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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lition Wars" redirects here. For the general concept of coalitions of co-belligerents, see coalition war.
The 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5] sometimes called the Great French War, were a series of conflicts between the French and several European monarchies between 1792 and 1815. They encompass first the French Revolutionary Wars against the newly declared French Republic and from 1803 onwards the Napoleonic Wars against First Consul and later Emperor Napoleon Bonaparte.[6][7] They include the Coalition Wars as a subset: seven wars waged by various military alliances of great European powers, known as Coalitions, against Revolutionary France – later the First French Empire – and its allies between 1792 and 1815:
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프랑스 혁명 전쟁(영어: French Revolutionary Wars, 프랑스어: Guerr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은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 정부와 공화제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왕당파 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간섭을 계기로 프랑스 혁명 정부(지롱드파 내각)가 오스트리아에게 선전 포고(1792년 4월 20일 )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프랑스 북부와 동부 · 네덜란드 · 벨기에 · 북부 이탈리아 · 이집트 · 일부 식민지 등이 주요 전쟁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공격은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중단되지만(→발미 전투), 1793년 혁명의 좌경화(루이 16세의 처형)와 혁명군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 침투에 따라 1793년에는 영국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국내의 반란과 함께 프랑스는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프랑스는 혁명의 열기에 의해 초래된 국가적인 전쟁에 참가, 국가 총동원 체제의 정비와 사단 편성의 도입을 비롯한 군사 혁신을 단행함으로써 반격을 가하였고 모든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역량을 동원하여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1]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프랑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에 2개 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 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7년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체결한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일단,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탈퇴했고, 이로써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1798년,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트리아가 다시 참전하자 프랑스는 다시 열세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이집트 원정에서 귀환한 나폴레옹이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보나파르트의 반격으로 오스트리아는 1801년의 뤼네빌 조약으로 다시 강화하였고, 영국도 1802년 3월 25일 아미앵 조약에 응했다. 이것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혁명 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대폭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미앵 조약 이후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1803년에는 다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상태로 들어가,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1803~15)으로 돌입한다.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국민개병제가 실시되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보여준 공화제 프랑스의 성공적인 모습은 유럽 각 지역에 있던 공화주의자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는 계기가 된다.
배경[편집]
1780년대 말 7년 전쟁 이후 유럽강대국 간의 대립 관계는 해소되어 가고 있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은 제1차 폴란드 분할(1772년)에 협조하여 각각 국경에 인접한 지역을 획득했다. 러시아와 스웨덴은 1788년부터 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벌였지만, 스웨덴의 우세로 러시아가 핀란드에 대한 간섭을 중지하는 것으로 양국 관계는 개선되었다.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에 따른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의 결성으로 국제적 고립에 처했지만, 이 전쟁 종결로 인해 고립이 해소되었다. 이러한 국제 환경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프랑스 혁명은 결국 프랑스의 순수한 국내문제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알자스 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혁명으로 영향을 받게 되자 독일군주들과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 또 프랑스 국내의 교회재산이 몰수되고 아비뇽 지방을 프랑스가 합병함으로써 교황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
유럽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프랑스 왕가와 인연으로 일찍부터 반혁명의 입장을 표명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 일가의 프랑스 탈출이 실패로 끝나면서(바렌느 사건) 즉시 프랑스에서 망명 귀족(에미그레)과 연계해 반혁명 십자군의 결성을 유럽 각국에 호소했다. 그러나 요청에 응한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만으로 결성에는 이르지 않았다. 1792년 3월 구스타프 3세가 암살 되자, 스웨덴은 혁명 전쟁에 참가할 명분이 없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에도 해결책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레오폴트 2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오빠로 혁명이 과격화됨에 따라 친족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1791년 8월 27일 레오폴트 2세는 망명 귀족인 아르투 백작(루이 16세의 동생)의 중재 하에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공동으로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프랑스 왕가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혁명에 개입할 준비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레오폴트 2세 자신은 반드시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 선언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와 독일의 왕당파와 망명 귀족의 선동 활동도 혁명 정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알자스로렌의 귀속 문제라는 오랜 충돌도 있었다.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당시 외무대신의 지위에 있었던 뒤무리에 등의 주도 아래, 프랑스 입법 의회는 1792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결의했다.[3][4]
과정[편집]
참전국[편집]
프랑스 측에서는 전쟁의 과정에서 탄생한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1796년 10월 이후에는 스페인이 참전했다. 대프랑스 대동맹에 참가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그밖에 프랑스는 네덜란드, 스위스,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등을 급습하였다.
