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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설명 남고서원 南皐書院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남고서원은 성리학자 이항(李恒)과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본래 선비들이 학문을 닦는 곳이었다. 선조 10년(1577)에 처음 세웠으며, 숙종 11년(1685)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 주는 사액서원(南皐書院)이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899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그 후 김점(金漸), 김복억(金福億), 김승적(金承績), 소산복(蘇山福) 등의 위패도 모시게 되었다. 현재 이항의 문집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 설명 일재 이항·건재 김천일을 비롯하여 김점·김복억·김승적·소산복을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이항(1499∼1576)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다. 김천일(1537∼1593)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장수이다. 이 서원은 선조 10년(1577)에 이항과 김천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고 숙종 11년(1685) 임금으로부터 ‘남고’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광무 3년(1899)에 다시 지었는데 이 때 김점·김복억·김승적이 추가로 배향되었으며, 1913년에는 새로 소산복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서원 경내에는 사우와 강수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사우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은 중앙에 이항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그 좌우에 나머지 인물들의 위패가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인 강수재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다. |
남고서원南皐書院
문화재 지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
건립시기 1577년(선조 10)
소재지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537
분야 교육/교육
요약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에 있는 조선전기 이항과 김천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문화재자료.
내용
1577년(선조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항(李恒)과 김천일(金千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5년(숙종 11)에 ‘남고(南皐)’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하여왔다.
그 뒤 1899년에 강수재(講修齋)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서원을 복원하는 동시에 김점(金坫)·김복억(金福億)·김승적(金承績)을 추가 배향하고, 1974년에 다시 소산복(蘇山福)을 추가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내신문(內神門), 4칸의 강수재, 외신문(外神門) 등이 있다.
묘우의 중앙에는 이항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김천일·김복억·소산복, 왼쪽에는 김점·김승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수재는 강당으로서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좌우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 서원은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해마다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며, 유물로는 『공자통기속록(孔子通紀續錄)』 등 70여권의 문헌이 있다. 재산으로는 대지 880평 및 전답 6,500여 평, 임야 7,500여 평 등이 있다.
참고문헌
・ 『내고장전통문화(傳統文化)』(정읍군, 1983)
・ 『전북원우록(全北院宇錄)』(이태연, 1981)
・ 『남고서원지(南皐書院誌)』(남고서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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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억(金福億)
자(字) 백선(伯善)
호(號) 율정(栗亭)
호(號) 사우당(四優堂)
생년 1524(중종 19)
졸년 1600(선조 33)
시대 조선전기
본관 도강(道康)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련정보]
[진사] 선조(宣祖) 6년(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3위(43/100)
[상세내용]
김복억(金福億)
1524년(중종 19)∼1600년(선조 33). 조선 전기 문신. 자는 백선(伯善)이고, 호는 율정(栗亭)‧사우당(四優堂)이다. 본관은 도강(道康)이며, 전라남도 태인현(泰仁縣) 고현내(古縣內)에서 태어났다.
개국공신(開國功臣)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부친은 성재(誠齋) 김약묵(金若黙)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등과 교유하였다.
1569년(선조 2) 효행으로 천거되어 목청참봉(穆淸參奉)이 되었다가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옮겼다.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회덕현감(懷德縣監)‧사옹원판관(司饔院判官)‧창평현령(昌平縣令)‧김제군수(金提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후 재종제(再從弟) 김후진(金後進) 등과 함께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진중으로 보냈다.
1593년(선조 26)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부임하였으며, 다시 이천부사(利川府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927년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북면(北面)에 있는 남고서원(南皐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전북원수록
정읍군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宣祖實錄
『만력 1년 계유 2월 24일 사마 방목(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6 (1573)])
[집필자]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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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억(金福億)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강진(康津)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김약묵(金若默)의 맏아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1573년(선조 6)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고, 돈녕부 봉사(敦寧府奉事) 등을 지냄.
