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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촉.오 3국 사이의 인구의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는데, 이것은 물론 당시에는 보유하고 있는 토지와 인구수가 곧장 동원병력의 규모에 연관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세간에 각종 삼국지 커뮤니티나 삼국지팬들 사이에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유포되고 있는 수치가 바로;
* 위는 66만호(인구 440만)
* 오는 52만호(230만)
* 촉은 28만호(94만)
...라는건데, 문제는 각종 토론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기에 바쁜 나머지 애초에 그 진실성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어느새 "삼국지팬이면 누구나 아는 상식"으로 일종의 '절대적 진실'로 통용되어버리게 되었다는거죠.
애초에 정사의 이 수치를 누가 언제 어떻게 처음 인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인구 수, 특히 호구수를 기반으로 하는 인구 수는 객관적인 전력의 비교를 함에 있어서 하나의 유용한 출발점이지 그 자체로 완결된 비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간의 사람들은 단순히 수치 하나 인용해놓은 것 갖고;
"봐라, 위는 440만명, 오는 230만명, 촉은 94만명이다. 그러니 촉은 언제나 10만 병력이 한계이다"
.. 라고 쉽게 단정을 해버린다는겁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호구수를 통해 산출되는 인구는 평화시, 혹은 특별한 난리나 문제가 없이 이어지는 시절에 꽤 정확한 수치를 기대할 수 있으나, 전란기에는 어느정도 현실을 감안하여 바라봐야 합니다. 그 수치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는 얘기에요.
호구조사는 기본적으로 각 현, 읍 말단에서 시작한 조사가 계속해서 상부로 올라가면서 종합한 통계에 기반합니다. 그 과정이 평안하고 순탄하다면 비교적 정확한 수치에 근접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도미노 무너지듯 불안정한 수치가 기록될 수 밖에 없어요. 전란기에 백성들이 취하는 가장 기본적인 호신책은 일단 도망가고 보는 것이고, 안심할 수 있다고 믿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생존의 비책입니다. 당연히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면 실제 인구수의 상당수가 호구수에서 누락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호구조사는 국가의 통치를 위해 지극히 중요한 사업으로써 유방이 함양을 점령했을 때 소하가 어떤 호화로운 재보보다도 귀중한 보물로 여겼던 것이 백성들의 호적원본이었던거죠.
가장 근본적인 의심은, CE 157년의 호구집계에서 5천 6백만명(통사간론)을 넘어가는 한나라 전체 인구가 불과 70년 정도(촉한수립인 221년을 기준으로 삼을 때)의 전란을 통해 764만명 (위 440만명 + 오 230만명 + 촉 94만명) 으로 줄어들었다는 대목에서 출발합니다. 한마디로, 100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인구의 86.4%가 사라져버려 환제 시기 수준에 비해 13.6% 라는건데, 이건 무슨 고대 중국땅에 핵폭탄이 한 10방 쯤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수치입니다.
중국보다도 훨씬 적은 인구, 열악한 과학/의학수준, 끔찍한 위생환경 속에서 발생한 중세의 공기전염성 흑사병 조차도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창궐하여 유럽인구의 1/3 정도를 앗아간 대참사로 평가되는데, 아무리 혼란한 난세라고 해도 순수히 전란으로 인해 인구 80% 넘게 절멸했다는 것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수치라는거죠. 전란으로 인구 80%가 줄어든다면 그것은 대참사 수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아마겟돈 수준입니다.
즉, 80%의 인구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80%의 호구수가 조사에서 누락된겁니다.
상당한 인구가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실제로 죽어버림으로써 사라진 것도 사실이겠지만, 70년의 세월 동안 각 지역을 지배하는 군벌들이 끊임없이 교체되고 세력판도가 변화해가는 수모를 겪으면서 그 때 마다 군역에 끌려나가고 침략과 약탈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백성들이 호구수에 기록되는 것을 피해 도망쳐다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백업 디스크나 전산관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호구수를 조사하여 기록해둔 뒤에 해당관청에 보관해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민란이나 폭동을 일으킬때면 가장 먼저 습격하는 곳이 관아이고, 특히 가렴주구하는 악리나 폭신들이 있는 지역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호적과 /노비명부, 관아에 진 빚 등을 기록한 문서를 찾아내어 불태우는게 백성들의 제1순위 행위입니다. 특히, 그러한 세태에 피해를 받던 숱한 백성들이 흘러들어 세를 불린 황건적의 난이 습격한 지역에서도 예외없이 관아에 보관된 호적들이 제1타겟이었을 것이지요. 황건적이 모든 주요 도시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휩쓴 마을과 촌락들이 상당수이고, 결국 그 작은 촌락 단위에서부터 호구조사는 시작되는 만큼 그 밑뿌리가 사라지면 이미 인구수에 대해 객관적 통계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절망적이 되는거죠.
