물살이 길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잃고 싶지 않아 남는다 문장들은 떠돌며 흩어지며 어떻게든 서로를 잊지 않을 것이기에
봄밤
들키면 아침이라고 검침원이 말해 주었다 검침원은 서명을 요구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계속해서 밤이었다
물어온 것들을 문 앞에 쌓아두고 일을 했다 밤조차 행간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식전에는 개똥을 치우고 개밥을 주었다 개에게 산책을 시켜주겠다고 말을 걸었다 개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검침원이 왔다 최소의 예의를 갖추어 귀만 내보냈다 검침원이 나의 부재를 눈감아주었다
턱밑까지 밤을 끌어올리고 전등을 켜두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이 검침원을 기다렸다
『카프카 평전』을 읽기 시작했어요
저녁밥을 사양하고 커피를 내렸어요 군말 없이 밥 굶어주는 내가 좋았어요
『맘마미아 냉파요리』나 『반찬이 필요 없는 밥 요리』가 행복한 나에게 『카프카 평전』이라니
밥벌이에 지쳐 밥 끊은 사람의 몰골로 살아있는 시체가 되기로 하겠어요
책장은 술술 담장을 넘어 죽은 물고기를 튀기고 소시지를 굽는데 카프카선생이 좋아한다는 그 맛을 찾을 수가 없어요
더듬더듬 카프카의 어느 저녁이 기억나면 나에게서 멀어진 내가 꽤 자유로워요
쓸 수 없는 것들은 쓸모없어 소문도 없이 사라져요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자루에 묶어 웍에 남은 물고기의 뼈처럼 첫사랑을 배반하러 떠나겠어요
아무 일 없어 들꽃이 피고 해가 지는 또 한 번의 저녁
진심을 말하고 싶을 때 부엌이 없는 방으로 돌아가 책을 읽겠어요
생태도에 그릴 삽화들
하늘에 뚜렷한 경계를 구름이라 부를까 오늘은 학습하기 좋은 날 조카들에게 구름을 가르칠 수 있겠어
세계의 모든 그림을 경계가 만들어 대들보와 지붕의 숭고한 결연이 그래 금 긋기 놀이에 진심을 담아봐
노을을 보려고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가 되었지 아버지가 종일 한강을 건너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빈집에서 투르게네프를 읽어 첫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청양고추를 다지던 손으로 눈을 비벼 영리한 눈물이 집구석을 닦고 다녀
쓸모없는 온갖 것들이 방구석에 쌓인다고 아버지, 그만 좀 뭐라 그래 그러지 않을 생각이 내게도 노을처럼 피고 지잖아
기다리는 것들을 물고 오지 않는 새들에게 복수는 씨앗을 심지 않는 것이야
어느 날 불쑥 언니가 쓴 시 속에서 나와 나는 헌책방 주인이 될지도 모르겠어 마음껏 책을 읽기로 해, 엄마 미쳐 날뛰는 유머감각으로 청양고추를 다져넣고 국수를 먹자
배부른 뒤통수를 땅에 대고 누우면 그럴 리 없는 하늘에 또렷이 보이는 집이 있어
묵사발
산 속을 돌아다니며 먹을 만 한건 다 쓸어왔다 산으로 가라고 말해준 마트 사장님께는 묵밥을 대접하겠다고 공손하게 말씀드렸다 적금을 붓고 있다고 뻥치면서 말이다 오늘의 일일계획표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해가 지면 형들은 주먹을 감추고 홍대입구로 갔다 교수님이 운영하는 식당에 곱창을 먹으러 갔다 곱창을 씹으면 대학생이 된 것 같다고 너무 씹다가 입술이 터져 돌아온 날도 있었다 동그란 입을 최대한 오므리고 입 아닌 척 입만 들고 돌아왔다
길에서 만난 유기견이 골골 따라왔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마을이 어딘지 물었다 길을 잃었냐고 묻고 싶어 불쑥 개 앞에 섰다 이 동네는 사족보행이 가능한 동네라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의 행렬이 산으로 이어졌다 굴을 파고 이주한 할머니의 눈 밑이 검었다 손톱을 깎아드리고 묵밥을 놓고 왔다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드셨다 얘야 맛있구나 다음에는 김치를 썰어 넣고 조밥을 말아 오면 좋겠구나 할매 이젠 손톱을 기르는 것도 좋아요 목에 방울을 단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방울 소리가 가까울수록 할머니는 손을 흔들었다
김현재 시인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23년 『시로여는세상』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