풍전등화의 프랑스(1792)[편집]
발미 전투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전, 로샹보 백작 · 라파예트 후작, 그리고 니콜라 뤼크네르의 부대들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와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부대로 재편되었다.[5] 뒤무리에는 남부 네덜란드의 침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현지 주민은 프랑스군에 호응하여 황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시기를 맞추지 못했으며, 혁명으로 프랑스군도 혼란했던 것이다. 장교들은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비협조적이었고, 병사들의 규율도 풀어져 적 앞에서 도망가거나 혁명을 핑계 삼아 상관을 살해하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마리 앙트와네트에 이르러서는 적들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고(1792년 7월 8일)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 2만9천명의 오스트리아, 6천명의 헤센 군대가 7월 19일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국왕 부부에게 위해를 가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는 언동으로 프랑스 시민을 격분시켰다.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은 망명 귀족인 콩데 공작이 만든 왕정을 복고시켜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한다는 선언을 발표한다.첫 전투에서 뒤무리에 장군의 군대는 대패했고 프랑스 혁명 정부는 큰 위기에 처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7월 11일 입법 의회가 “조국이 위기에 빠졌습니다!”라는 선언을 발표했고, 선언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의용군이 파리에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온 의용군이 노래하고 있던 군가가 퍼져, 이후 "라 마르세예즈"이라고 불렸다.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프랑스군의 열세의 원인은 전쟁에 비협조적인 국왕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8월 10일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중지하고 국왕 일가를 떵플 탑에 유폐했다. (→8월 10일 사건)
3국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했고, 8월 23일에는 롱위가, 9월 2일에는 베르됭이 함락되었고, 수도 파리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9월 20일 뒤무리에와 켈레르만이 이끄는 프랑스 의용군과 포병대는 발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막았다. 전투 자체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고, 프로이센군의 후퇴는 전술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최초의 승리는 프랑스 국민을 들끓게 했다. 프랑스군은 공세로 전환하고, 11월 6일 플랑드르 방면에서 뒤무리에가 저마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여, 남쪽 네덜란드 전역을 점령했다. 퀴스틴 백작 아당 필리프는 독일에 침공하여 프랑크푸르트까지 도달했다.[6]
국가총동원령 (1793)[편집]
당시 프랑스 장군,장교,사병
1793년 1월 국민 공회는 전시체제 강화를 위해 국방위원회(후 공안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 당시 프랑스군의 상태는 악화되어 있었다. 전년에 군대에 참전한 의용군들이 만기를 이유로 귀향했고, 상비군에게 급여도 제대로 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전선의 병력은 점차 감소하였다. 또한 1월 21일 혁명 정부의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고, 스페인 · 네덜란드 · 나폴리 왕국 · 사르데냐 왕국과 그때까지 시민 혁명에 동정적이었던 잉글랜드조차 반혁명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또한 잉글랜드로서는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자국의 안보도 심각한 문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주요국 사이에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된다.[7] 프랑스는 사보이 · 니스 · 벨기에를 합방하고, 잉글랜드(2월 1일) · 네덜란드(2월 1일) · 스페인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를 했다.[8]
2월 24일 국민 공회는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30만명 모병안”을 통과했지만, 기대만큼 군인은 모이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탄압, 국왕 처형, 증세, 불공평한 모병에 대한 반발로 3월 11일 프랑스 서부 멘에루아르주에서 방데 반란(~1801년)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6월 낭트 전투를 고비로 확산이 멈추었으나 게릴라 전투는 1796년까지 계속되었다. 북부 전선에서는 뒤무리에가 남부 네덜란드 방위라는 정부 방침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안한 대로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저(低)라인강 유역의 신임 오스트리아 사령관으로 부임한 작스코부르크의 조시아스 공작은 콜로뉴 지방으로터 4만2천명을 이끌고 와서, 뒤무리에가 배치해 둔 여러 파견부대로 파고들었다.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과 오스트리아군의 반격 앞에 철수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프랑스의 뒤무리에는 네덜란드 진격을 포기하고, 그가 모을 수 있었던 병사들만 데리고, 뫼즈로 돌아왔다. 양군(兩軍)은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마주쳤다. 뒤무리에는, 즈마프 전투(1792년 11월 6일)에서 그가 우수한 많은 병사들을 거느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적군보다 겨우 몇 천명 많은 병사가 있을 뿐이었다. 뒤무리에는 완전히 패배당하였다(3월 18일, 네르빈덴 전투) 그의 불완전한 계획은 무너져 내렸고, 루이 14세와 보방이 세운 국경 요새라는 강력한 전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프랑스 병력 전원은 혼란 속에서 철수하였다. 뒤무리에는, 그의 정치적 계획이 실패하였음을 입증하면서, 공화국에 대항하기로 선언하고 그의 병사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 부하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갔다.(4월 5일)[9]
리더를 잃은 프랑스 공화파 군대는 발렌시엔느로 줄지어 퇴각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다른 장군을 찾아냈으니, 오귀스탱 마리 피코였다. 그는 비록 허영심 많고 사치스런 자였으나, 전직 연대장이었고, 공화정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용기도 빛났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는 상부의 명령이나 전임자로부터의 조언도 없이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능숙한 일처리와 열정적인 선동으로 흩어진 병사들의 힘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는 두 번째 역습을 피하여 발렌시엔느 뒷쪽으로 군사들을 잘 배치하였다. 됭케르크와 카슬 지역, 릴 부근의 라 마들렌느의 캠프, 그리고 부솅을 여러 그룹의 재집결장소로 택했다. 지휘 사령부는 부솅에 두었다.[10] 프랑스 남부에서는 자코뱅파 정권에 대한 반란도 일어났다. 4월 29일 마르세이유, 5월 29일 리옹에서 반정부 반란 정권이 탄생하였고, 7월 12일에는 툴롱가 반기에서는 잉글랜드군을 원군으로 초청했다. 또한 잉글랜드는 5월 31일에 프랑스에 대한 해상 봉쇄를 단행하고, 스페인군 · 사르데냐군도 국경을 넘어 왔고, 오스트리아군은 바렌시엔느를 함락시켰다. 프랑스는 다시 궁지에 빠졌다.
8월 23일 국민 의회는 "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하고, 징병제를 시행했다. 허용된 30만명 모병과 달리, 각 계층의 국민을 평등하게 징병하여 새로 120만 군인이 군에 참가했다. 이것은 용병을 군대의 주력으로 하고 있던 당시의 유럽 군주제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병력이었다. 거대한 국민군으로 바뀐 프랑스군은 라자르 카르노의 지도 하에 13개 군단으로 재편했고, 반격의 준비를 갖췄다. 프랑스 북부군(北部軍) 사령관 장 니콜라 우샤르는 요크 공작 프레더릭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9월 8일 혼트쇼트(Hondschoote) 전투에서 승리하여 됭케르크를 포위에서 풀어 놓았다. 북부군의 후임 사령관 장바티스트 주르당은 10월 15일에서 16일까지 이틀간 벌인 와티니 전투에서 조시아스 공작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에게 승리했다.
