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보물
최명애
서랍 속에서 두툼한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 속에는 젊음의 열정과 비전을 품은 22살 햇병아리 교사가 있었다. 솔직하고 진심 어린 내용이 담긴 노트가 사십 년도 더 지난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갔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눈발이 흩날리던 날, 어머니와 함께 첫 부임지로 갔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만 들어오고 나가는 영천시의 오지였다, 비포장 길을 20분 정도 달려와서 개울을 건너 아담한 학교가 보였다. 반듯하고 널찍한 운동장, 나지막한 교실 건물과 멀리 산이 둘러 있어 아늑한 곳이었다.
머물러야 할 사택은 학교 건물 뒤에 있었는데, 허름한 일자형의 방 4칸이 나란히 있는 시멘트 집이었다. 방문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방음이 안 되어 옆방의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시골 생활도 처음이고 집을 떠나 혼자 있는 것도 처음이라 두려움이 가득했다. 밤에는 문의 위쪽, 아래쪽 모두 고리를 걸었다. 어머니도 걱정이 되어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전교생이 100명도 안 되는 시골 학교였다. 눈치도 없고 철도 없는 햇병아리 교사가 1학년 31명의 담임이 되었다.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누런 콧물을 연신 들이마시고 있는 아이들의 손등은 다 터지고 갈라져 있었지만, 순수하고 또록또록한 눈망울이 나를 설레게 했다. 대구 본가에 못 가는 주말에는 아이들과 나물을 뜯고, 학부모의 초대로 따뜻한 온돌방에서 저녁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보냈다.
22살 신규 여교사를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좋아하였다. 과수원을 지나가다 동네 분들을 만나면 사과를 한 소쿠리씩 담아 주셨다. 도시에서만 자랐던 나는 처음 하는 시골 생활이 지루하고 힘들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정다운 학부모 덕분에 즐거움을 찾아가며 잘 참고 견뎌 냈다. 2년 뒤 다른 학교로 전근했다.
그러구러 30년이 지난 즈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A입니다. 잘 계셨어요?” 너무 반가웠다. ‘스승 찾기’를 통해서 근무지를 알았다며 동창회에 초대하였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지적으로 생긴 B가 눈에 띈다. 반장으로 듬직하고 착실하게 생활하였는데 노총각이었다. 결혼할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가 안 계신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내가 중매를 들어, 지금은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키가 작고 귀공자 얼굴의 C는 1학년 때 받았던 사랑을 늘 회상하며 고마워한다고 했다. 다리를 다쳤을 때 수업을 마치고 나면 집까지 업어다 데려다준 일, 이가 빠졌을 때 “까치야~~헌 이 가져가고 새 이를 다오.” 노래하며 빠진 이를 둘이 지붕에 던졌던 일 같은 소소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처음으로 만난 담임선생님이 어린 마음을 알아주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는 누나들이 많았고 막내로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는 소년가장이 되어 버렸다. 갖은 고생으로 방황을 많이 하였지만, 지금은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예쁜 브로치를 내 가슴에 달아주며 “선생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라며 밝게 웃었다.
D가 옆으로 살짝 오더니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바지를 제가 훔쳤어요. 바지값은 제가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친구들이 모두 놀랐다. 나는 처음으로 맞는 운동회에 입으려고 마음에 드는 바지를 장만했었다. 여교사가 혼자라 무용을 두 가지나 진행하느라 종일 운동장에서 뛰어다녔다. 운동회를 마치고 바지를 빨아 줄에 걸어두었는데, 다음날 보니 없어졌다. 백화점에서 신경 써서 골라서 산 바지였다. 아까웠지만 물어볼 곳도 없고 찾을 방법이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넘어갔었다.
워낙에 개구쟁이 아이였던 D의 집은 학교 사택 바로 옆이었다. 1학년 아이 눈에는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담임선생님이 입고 있던 바지가 멋있었을까. 아니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일까. 지금 생각하니 내 옷차림이 시골 학교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해 불러온 황당한 사건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의 순수함은 힘든 교직 생활을 견디게 하는 비타민이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개구쟁이들의 부대낌 속에서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어느덧 세월의 훈장을 달고 칠순을 향해 달리고 있다.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늘어나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어 가지만, 내 인생에 있어 제자들과 나눈 좋은 추억이 있다는 것은 내 삶의 보물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