一齋先生集附錄 / 挽詞 / 挽詞[金福億]
摳衣門下自童初。誘掖諄諄善敎予。頑質變化容接裏。大要粗得講論餘。晩承召命來金闕。時與南溟枉草廬。天不憖遺堪慟哭。道將誰托淚交如。
門人敦寧府奉事金福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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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적(金承績)
[생원]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7위(37/100)
자(字) 경립(景立)
생년 기유(己酉) 1549년 (명종 4)
합격연령 40세
본인본관 언양(彦陽)
거주지 금구(金溝)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부(父)]
성명 : 김평국(金平國)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관직 : 행충좌위부호군(行忠佐衛副護軍)
[안항(鴈行)]
제(弟) : 김승서(金承緖)
제(弟) : 김승위(金承緯)
[출전]
『무자식년사마방목(戊子式年司馬榜目)』(경상대학교 문천각[古(단지) E1 사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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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복(蘇山福)
[생원]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4위(93/100)
자(字) 경응(景膺)
생년 병진(丙辰) 1556년 (명종 11)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남원(南原)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부(父)]
성명 : 소국필(蘇國弼)
품계 : 정략장군(定略將軍)
[안항(鴈行)]
형(兄) : 소해복(蘇海福)
[출전]
『신묘년사마방목(辛卯年司馬榜目)』(성균관대학교 존경각[貴B13KB-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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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金坫) : 본관은 부안, 자는 경숙(敬叔), 호는 매당(梅塘)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고봉의 큰며느리의 부친이다.
門人 金坫,柳埏,宋琳,宋公弼,柳承春,金齊閔,奇孝諫,邊士貞,申 溥,金千鎰,申漑,安璜,鄭彥悌,吳玠,柳忍,趙長雲,徐克弘,安昌國, 柳洪源,趙長煕,柳永謙,尹權,柳永謹,金現,金承緖,金見龍,尹根,金克寅等
[一齋集 李恒]
[출처] 全州柳氏전주류씨 九世[永謹영근] 寺正公시정공의 足跡|작성자 류병훈
고봉 기대승
◊ 선조 5년(임신 1572년, 46세)
◦ 2월, 아들 기효맹(奇孝孟)이 태어나다. ◦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소명을 받아 조정에 나갔는데, 도중에 대사간에 제수되다.
◦ 5월,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다.
◦ 7월, 공조 참의ㆍ지제교에 제수되다.
◦ 9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다.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발문을 짓다.
◦ 10월 3일,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니, 서울의 선비들이 한강에서 전별하다.
◦ 10일, 천안(天安)에 도착하였는데 볼기에 종기가 나다.
◦ 15일, 태인(泰仁)에 도착한 후, 병이 악화되어 그곳에 머물며 치료하다.
◦ 25일, 사돈 김점(金坫)이 와서 문안하자 관청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여 매당(梅塘)으로 숙소를 옮기다.
◦ 임금이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 오변(吳忭)을 보내고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다.
◦ 11월 1일, 운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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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18권 / 서(序) / 《부령김씨족보》 서〔扶寧金氏族譜序〕
김씨(金氏)에는 잘 알려진 관향이 많으니, 부령(扶寧)도 그중의 하나이다. 삼가 그 가첩(家牒)을 살피니, 가장 일찍 수봉(受封)하여 지위가 높고 현달한 데 이르러 송경(松京 개성(開城))과 시종 함께 하였다. 전의 소감(典醫少監) 휘 광신(光信)이 고려의 운세가 다할 때에 비로소 관향에 정착했는데, 자손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번성하여 주(州)를 넘고 성(省)까지 잇닿으니 적경(積慶)이 깊어 유택(流澤)이 멀리까지 가니 부령 김씨라고 이르게 되었다.
부령씨가 이미 남쪽으로 온 이후 지위가 높고 현달한 것은 전보다 못하나 역시 누누이 벼슬에 올랐으니, 매당(梅堂) 점(坫)과 영광 군수(靈光郡守) 익복(益福)과 같은 이는 그 자손들이 모두 명가가 되었다. 이제 또한 부사(府使) 한우(漢佑)와 의령 현감(宜寧縣監) 덕복(德福)의 두 집안을 발견하였다. 대체로 부사공은 충의의 기국(器局)이 있어서 임진년의 병화(兵禍)를 당하여 둘째 아들 승백(承白)과 함께 호가(扈駕)의 공훈이 있었고, 큰 아들 원룡(元龍) 및 그 조카 진룡(震龍)과 응룡(應龍)은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목숨을 바쳐 앞뒤로 훈권(勳券 공훈 녹권)이 있으니, 형제가 향기를 나란히 하였다. 현감공은 집안에 전해진 효의(孝義)를 이어받아 늙기 전에 용감히 물러 나와 경전과 도의를 스스로 즐겨 아름다운 행의와 사적이 향방(鄕邦)의 사표가 되었으니, 모두 이야기로써 들을 만하였다. 나는 인가(人家)의 선덕(先德)에게 듣고 본 것이 넓지 못하나 그 선세와 매우 가까운 인척간이어서 매당(梅堂)의 집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중년에 옛 대간 한익(漢益) 씨와 서로 알게 되어 영광 군사의 집안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오늘날 사문(斯文) 익신(益臣) 씨가 영광스럽게 찾아주어 새로 인쇄한 족보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 부사와 현감 두 집안의 것을 거의 빠뜨릴 뻔하였다.