국내에서도 8월 25일에는 마르세유, 10월 10일 ‘리옹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하지만 툴롱은 후드 총독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에 난항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10월 30일과 11월 15일 두 번에 걸친 공격에 실패하여 사령관이 파면되었다. 후임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고미에는 당시 아직 24세 포병 장교 나폴레옹이 세운 지혜로운 전략을 채택하여 12월 19일 툴롱 탈환에 성공했다.[11] (툴롱 포위전)
네덜란드 점령(1794~95)[편집]
프랑스군의 대군은 대프랑스 동맹군을 압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대군의 보급에 대해서는 적국 영토에서 징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후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 양상을 가지게 되었다. 주르당이 플뢰뤼스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했다(1794년 6월 26일). 이 결과 대프랑스 동맹군은 라인강 서쪽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군은 남부 네덜란드와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1795년 초, 하천의 결빙으로 네덜란드의 요새의 방어력이 떨어지는 겨울철을 노려 피슈그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도시는 차례로 함락되어 네덜란드 총독 빌렘 5세가 도망가고, 네덜란드 함대는 접수되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고(1795년 1월 19일), 브라반트 공국과 마스트리히트가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네덜란드의 함락을 보고 프로이센도 프랑스와 강화를 결정해 4월 5일 바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라인란트 합병을 인정했지만, 폴란드 분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프랑스군은 스페인에서 진격을 거듭, 스페인과도 평화에 응했다. 7월 22일 제2차 바젤 조약에서 스페인은 점령지의 회복에 대한 대가로 혁명 정부의 승인과 산토도밍고의 할양을 인정했다. 양국의 강화에 따라 프랑스는 즉각적인 궁지를 벗어났다.
프랑스 국민공회가 해산되고 프랑스 총재정부가 성립(1795년 10월 26일)되자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수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다만, 영국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기에 오스트리아의 영향권 밑에 있는 북부 이탈리아의 정복에 착수했다.[12]
제1차 이탈리아 원정(1796~97)[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탈리아 원정 (프랑스 혁명 전쟁)입니다.
리볼리 전투
1796년 프랑스 총재정부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계획했다. 라인 방면의 2개 군을 주르당과 모로가 이끌었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는 바라스의 조치에 의해 보나파르트가 발탁되었다. 3군은 티롤에서 합류 비엔나를 점령하는 작전이었다.
전략은 4월에 시작되었다. 당초 주르당과 모로는 순조롭게 진격했다. 모로는 바이에른을 통과하여, 9월경 티롤의 국경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주르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테셴 공작 카를에 패배하여 라인강 서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우선 지금까지 최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대치 해왔던 사르데냐 왕국을 약 1개월 만에 항복하게 하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를 포위했다. 뷔름저와 아르비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탈환을 목표로 반격에 나섰지만, 나폴레옹에게 카스틸리오네 전투(8월 5일), 아르콜레 다리 전투(11월 15일~17일)에서 패배했다.
그 당시 왕당파의 참여와 영국의 지원을 받아 오래 끌던 방데 반란이 라자르 오슈에 의해 1796년 상반기에 진압되었다. 12월, 오슈는 아일랜드에 원정을 시도했고, 영국 함대의 방해로 인해 상륙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또한 10월에는 스페인이 프랑스 편에 서서 영국에 선전 포고하였고, 스페인 함대는 1797년 2월 14일 쌍 빈센트 곶 해전에서 존 저비스와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패했다.
1797년 1월 14일, 이탈리아 방면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리볼리 전투에서도 패배하였고, 2월 2일 만토바가 성문을 열였다. 나폴레옹은 티롤에서 비엔나를 향해 진격하였고, 카를 대공도 나폴레옹의 기세를 멈추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휴전을 제의하였고, 4월 18일 레오벤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반년별로 협상을 거쳐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는 남부 네덜란드와 라인 강 좌측 해안을 합병하고, 북부 이탈리아에 치살피나 공화국, 이탈리아 공화국 등 위성국을 성립시켰다. 맞 교환으로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합병했다. 오스트리아의 탈퇴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이집트-시리아 원정(1798)[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집트 시리아 원정입니다.
피라미드 전투, 1798년
나일 해전, 1798년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영국만 전쟁을 계속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여 제해권을 쥐고 있는 영국에게 프랑스는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연계를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에 원정할 것을 총재 정부에 건의했다.
1798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 항을 출발하였다. 도중 몰타를 점령하고, 7월 2일 이집트 아부키르 만에 상륙했다.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현지의 이집트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이어 카이로에 입성한다. 그러나 10일 후 8월 1일 나일 해전에서 허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프랑스 함대가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게 된다. 나폴레옹은 시리아 방면으로 침공하여 아코를 포위하지만(아코 공방전, 1799년 3월 18일 -5월 20일) 공략에 실패하고 이집트로 퇴각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2월 프랑스군이 교황령에 침공해 로마공화국을 건국했다. 3월 스위스에서 내란에 개입하여 이곳에 헬베티아 공화국을 건국하였고, 제네바를 합병했다. 또한 8월 아일랜드의 반란을 틈타 프랑스군은 다시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을 실시한다. 이번엔 상륙에 성공하지만, 제해권이 없는 상황에서 전략은 오래가지 않았고, 증원을 하지 못한 원정군은 9월에 항복했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1798~1801)[편집]
1798년 1월부터 스웨덴의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중재 하에 프랑스 혁명 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한 제2차 라슈타트 회의가 열린 것도 메테르니히의 책략으로 오스트리아는 회의를 질질끌어 강화를 하기 전에 대프랑스 동맹을 재건할 시간을 벌기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12월, 영국 · 오스트리아 · 러시아 등에 의해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1799년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를 탈환했다. 다시 위험에 빠진 프랑스는 국민들 사이에 총재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1799년,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전선 합세를 통해 프랑스군은 열세에 처하게 된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장 빅토르 마리 모로는 8월 제노바까지 후퇴했다. 라인 방면에서는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프랑스군은 3월 25일 스토케쉬 전투에서 패해 장바티스트 주르당은 해임되고 앙드레 마세나가 후임을 맡게 되었다. 스위스 방면에서 러시아 ·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 벌였지만, 마세나는 9월 25일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다. 러시아는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화평을 맺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약간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가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집정정부를 세우고 제일 집정에 취임하여 독재 권력을 쥐게 된다. 1800년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에 진출했다.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급습을 받아 궁지에 몰렸지만, 반격에 성공한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 방면군도 12월 3일 호엔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했다.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하여 캄포-포르미오 조약 내용을 재승인 하고 프랑스와 강화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한 국가는 다시 잉글랜드만 남게 되었다. 또한 잉글랜드의 몰타 점령으로 통상권을 침해당한 덴마크, 스웨덴은 잉글랜드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했던 러시아, 프로이센과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1800)하고 영국과 충돌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코펜하겐 해전(1801년 4월 2일)에서 덴마크 함대를 격파하고 무장 중립 동맹을 해체시켰다. 이로써 러시아, 스웨덴은 영국과 화해하고, 덴마크는 프랑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3월 22일 잉글랜드군과 오스만 제국군이 제2차 아부키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반년 후에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군을 항복하게 했다.
