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보감》및 《 조선왕조실록 》 의 사료(史料)는 연기(燕岐) 및 진주(晉州) 측과의 충장공 혈손 시비 분쟁이 있을 때마다 장흥(長興)측의 완전한 승소로 이끌어 준 결정적 정사(正史)의 기록입니다.
이후 조정에서도 이 기록에 기반하여 장흥 측의 적통성(嫡統性)을 인정하는 명확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으며, 마침내 충장공파의 종통(宗統)을 굳건히 지키는 데 기여한 더없이 소중한 유산입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제67권 영조 44년(무자, 1768년 12월 )
命錄用故相臣鄭苯後孫。
옛 정승 정분의 후손을 등용하라고 명하시다.
初端宗朝三大臣。
애초에 단종조의 세 대신에 대하여,
雖命復官。
비록 관직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셨으나,
而鄭苯後孫。
정분의 후손에 대해서는
未知其爲誰某。
그 후손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여,
尙未擧貤典。
아직 추증의 은전을 베풀지 못하였다.
會長興鄭姓人爭訟山地。
마침 장흥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산지를 두고 쟁송을 벌이게 되었는데,
自官掘驗其先墓。
관에서 그 선조의 묘를 파서 조사해 보니,
得誌石二片。
지석 두 편을 얻었다.
卽鄭光露之墓。
곧 정광로의 묘였다.
而光露以苯之子。
광로는 정분의 아들로서,
預知時事之艱。
장차 세상일이 어려워질 것을 미리 알고,
佯狂匿跡。
미친 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及其歿也。
그가 세상을 떠나자,
其子具事實埋誌。
그 아들(변소)이 사실을 갖추어 기록하여 지석을 묻고,
遺戒秘諱來歷。
그 이름과 내력을 숨기라는 유훈을 남겼다.
至是。
(마씨와 소송)이에 이르러,
因誌石。
지석을 통해
始詳得其世派。
비로소 그 대대로 이어진 계보를 상세히 알게 되니,
果苯之後也。
과연 정분의 후손이었다.
筵臣以爲言。
경연의 신하가 이를 아뢰니,
上曰。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異哉。
“기이하도다!” 하시고,
有是命。
이에 이러한 명을 내리셨다.
▶ 조선시대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접근의 한계로 인해 직접 활용하기 어려웠지만, 《국조보감》과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조실록111권, 영조 44년 12월 23일
鳳漢曰
홍봉한이 아뢰었나이다.
端廟朝三大臣復官後,
단종조에 세 대신의 관작을 회복시킨 뒤,
尋鄭苯子孫,
정분의 자손을 찾아보았으나,
尙未得眞的者矣。
아직 참된 후손을 얻지 못하였사옵니다.
近聞長興 鄭姓人與馬哥相訟,
근래에 들으니 장흥의 정씨 성을 가진 이가 마씨 집안과 서로 송사를 벌였는데,
自官掘見鄭姓人先代墓,
관가에서 정씨 사람의 선대 묘를 파서 살펴보니,
得誌石二片,
지석 두 조각을 얻었사옵니다.
卽鄭光露之墓,
바로 정광로의 묘였으며,
而光露卽苯之子也。
광로는 곧 정분의 아들이옵니다.
蓋光露預知時事之難,
대개 광로는 당시 세상일의 어려움을 미리 알고,
佯狂匿跡,
짐짓 미친 사람인 체하며 자취를 감추었으며,
及其歿也,
그가 세상을 떠나기에 이르러,
其子雖埋誌,
그 아들이 비록 지석을 묻었으나,
而因其遺戒,
그가 남긴 유훈에 따라,
秘其來歷,
그 가문의 내력을 숨겨 왔사옵니다.
自孫以後,
손자 대 이후로는,
芒然不知爲誰某之後。
자신들이 누구의 후손인지조차 아득히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今於數百年之後,
이제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始知爲古相之血孫,
비로소 옛 정승의 혈손임을 알게 되었으니,
自朝家宜有表異之擧矣。
조정에서 마땅히 이를 특별히 표창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上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其涉奇異。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待闕調用。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 조정하여 등용하도록 하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