게다가, 전란이 끝나도 상당시간 동안 호구수가 복원이 안되는 것이 멋대로 촌락을 이탈하여 군역에서 피해다닌 것은 중죄에 해당했기 때문에 전란이 끝나도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도 많고, 상부와 하부의 호구수 기록 내용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다시 조사를 해야 했고, 애초에 조사가 안되는 지역들도 있었다는거죠.
이쯤되면 정말로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든 것이 호구수입니다. 정사의 기록을 출발점으로 한다고 해도 그 실제 양을 추론해내는 것은 그 수치를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가 없는 것임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촉서 후주전에 기록된 인구수치는 촉기를 인용한 것인데, 이것은 촉 멸망 당시의 국력입니다. 전성기의 수치가 아니죠. 호구수 28만호에 남녀인구 94만명, 갑옷입은 병사10만2천명 관리4만명이라는 이 수치가 멸망 당시의 수치라면, 전성기 때에는 그 보다는 꽤 많은 동원력을 발휘했으리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유비의 전성기는 219년, 유비의 사망은 223년, 제갈량의 사망은 234년, 촉의 멸망은 263년, 오의 멸망과 삼국통일은 280년입니다. 촉한의 수립에서부터 따진다면 221년에서 234년까지 제갈량은 13년의 기간 동안 5차례의 전투를 치뤘고, 234년에서 263년까지 29년 동안의 강유는 9차례 전투를 치뤘습니다. 결국 42년 동안 14번이니까 평균 3년에 한번 꼴로 밑준비를 갖추고 관중공략에 나섰다는건데 이 정도면 국력이 피폐해질 만큼 무리한 출정이라고 누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피폐해진 상황에서 나라 멸망의 위태로움을 느껴 단 94만명의 인구로 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갑사 10만명을 갖고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면, 비교적이 국력이 성했을 때에는 얼마나 더 동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정확하게 계산해낼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적어도 병사의 수를 더 동원할 수 있었거나, 그게 아니면 10만 병력 정도를 무리하지 않고 유지할 정도의 여력은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였으리라고 추측은 가능합니다.
반면, 촉한이 멸망한 263년에서부터 17년의 세월을 더 버틴 오의 경우에는 그 동안 위와 큰 전쟁 없이 대치하고 있었죠. 촉한의 수립인 221년에서부터 따진다면 오는 59년 동안 몇 차례의 큰 전투를 제외하면 나머지 기간동안은 비교적 큰 전투 없이 지탱해왔으니 오서 손호전의 호구수52만에 병사23만명, 남녀인구 230만명이라는 기록을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오 땅이 촉 땅 보다 넓고 풍요로운 것은 확실하지만, 28만호에 94만명 남짓한 인구와 52만에 230만명이라는 인구의 차이는 너무 큽니다. 큰 전란 없이 지탱해온 오가 마지막에 진에 넘어가는 시점에서 230만 인구와, 한 세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3년에 한번 꼴로 꼬박꼬박 쳐들어가서 싸운 촉의 인구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잡힌 통계라는겁니다. 그 차이를 의식해야겠죠.