강화[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미앵 조약입니다.
1789년부터 1802년 사이의 프랑스령 확대. 프랑스는 남부 네덜란드, 라인란트, 사부아니스를 합병했다
1803년 북부 이탈리아. 스위스 건국, 헬베티아 공화국. 북부 이탈리아에 건국된 치차르피나 공화국, 리구리아 공화국은 프랑스의 위성국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대프랑스 주전파인 윌리엄 피트가 국내의 종교 문제 등으로 퇴진(1801년 3월 14일)하고, 대프랑스 주화파인 헨리 애딩턴이 수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첫 번째 집정 나폴레옹도 국내의 안정을 중시하고 강화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 양국은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1802년 3월 25일).
영국은 그때까지 얻은 프랑스의 영토 취득을 승인하고, 몰타 · 케이프 식민지 · 이집트 등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프랑스도 나폴리 왕국과 교황령에서 철수를 약속했다. 이후 1년 간 유럽에 평화가 지속되었다.
영향[편집]
프랑스 혁명 정부는 붕괴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몰렸지만, 의용군을 만들어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했다. 네덜란드, 남부 네덜란드, 라인란트, 스위스, 이탈리아 등 지역을 정복하고 프랑스의 역대 군주들이 수년에 품어 왔던 영토 야심을 순식간에 달성했다. 하지만 전쟁 과정에서 공화국 내부에서는 육군의 정치력이 증가하였다. 장군들은 마음대로 적국과 협상하였고, 나폴레옹에 이르러서는 장교에서 최고 권력자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의 제정의 시작은 공화국 자체를 종식시켰다.
아미앵 조약에 따른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대립 관계는 근본적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하고 양국은 유럽 전체를 침몰시킨 나폴레옹 전쟁으로 돌입한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신생 프랑스는 다른 국가를 압도하지만, 이전의 혁명 전쟁에서 얻은 성과를 모두 상실하는 궁극적인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참조주[편집]
- 전쟁 개요
1. 개요[편집]
Guerr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French Revolutionary Wars, Great French War
1792년부터 1802년까지 진행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프랑스인들이 유럽에 전파하기 위하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프랑스의 혁명 이념이 유럽에 전파되어 왕권, 귀족 신분제가 무너지던 것이 두려웠고 프랑스의 국력이 투쟁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틈을 타 프랑스를 분할 점령, 정복 통치하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군주들이 팀먹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까지 이어지게 되어 실제적으로는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끝났다.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대프랑스 동맹을 맺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이후의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대프랑스 동맹 전쟁(Coalition Wars)에 속한다. 사실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기 시작하는 프랑스 혁명 전쟁 후반부터는 프랑스 혁명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과 구분짓기 애매하지만 일반적으로 1802년 프랑스와 영국이 체결한 아미앵 조약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종결 시점으로 본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크게 1792년부터 1797년까지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 전쟁, 1798년부터 1802년까지의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Second Coalition)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향후 전 유럽을 한동안 떨게 만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2. 배경[편집]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부르봉 왕조가 뒤집어진 뒤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1년에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했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바렌 사건) 이것은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레오폴트 2세의 지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어그로를 끌었다.[1] 레오폴트 2세는 당시의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프랑스의 망명 왕당파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필니츠 선언을 함으로써 프랑스가 선빵을 날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혁명을 일으켜 새롭게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절대왕정국가들과는 서로 가지고 있는 이념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고, 혁명 전까지 대부분 프랑스로 넘어간 알자스 지방[2]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제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3. 전개 과정[편집]
3.1.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2~1798)[편집]
1791년, 유럽의 절대왕정국이었던 프랑스가 그들이 무시하던 시민들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국왕 일가 전원이 연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3.1.1.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의 선언문[편집]
이 사태를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위태위태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2세는 이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근교의 필니츠 궁전에서 회담을 가진 후 선언문을 통해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국왕의 명령으로 국외 도피를 하는 망명 귀족들 및 왕당파 대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선언은 프랑스에 남아있던 왕당파들과 귀족들에게 그리 큰 어필을 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프랑스 혁명정부에게 있어서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다. 거기에 첨언하자면, 앞서 말한 신생 프랑스 제1공화국과 유럽의 왕국들과의 이해관계도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원래 필니츠에서 열린 회담은 폴란드 분할 문제에 관해 양국이 협력한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프랑스 문제는 주된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선언문은 아르투아 백작의 설득으로 인해 형식상 발표한 것으로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너네들이 너네 국왕이랑 그 가족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너네들 싸그리 조져버릴겨!"이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국왕에게 손대지 마라는 외교적 압박이었지, 전쟁 위협도, 선전포고도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모두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기도 했고. 그러나 이 선언문은 그 대상인 프랑스에게 사실상 선전포고라는 오해를 사게 되어 오히려 전쟁 여론을 부채질하게 된다. 사실 '레오폴트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처음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신변과 전쟁 확대 가능성으로 인해 신중하게 나가려 했지만 아르투아 백작이 프랑스 침공해 달라고 졸라서 선언문 내는 것으로 퉁치려다가 결국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3.1.2.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왕국의 '입법의회' 전쟁 선포[편집]
결국, 안 그래도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뒤무리에 장군 앞으로 무수한 민원이 올라오게 되자, 당시 프랑스 왕국 '입법의회'는 1792년 4월 20일에 부쳐진 투표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뒤무리에 장군은 혁명의 첫 목표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의 저지대 지방은 원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영토였다. 그중 북부 7주는 80년간의 전쟁 끝에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남부' 10주는 스페인에게 굴복,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남았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되었고,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같은 지역이었던 저지대 지방이 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3.1.2.1. 당시 혁명군의 상태[편집]
그러나, 혁명으로 인해 군대는 지휘계통에 혼란이 생겨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거의 다 귀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 후 (구 체제를 따르는) 귀족이란 꼬리표가 붙은 다수의 장교들은 죄다 숙청당하거나 도망친 탓에 지휘할 사람이 텅 비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3][4] 완전히 제멋대로가 되어버렸고, 인재가 부족해서 제대로 지휘할 사람이 없자 부대의 전력이 유지되지 못하는 등의 역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이 집단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어떤 부대에서는 상관 살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5]
게다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트리어 선제후국의 실질적인 수도 코블렌츠[6]에 집결했고, 7월에 프랑스 본토로 침공을 시작,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성명[7][8]이란 걸 발표해서 프랑스 공화국을 "국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역도의 무리"로 규정, 전 유럽이 프랑스의 적이라고 허세를 부렸다 협박을 했다. 게다가 그 브라운슈바이크 성명에 쓰인 것은 "우리들은 왕정복고를 위해 신성한 의무를 다하려 출정한 군대이며, 만일 우리에게 대항한다면 그 어느 누구라도 군법에 회부해서 죄다 사형때리겠음"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망명간 귀족들이 콩데 공작의 지휘하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하자, 프랑스 공화국은 위기에 빠졌다.
