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29일 병신 2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충청·경상도 방어사 권응수가 일본에 납치된 밀양의 유학 변사순의 편지를 올리다
겸 충청 경상도 방어사(兼忠淸慶尙道防禦使) 권응수(權應銖)가 장계를 올렸다.
"밀양(密陽)의 유학(幼學) 변사순(卞斯循)이 납치되어 일본으로 들어갔는데, 지금 기장(機張) 일광사(日光寺)의 중 경륜(敬倫)이 나오는 편에 서찰을 붙여 보냈기에 이를 등서하여 올립니다."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사순(卞斯循)은 재배(再拜)하고 조선국(朝鮮國)의 대인 선생(大人先生) 및 여러 진중의 대소 인민(大小人民)에게 말씀드립니다. 소생은 밀양부(密陽府)의 가난한 선비입니다. 나이 18세로 국운이 비색할 때 태어나 고기 그물에 기러기가 걸리는 화를 면치 못하여 지난 갑오년025) 봄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살을 결심하였으나 포로가 된 후 수족을 자유로이 쓸 수 없었습니다. 결박되어 배에 갇혀 천만리 창파(滄波)의 바다를 지나 깊이 불모지(不毛地)로 들어오고 보니, 비록 도망쳐 돌아오고 싶었으나 길을 알 방법이 없어 눈물만 흘리면서 하늘을 부르짖을 뿐이었습니다. 소생은 사대부의 고장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을 일삼은 사람이라, 지금 비록 왜적의 노예가 되었으나 마음은 하늘끝에 아득한 구중 궁궐의 전하를 사모함에 간절하고, 몸은 비록 우리 임금이 계시는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곳의 모든 계략을 자세히 탐문하여 통보하고 싶으나 아득히 먼 새외(塞外)에 있어 서신을 통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해 봄에 백서(白書)의 서간을 보냈는데 전해졌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 적의 무리 18만 명이 함께 약속하기를 상림(商林)의 일과 같이 하다가 패전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이처럼 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조종 사직(祖宗社稷)의 수치를 백만년 후인들 어찌 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이곳에는 군량과 짐바리가 끊임없이 잇닿았을 뿐 아니라,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왕래하면서 적에 빌붙는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적에게 쌀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은 말하기를 ‘이처럼 군량이 쌓이면 대명(大明)을 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적진에 들어가 농사를 짓는 조선 사람들이 몹시도 밉습니다. 또 조선이 비록 화친을 한다 하더라도 적은 전연 철회(撤回)할 기세가 없으니, 추격하여 정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포로가 된 조선 사람이 이곳에 반이나 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이 어두운 밤이면 모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화친하면 우리가 모두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소생이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가 화친하면 우리는 살아서 옛 집으로 돌아가고 거듭 고향 산천의 길을 밟아 부모의 묘하에 통곡하게 되리라. 그러면 마음에는 만족하고 즐겁겠지만 국가의 의에 있어서는 불가하다. 우리가 비록 새외의 땅에 억류되어 막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끝내 길가의 백골이 되더라도 혼신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운운하자, 모든 조선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대개 적이 비록 철병하여 돌아간다 하더라도 명년이 그러하고 또 명년이 그러합니다. 지금 부산 한 모퉁이의 적은 마치 제비가 막(幕) 위에 깃든 것과 같이 위태롭게 처해 있으니, 천병(天兵)과 합세하여 추격하면 수치를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변사순은 하향의 미천한 선비이다. 오랫동안 적의 땅에 억류되어 그 고초가 형언할 수 없으나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 나라를 향모하는 정성이 언표(言表)에 흘러 넘치니, 참으로 가엾은 일이다. 황정욱(黃廷彧)과 황혁(黃赫)026) 같은 자는 훈척 대신(勳戚大臣)으로서 임금을 망각하고 적에게 아첨하기를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사람으로 사순의 죄인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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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재촬요(輿載撮要)
輿載撮要 卷六 / 慶尙道 機張縣
山川
炭山。 鎭山。
日光山。 北四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