결론적으로,
* 위는 66만호(인구 440만)
* 오는 52만호(230만)
* 촉은 28만호(94만)
.. 이 통계는 유용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 불과 70년(촉한수립)에서 100년(촉멸망) 정도 사이에 5천 6백만 인구가 700만 순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난세임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 따라서, 각국의 인구수는 호구조사에서 누락되어 있는 인구를 감안하지 않은 공식적 수치에 불과하고, 그로 인해 산출되는 병력은 제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공식적 병력수이지, 다른 경로를 통해, 혹은 상황에 따라 달리 동원될 수 있는 비공식적 병력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 또, 촉의 28만호 94만명 10만 병력은 수십년간 격한 전쟁을 치룬 이후에 남게된 멸망 당시의 국력인 반면, 오의 52만호 230만명 23만 병력은 오랜 세월 안정된 상태에 있던 오의 멸망 당시의 국력입니다. 그 둘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 따라서, 오가 전반적으로 촉에 비해 우세한 국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2:1까지의 차이가 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차례의 정벌전을 배제하고 촉땅에서 원래 부양 가능했을 인구와 병력규모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초기 조건은 촉이 오에 조금 뒤지는 정도였지 2:1까지의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 즉, 위에 정사의 통계만을 놓고 사람들은 위-오-촉의 국력비를 7 : 2 : 1 로 잡는데, 이 수치로는 솔직히 촉오의 동맹이 의미가 없는 수치입니다. 이미 혼자서도 촉오 동맹의 두 배를 넘는 국력을 지니고 있는 위가 어째서 그렇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명백히 실제의 비율이 7 : 2 : 1 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앞서 쭈욱 설명한대로 통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진 상황을 함께 종합하여 논리적으로 추론한다면, 세간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국력비는 7 : 2 : 1 이 아니라 실제로는 6 : 2 : 2 였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와 촉, 혹은 위와 오의 국력비는 6 : 2 로 명백히 위가 압도적이지만, 촉오의 동맹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6 : 4의 비율이 됩니다. 이 정도 되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죠. 7 : 3 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 종합적으로 생각한다면, 오늘날 삼국지 커뮤니티 등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병력동원 수치는 한마디로 행간을 읽지 않고 표면적인 수치로만 간단히 계산해낸 결과라는 겁니다. 나관중의 연의에서처럼 수십만, 백만 단위로 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었음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수비군을 제외한 촉의 가용병력이 비교적 그 세력이 건재한 시절에도 5만 내외였다는 것은 치밀하지 못한 분석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사에 제시된 수치 하나만 갖고 전투에서 동원될 수 있는 삼국의 병력규모를 쉽게 추론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내서는 안될 일이라는거죠)
- 끝 -
첫댓글 후한서에 나온대로면 익주의 인구가 700만이 넘었다더군요.
사실 너무 어이없는게 의예계열에 종사하는 누구누구의 말을 빌리자면 그시대에 중국인구가 그렇게 많을수가 없다던데.... 그 호구조사 정말 뻥이 아닌가 너무 의심스럽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로마제국의 인구가 6천만명이었다니 뭐 뻥까지는 아니겠죠. 아니면 둘다 잘못된 건가???
그나저나 이 토론에 카페에서 활동하는 분들은 죄다 달라붙고 계시는군요. 역시 삼국지입니다. (쵝오!)
듣기로는 촉내에 부곡민 숫자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애들은 호족 밑에 딸린 애들로 납세등의 의무가 전혀 없었다고 하네요. 밥은 또 밥대로 먹구요-_-; 부곡민의 숫자가 기록이 안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따른 인구의 차에서도 보이듯이 당시는 엄청난 전란기였고 대대로 일구어온 농토를 잃어버린 농민들 대부분이 부곡민이 되어 인구조사에서 제외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비전이였던가...거기서 조비가 후한때 그렇게 많던 인구가 지금은 반도 남지 않았다고 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익주 한주에...700만명..그럼.. 위나라에는..기주, 병주, 예주, 사주, 연주, 옹주, 양주, 서주, 청주, 유주, 형북.. 헉...대충 7000만...게다가 황하 일대의 땅은 기름지니까 익주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겠죠. 오나라가 양주하고 형남..1300만 정도. 그 당시 1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중국에 있었다니. 하긴, 인구700만이면...삼국시대가 전란의 극초반인데 5호16국 시대는 어떻게 넘겼으려나...재밌네요
근데 그 당시 생산력으로 700만명을 어떻게 먹여살렸을지...궁금해지네요. 당시에 1년 3모작 4모작을 하던 시대도 아니고...그렇다고 모내기 농사를 하던 때도 아니고...촉 땅 전체가 비옥한 토지도 아닐테고, 지금이야 생산력이 좋다지만 그 때는 개발도 잘 안되었을텐데...기껏해야 옥수수도 없어서 조나 밀 농사해서 먹고 살아야되는 시댄데, 혹시 그렇다면 촉은 기아에 허덕이다가 모두 아사했다는 웃지 못할 결론이 나온다는...이상한 결론이...에구 죄송합니다.. 그 당시 생산력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