3.1.2.2. 혁명정부의 군대 재조직[편집]
일이 이쯤되자, 혁명정부에서는 마치 신병을 붕어빵마냥 찍어낼 기세로 미친듯이 징집하기 시작했고, 부대를 새롭게 예편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타개될 기미가 안 보이는 데다 슬슬 국민들이 염증을 내기 시작했고, 자코뱅파와 같은 과격주의자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 시도했다.
그리고 그해 8월 10일, 시민들은 튈르리 궁으로 몰려가 루이 16세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의회로 도망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분노한 시민들에게 넘겨졌다(1792년 8월 10일 봉기).
3.1.2.3.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 승리[편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계속해서 진군을 해 왔고, 이대로 프랑스 공화국은 끝나나 싶었다. 그런데 9월 20일, 발미에서 뒤무리에와 켈레르만이 이끄는 혁명군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했다(발미 전투). 발미 전투에서 승리한 혁명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졌고, 한창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했다.
3.1.3.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 수립, '국민공회' 탄생[편집]
그리고 발미 전투에서 승리한 그날,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제1공화정이 수립되었다.[9]
3.1.3.1.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편집]
제1공화정은 왕정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유죄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3.1.3.2. 1793년, 대프랑스동맹 참여국의 증가[편집]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전 유럽을 충격과 놀라움에 빠트렸고, 이는 전 유럽으로 하여금 프랑스 공화국이 "국왕을 처형한 놈들의 나라"로 찍혀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는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그해 1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만 있던 대프랑스 동맹에 스페인이 새로 참가했다.[10]
2월 1일에 프랑스 공화국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했다.
3.1.3.3. 국민개병제 실시[편집]
그리고 전쟁에 대비하여 프랑스는 국가적 정책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 1793년 2월 30만 명 징병령을 발표하였고, 동년 7월에는 국가총동원령(Levée en Masse)을 발표, 18세부터 25세 사이의 모든 독신 남성을 마구잡이로 징병하면서 가용병력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신병 찍어내기가 정점을 찍었던 1794년 8월에는 병력이 150만 명에 달했다. 물론 실제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가용 병력의 절반 조금 넘는 8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혁명군은 늘어나는 군인의 수에 그 보급량이 한참 못 미치는 현상을 겪게 되었고, 혁명군은 결국 보급 방침을 현지에서 강제 징발하여 보급을 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3천만 명을 조금 넘긴 수치였는데, 산업 혁명으로 인한 근대화 및 행정체계의 체계화라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18세기 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80만 명이라는 숫자는 전근대 국가가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한계를 한참 뛰어넘은 미친 수치가 맞다.
3.1.3.4. 1793년, 전쟁 시작[편집]
1793년 플랑드르 전역이 시작되었으나, 혁명군은 생각지 못한 돌발상황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3.1.3.4.1. 1793년 5월 31일 이후, 지롱드파 도시들의 반란[편집]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가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아예 쓸어버리려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비교적 지롱드파가 많았던 도시인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3.1.3.4.2. 1793년 말, 툴롱 반란(나폴레옹의 등장)[편집]
그러던 와중에 툴롱의 왕당파가 이러한 틈을 비집고 다른 혁명파들을 죄다 쫓아내버리고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이자, 이것은 공화국에 있어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툴롱은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기지였는데, 그곳을 빼앗긴다는 의미는 사실상 제해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와 비슷했다.
결국 공안위원회에서는 라 발레트 두 바를 함락시킨 장 프랑수아 카르토와 장 프랑수아 코르누 드라푸아프(Jean François Cornu de La Poype)[11]를 사령관으로 해서 툴롱을 다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12] 그러나... 카르토는 군인이 아닌 캔버스와 붓만 잡던 화가였고, 그런 주제에 공동 사령관이었던 드라푸아프와는 전선의 지휘권을 두고 알력다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르토 같은 이가 군대의 고위장교로 있던 탓에 프랑스군은 툴롱에 주둔해 있던 대프랑스 동맹군보다 거의 두세 배나 많았음에도 절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13] 전과가 시원찮자, 11월 11일, 공안위원회에서는 카르토를 자르고 도페라는 이름의 장군을 보냈는데, 이 사람은 카르토만큼이나 군대와는 거리가 먼 의사 양반이었다(…). 아니 그뿐이면 모를까[14] 이 자가 피만 보면 식겁을 하는 피 공포증이 있다는 것.[15] 때마침 영국군의 산탄포가 미처 준비되지 못했을 때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돌격할 때에 의사 양반의 호위대가 영국군의 포격 한 발에 사람 좀 죽자 도페는 식겁하며 철수 명령을 내렸다.[16] 결국 잉여도페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그 대신에 뒤고미에 장군이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실전파였던 뒤고미에가 이끄는 혁명군은 12월 18일 결국 툴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그해 마지막에 군대는 더욱 증강되었고, 침략자를 격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는 한층 레벨을 올려서 더욱 더 많은 반혁명분자(라 쓰고 정적이라 읽는다)들을 색출, 대거 참살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3.1.3.5. 스페인 전역[편집]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숙련치가 거의 만렙을 찍고 있던 혁명군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세작전을 감행했다. 1794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령 바스크의 산 세바스티안을 접수했다.