부령을 관향으로 하는 김씨는 예로부터 전보(全譜)가 없었으니, 아마도 씨족이 커서 수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익신씨는 현감의 후손으로 부사공과 가깝기 때문에 그 새로 인쇄한 것도 이 두 집안에 그치고 미처 널리 수집하지 않았다. 익신씨가 정진(正鎭)을 형편없다 생각하지 않고 외람되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므로 정진은 사양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씨족은 족보를 가져야 하는데, 크게 윤리에 관계된 것이 네 가지이다. 근원을 근원으로 하고, 근본을 근본으로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출생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째이고, 친함을 강론하고 화목을 닦아 우리 족류(族類)로 하여금 행인(行人)과 구별하도록 하는 것이 두 번째이며, 명휘(名諱)와 분롱(墳壠 무덤)을 기록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각자 추원(追遠)의 정을 펴도록 하는 것이 세 번째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김씨 제현들이 수보(修譜)하는 규례(規例)에서 다 말하였으니, 내가 겹쳐 말할 필요는 없다. 조종(祖宗)의 명덕으로 인해 칭술(稱述)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전하여 지키고 식곡(式穀)의 바탕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네 번째이다. 이와 같은 것은 외인(外人)의 칭송을 조금 빌릴 만하니, 김씨가 정진에게 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부령씨의 명덕이 현저히 드러난 것은 마땅히 고려 문정공(文貞公)이 으뜸이나 사림공(士林公)을 전하여 말한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한 집안의 말에서 기다릴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제 김씨의 부탁에서 감히 멀리 문정공을 칭술하지 못하고, 특별히 부사와 현감 두 공의 덕을 그 한두 가지에서 채록하여 충을 다하고 효를 다한 뜻을 갖추도록 하였다.
[주-D001] 적경(積慶) : 적선여경(積善餘慶)의 준말로,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덕행을 쌓은 집안은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주-D002]
매당(梅堂) 점(坫) : 김점(金坫, ?~1560)을 말하며, 매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경숙(敬淑)이다. 전북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이현(二賢)으로 꼽힌다. 명종 때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연은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벼슬에서 물러나 스승 이항이 있던 고부 우일[우일은 현 정읍시 정우면 우일리를 말한다.]로 이주하였다. 망제동 물가에 척심정(滌心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글을 읽었으며,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였다. 기대승과는 사돈지간이다.
[주-D003] 영광 군수(靈光郡守) 익복(益福) : 김익복(金益福, 1551~?)을 말한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계응(季膺)이다. 조부는 석량(錫良)이며, 부친은 찰방 광(光)이다. 1573년(선조6)에 진사가 되고 1580년(선조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ㆍ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광 군수로서 현감 임계영(任啓英)과 함께 인근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결국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어려서는 노진(盧禛)으로부터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金長生)과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주-D004] 식곡(式穀) : 자식을 착한 데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완(小宛)〉에 “언덕 가운데의 콩을 서민들이 거두어 가는 것처럼,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그대도 아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으로 닮도록 하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주-D005] 외인(外人) : 씨족 외의 사람들을 지칭한다.[주-D006]
문정공(文貞公) : 문정은 김구(金坵, 1211~1278)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예종 때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예부 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 등을 거쳤다.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권장하였고, 원종 때 유경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실록을 수찬하였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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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던 영의정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 중종 28∼1601 선조 34)가 들려 매당(梅塘)의 한거(閑居)를 읊어 주인 김점(金坫) 에게 사를 건네 주며 감흥을 이렇게 남긴다.
청한한 맛은 늙을수록 참되나니 / 一味淸閑老愈眞
흰 수염 붉은 뺨은 태평성대의 백성이로다 / 白鬚紅頰太平民 ...
오인교의 녹색건강블로그202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