3.1.3.6. 플랑드르 전역[편집]
플랑드르 전역에서는 플로이루스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벨기에와 라인란트를 떼어먹었다. 승세를 몰아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 피에몬테까지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3.1.3.7. 해상[편집]
해상에서, 프랑스는 카리브해의 식민지와 코르시카는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상실했으나 프랑스의 대서양 함대는 미국에서 오는 곡물 수송을 받는 해로는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3.1.4. 총재정부 체제[편집]
그 사이 국내적으로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 공포정치의 시대는 가고 5명의 총재들이 집권하는 총재정부 체제로 전환되었다. 자코뱅 지도부들과 친했던 나폴레옹은 일시적으로 감방행.
3.1.4.1. 플랑드르 전역: 1795년, 네덜란드 멸망[편집]
플랑드르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 공화국은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기습공격해 멸망시키고, 괴뢰정부인 바타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3.1.4.1.1. 1795년 4월 6일, 프로이센의 동맹 이탈[편집]
혁명군이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본 프로이센은 기겁했고, 때마침 발생한 폴란드 분할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프랑스 공화국과 1795년 4월 6일 바젤 평화조약을 맺고 먼저 리타이어 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프로이센은 라인 강 서쪽의 모든 독일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점령한 라인 강 동쪽의 프로이센 영토를 돌려받았으며 프랑스로부터 영국이 동군연합을 겸해왔던 하노버 선제후국의 병합을 인정받았다.
3.1.4.2. 스페인 침공[편집]
혁명군은 스페인령 카탈루냐로 쳐들어가 빌바오와 비토리아를 뜯어갔고, 카스티야까지 진군했다.
3.1.4.2.1. 1795년 7월 10일, 스페인의 동맹 이탈[편집]
역시나 놀란 스페인도 그해 7월 10일, 산토도밍고[17]를 떼어주고 리타이어했다. 그러나 그 대신 프랑스 공화국은 스페인 왕국의 원래 영토였던 땅들을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생도밍그는 유럽 설탕수요의 과반을 생산하며 프랑스 세입의 30%(!)를 초과하는 초호화 꿀땅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산토도밍고에선 반란이 일어나고 파견된 원정군은 괴멸하게 된다(...).
3.1.4.3. 피에몬테 공격[편집]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서 싸웠던 혁명군 부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알프스 방면군과 연합, 피에몬테를 공격하러 갔다.
3.1.5. 왕당파의 반란[편집]
3.1.5.1. 방데 전쟁[편집]
그러는 사이, '소 피트' 총리의 영국은 방데의 왕당파 반란군[18]을 움직여 퀴베론에 상륙했다.
3.1.5.2. 파리(나폴레옹(27세)의 부활)[편집]
파리에서는 왕당파 군인들이 공화국 정부를 뒤엎으려고 했지만, 총재정부에 의해 파리 치안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이 포도탄을 이용한 무자비한 진압을 하자 결국 실패했다.
3.1.6. 서기 1795년[편집]
3.1.6.1. 라인 전선[편집]
라인 전선에서는 샤를 피슈그뤼[19] 장군이 혁명군을 배신하고 추방당한 왕당파 당원들과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 후 피슈그뤼는 당장 만하임과 마인츠에서 강제적으로 철수할 것을 군대에게 명령했다. 그 결과 프랑스의 영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3.1.6.2. 이탈리아 전선[편집]
그런 반면에 북이탈리아의 혁명군은 로아노 전투에서 승리했고, 얼마 안있어 맺어진 조약으로 북이탈리아의 영유권을 얻어냈다.
3.1.7. 서기 1796년[편집]
3.1.7.1. 라인군과 이탈리아 방면군을 합쳐 빈 공격 작전 개시[편집]
1796년, 혁명군은 대담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주르당과 모로의 라인군과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움직여, 티롤로 진주시켜 빈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주르당과 모로의 라인군은 독일 남부를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고, 주르당과 모로는 목표한 지점에 거의 도달해 가고 있었다. 특히 모로가 이끄는 중앙군은 바이에른을 지나 9월에 목적지인 티롤에 거의 도달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주르당은 카를 대공과 조우하여 신나게 털린 다음 쫓겨나고 있었다.
이어서 카를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은 마리 모로의 군대까지 덮쳤는데, 이때 카를은 프랑스군의 후위를 맡은 '미셸 드 보퓌' 장군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모로의 적절한 대처로 프랑스군은 추격당하는 입장이었음에도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았다. 실제로 사상자 숫자는 비슷했으며 카를 역시 휘하의 장군 한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3.1.7.2. 이탈리아 전선(나폴레옹의 활약)[편집]
주르당이 개털리고 모로가 퇴각하고 있을 당시, 드디어 혁명전쟁에 참여한 나폴레옹(27세)은 이탈리아에서 목적을 이루고 있었다.
3.1.7.2.1. 4월 23일, 사르데냐 왕국[편집]
우선 사르데냐 왕국과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합류하지 못하게 갈라놓았고, 점점 강도를 높히면서 사르데냐 왕국을 압박한 결과 만토바를 공격하고 있을때 쯤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로부터 평화조약을 맺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케라스코 협정으로 사보이아와 니차를 내주고 프랑스군의 피에몬테 주둔을 허용하며 사르데냐 왕국은 리타이어 했다.
3.1.7.2.2. 만토바[편집]
그리고 만토바를 공략하던 중인 나폴레옹을 찌르기 위해 뷔름저 공작의 오스트리아군(1차 구원군)이 후방을 급습하자 나폴레옹은 만토바에 있던 공성용포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만토바를 포위해제한다. 되살아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른 우회기동을 통해 뷔름저공작 군대의 후미를 공격하였고 뷔름저는 비어있는 만토바 입구로 재빠르게 도망쳤고 일단 만토바 요새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주르당과 모로의 삽질로 인해 라인강방면군은 전멸당했고 라인강방면군 방어에 치중했던 카를 대공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급히 군대를 틀어 뷔름저가 갇혀있던 이탈리아 만토바를 구원하기로 결정했다.(2차구원군) 순식간에 나폴레옹은 3만의 군대로 7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해야할 위기에 쳐해있었고 나폴레옹은 최초로 야전에서 패퇴를 거듭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적의 보급을 끊어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굶겨죽이려는 발상을 생각해냈고 또다시 한번 본대를 아르콜로 보냈다. 당시 아르콜은 오스트리아의 식량창고가 있던 곳으로 3000의 수비대가 주둔 중이었는데 나폴레옹은 기병대를 이용 우회기동을 통해 다리를 돌파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번 식량문제 때문에 주춤하고 티롤에서 군대를 모집 중이었던 알빈치장군을 보내 만토바를 구원하려 하였으나(3차구원군) 이미 식량문제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의 1, 2차구원군은 전투에서 비협조적이었고 나폴레옹은 손쉽게 리볼리 전투에서 알빈치의 군대를 격파. 이후 오스트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장악하고 포위 중인 만토바에 총공세를 가한다.
3.1.7.3. 아일랜드 원정[편집]
3.1.7.3.1. 오슈의 원정군: 실패[편집]
그해에 방데의 왕당파 반란군은 오슈에 의해 완전히 박살났고, 한동안은 조용했다. 그후 오슈는 아일랜드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원정을 나갔지만 보란듯이 영국 해군에게 무참히 박살나고 끝났다. 오슈는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다.
3.1.7.3.2. 1797년 2월, 생 빈센트 곶 해전: 패배[편집]
1797년 2월 브레스트의 프랑스 해군과 합류하려는 호세 데 코르도바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 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존 저비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출진, 생빈센트 곶 해전이 벌어졌고, 역시나 영국 해군은 승리했다.
3.1.7.4. 빈 방면[편집]
해상의 전투와는 상관없이, 육상의 전투는 선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미친듯이 만토바를 구원하러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차례차례 격파하고 만토바의 오스트리아군 1만 8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 입성했으며, 오스트리아를 안드로메다 관광 태울 기세로 티롤리아로 진군, 빈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군에 맞서러 나갔는데, 이 상황보다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4월에 모로와 오슈의 혁명군이 오스트리아를 샌드위치로 만들기 위해 다시 한번 진군하고 있다는 것.
3.1.8. 1797년 10월 17일, 평화조약[편집]
오스트리아는 결국 이 이상은 털리고 싶지 않았는지, 나폴레옹에게 평화 조약을 맺자고 GG쳤고, 결국 1797년 10월 17일 캄포포르미오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 강 서안의 모든 제국 영토를 할양, 리타이어하면서 일단 유럽전선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은 끝났다. 대신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합병하여 체면은 지켰다.
3.1.9. 서기 1798년[편집]
3.1.9.1. 이집트 전선(1798 ~ 1801)[편집]
1798년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점유하던 영국 해군과 인도에서의 영국의 입지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침공하면서, 얼떨결에 오스만 제국도 대프랑스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의문의 선빵을 얻어맞고 어이없어했다.
나폴레옹은 몇 번의 승리를 거두나 전투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영국의 견제가 심해지고 본국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때문에 전선을 이탈하여 본국으로 돌아간다.[20]
자세한 전개는 이집트 원정을 참조할 것.
3.1.9.2. 스위스 전선[편집]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외에도, 프랑스는 1798년 3월 25일, 스위스를 침공, 말 잘듣는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웠다.
3.1.9.3. 아일랜드 전선, '코노트 공화국'[편집]
비밀리에 아일랜드를 돕기 위해 아일랜드 코노트에 혁명군을 상륙시켰다. 장 조제프 아마블 욍베르가 이끄는 혁명군 1천 명은 코노트의 북서부에 있는 킬쿰민에 상륙했고, 다른 아일랜드 반란군 5천 명과 연합했다.
캐슬바 전투에서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제라드 레이크가 이끄는 영국군 6천 명과 대치하게 된 욍베르는 15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영국군 300명 가까이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코노트 공화국'을 세우게 되나, 9월 8일에 롱포드 주에서 일어난 발리나묵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욍베르는 미국으로 도망쳤고, 코노트 공화국은 세워진 지 약 1달 만에 멸망했다.
3.1.9.4. 교황령 폐지, 로마 공화국 수립[편집]
자세한 내용은 로마 공화국(프랑스 제1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탈리아 반도 방면의 혁명군은 로마로 쳐들어가서 교황 비오 6세가 통치하던 교황령을 폐지하고 로마 공화국을 세웠다.
3.2.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9~1802)[편집]
제2차 이탈리아 전쟁 항목도 참조.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전쟁 피로가 누적되자 스웨덴의 중재 하에 프랑스와 동맹군 간의 강화 회담인 제2차 라슈타트 회의가 열렸으나 아직 멀쩡하던 영국, 여기에 회의를 질질 끄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책략까지 더해지면서 대프랑스 동맹군은 강화를 체결하기도 전에 동맹을 재결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1799년 영국은 다시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이고, 아예 프랑스를 제대로 밟아주기 위해 러시아 제국까지 끌어들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지만 8월이 되도록 별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탈출, 프랑스로 귀환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영국은 빨리 러시아를 불러 네덜란드 침공을 감행할 것을 요청, 요크 공작의 지휘하에 영국-러시아 연합군은 홀란드의 북쪽 끝단에 상륙했다.
그러자 놀란 프랑스 정부에서는 기욤 마리 안 브륀을 파견, 네덜란드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혁명군과 바타비아 공화국군은 브륀의 지휘하에 방어전을 수행했고, 10월 6일에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영국-러시아 연합군을 쳐바르면서 방어전에서 승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해 1월 혁명군의 공세가 펼쳐졌고, 혁명군은 나폴리 왕국군을 추격해서 끝내 수도 나폴리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방면군을 지휘하던 셰레는 팔 크라이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GG치고는 지휘권을 장 빅토르 마리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에게 넘겼다.[21] 그러나 모로도 전황을 타개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여서 카사노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군대에 처절히 발렸고, 프랑스는 북이탈리아의 영토를 점점 상실하고 있었다. 후임자로 예정되어있던 주베르(Barthélemy Catherine Joubert) 역시 노비 전투에서 전사해버려 모로는 제노바로 후퇴한 뒤 지휘권을 샹피오네(Jean-Étienne Championnet)장군에게 넘겨 주었다. 6월에는 수보로프가 마크도날이 이끄는 혁명군을 트레비아에서 발라줬고, 도망가는 혁명군을 쫓아 알프스와 제노바로 각각 추격을 개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 여론은 총재 정부의 무능을 힐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한창 승세를 타고 혁명군을 버로우시키면서 진군하던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7만여 명의 혁명군에게 분노의 고자킥을 맞고 제대로 작살났다. 제1차 취리히 전투 때에는 마세나가 수적 열세로 패배하긴 했지만 카를 대공의 발을 묶는데 성공했었고 또한 사상자 숫자조차 수적 우세를 겸했던 카를이 더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전쟁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마세나가 수적 우세로 찾아오니 버틸 수가 없었던 것. 게다가 이때 카를 대공은 보급 문제로 잠시 아린 강 방면까지 이탈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심하게 데인 탓인지 러시아는 점점 소극적 자세로 나가다가 1799년 결국 2차 대불동맹에서 리타이어했다. 결국 전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마지막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떠나서 프랑스로 귀환, 자기를 아예 떠나보내려 했던 총재 정부를 싹 갈아버리고 3인 통령의 통령 정부를 수립, 자기가 제1통령이 되었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한편 나폴레옹이 떠나간 이집트에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사령관으로 임명된 장 밥티스트 클레베르가 이 상태로는 원정을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프랑스로의 무사 귀환을 위해 영국 함대 소속의 시드니 스미스와 엘 아리시에서 쇼부를 쳐서 합의를 보지만 케이스 제독이 제대로 배신때리고 엿을 선물하자 빡친 나머지 진군해 오는 6만의 오스만군을 상대로 헬레오폴리스에서 개전, 오스만군 3천 명을 전사시키고 30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저항하는 카이로를 재점령했고 잠시 업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후 시리아 출신 대학생 솔레이만 엘 할라비에게 암살당했고[22], 이후 자크 프랑수아 므누[23]가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잡았으나 무능했던 그는 제2차 아부키르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지는 알렉산드리아 공방전에서 병사들의 대부분이 병에 걸려 더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결국 1801년에 항복하고 영국 함대에 실려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모로에게 독일 공략을 지시했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디종에서 스위스를 지나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을 외치며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에 도착했다. 상황을 판단한 오스트리아군은 즉각 포위망을 뚫기 위해 군대를 집결, 마렝고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드제의 별동대가 다시 돌아와 스스로 오스트리아군 중앙에 닥돌하게 되자 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은 알아서 괴멸했다. 그러나 드제는 여기서 전사했다(마렝고 전투).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에서 다시 프랑스의 입지를 넓히고 있을 무렵, 모로는 바이에른을 침공,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호엔린덴 전투.1800) 그대로 빈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화평 제의를 받아냈다.
1801년 2월 9일 뤼네빌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루드비히 폰 코벤츨 백작의 서명으로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었고, 오스트리아가 리타이어하여 2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가 (기존의 정부를 갈아엎고 새로 만든) 새로운 공화정 체제의 국가들(바타비아 공화국(네덜란드), 헬베티아 공화국(스위스), 치살피나 공화국(북이탈리아), 리구레 공화국(제노바))에 대한 승인을 재확인 받았고, 프랑스의 라인란트 병합을 다시 한번 재확인 받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가 갖고있던 토스카나 대공국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었고, 이탈리아에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여러모로 오스트리아에게 고단한 해였다.
남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 또한 1801년 프랑스와 피렌체 조약을 맺어 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대프랑스 동맹 회원들이 리타이어했지만 영국은 아직도 프랑스를 도발하고 있었다. 영국은 영국의 몰타 섬 점령에 항의하기 위해 결성한 무장 중립 동맹 가맹국인 프로이센, 덴마크, 러시아, 스웨덴이 아니꼬왔고, 결국 호레이쇼 넬슨을 시켜서 덴마크 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 덴마크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코펜하겐 해전).
1802년 이도 저도 뜻대로 되지 않고 대프랑스 주전파였던 피트가 총리 자리에서 퇴진하고 후임으로 대프랑스 주화파인 애딩턴이 임명되면서 영국은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었고, 이로서 길고 길었던 혁명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미앵 조약의 결과로, 영국은 바타비아 공화국에게 남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돌려줬고, 서인도 제도 중 네덜란드 영토인 섬들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후퇴하게 되었지만, 대신 트리니다드, 토바고, 실론을 양도받았고, 몰타와 고조, 코미노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보호령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결과,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하게 되었고, 혁명전쟁 기간 동안 보여준 프랑스 혁명군의 무지막지한 전투력은 다른 나라들에게 프랑스는 절대 깔봐선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크게 어필했다. 프랑스는 공화국 체제를 인정받았으며 왕정 시절부터 그렇게 부르짖던 자연국경을 달성해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유럽 곳곳에 동맹국 및 위성국들을 만들어 나름대로 세력도 두었다. 하지만 대프랑스 동맹국들은 프랑스를 여전히 꺾고 싶어 했고 프랑스와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프랑스 아래에 꿇리고 싶어했으니 두 세력의 충돌은 곧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4. 관련 국가 및 인물들[편집]
프랑스 공화국 및 기타 연합, 속국
프랑스 혁명정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26인 원수들[24] 대부분
라자르 카르노
라자르 오슈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샤를 빅토르 에마뉘엘 르클레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
장 빅토르 마리 모로
프랑수아 세브린 마르소 데그라비에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장 에티엔 샹피오네
아일랜드 연합[25]
버게날 하비
시어발드 울프 톤
폴란드 군단[26]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
자매 공화국
바타비아 공화국
헬베티아 공화국
대프랑스 동맹[27]
프랑스 왕당파
콩드 대공 루이 조제프 부르봉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뷔름저 백작
미하엘 프리드리히 베네딕트 폰 멜라스 남작
요제프 알빈치
페터 비투스 콰스다노비치
프로이센 왕국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호엔로에 대공 프리드리히 루이
영국
요크와 알바니 공작 프레드릭 왕자[28]
랠프 애버크롬비 경
윌리엄 시드니 스미스 경
호레이쇼 넬슨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코르사코프
5. 둘러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