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동물 인형 로봇의 형태를 하고 내 집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나와 직접 교류한다면 어떨까? 내가 팔로하는 사람의 일상을 내 집에서 모니터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초연결’ 시대에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관계 맺기의 본질을 서늘하고 섬뜩한 상상으로 통찰한 소설 『리틀 아이즈』가 창비에서 나왔다. 2020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책 100권’에 꼽힌 아르헨티나 작가 사만타 슈웨블린의 최근작이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오분 뒤”(NPR)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스마트폰 보급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전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되고 팬데믹으로 인한 이동 및 대면 모임 제한 등으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급격하게 증대된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타인의 삶 속에서 익명의 존재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털북숭이 동물 인형 로봇이 바꿔놓은 세계의 일상
두더지, 토끼, 까마귀, 판다, 용, 부엉이… 각기 다른 동물 인형 모습을 한 반려로봇 ‘켄투키’가 전세계 사용자들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다. 켄투키의 특징은, 그것을 직접 구입해서 ‘소유하는’ 사람과 온라인으로 연결 암호 카드를 구입한 뒤 제어프로그램을 통해 ‘조종하는’ 사람이 다르며 서로가 서로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 모든 매칭은 서버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며, 하나의 켄투키-암호 카드로 단 한번의 연결만 할 수 있다. 이 ‘소유자’와 ‘사용자’(조종자)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달라진다. 때로는 행운으로, 때로는 악몽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지구 반대편 홍콩으로 일하러 가서는 연락조차 뜸해 적적하게 지내던 노년의 페루 여자 에밀리아는 독일에 사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 에바의 삶을 켄투키-토끼를 통해 동경의 눈으로 지켜보며 애정을 갈구한다. 과테말라 안티과에 사는 소년 마르빈은 노르웨이의 어느 상점 쇼윈도에 갇혀 있는 켄투키-용을 조종해 얼마 전 돌아가신 엄마가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던 눈을 찾아 험난한 모험에 나선다. 수십대의 태블릿 컴퓨터와 연결 암호 카드를 사들여 세계 각지의 켄투키들을 관리하면서, 특정한 조건의 켄투키를 조종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웃돈을 얹어 연결 회선을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는 크로아티아 청년 그리고르는 어느날 한 켄투키를 통해 베네수엘라 소녀가 브라질의 외딴 마을에 납치되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직원인 니콜리나와 함께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애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예술가’인 남자친구와 함께 멕시코 오악사카의 예술가 공동주택에 머물던 알리나는 무료함을 이기고자 켄투키-까마귀를 구입하지만 점차 히스테리에 사로잡힌다. 이탈리아 움베르티데에 사는 이혼남 엔초는 아들이 켄투키-두더지의 사용자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에도 켄투키에 대한 애착을 쉽게 끊어내지 못한다. 이렇게 주요 인물 10여명의 이야기와 함께 중간중간 짤막하고 강렬한 일화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진다. 소유자가 죽자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선택하는 켄투키, 자신이 조종하는 켄투키가 화려한 콘서트 현장에서 청중에 의해 하늘 높이 던져지다 땅으로 추락해 연결이 끊긴 뒤 폭발음과 총성이 잦아든 시에라리온의 난민 캠프 막사 안의 현실로 돌아오는 사용자의 삽화 등은 정서적 충격과 함께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공포야말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내재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감정이라고 본다. 전작 『피버 드림』에서 서로 원하는 답이 다른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만으로 팽팽한 긴장과 불안을 자아내며 독특하고 매력적인 ‘뉘앙스의 공포’를 보여준 그는 『리틀 아이즈』에서 또 한번 자신의 독창적인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피버 드림』이 대화체 소설이라는 형식적 장치를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어냈다면, 『리틀 아이즈』는 주요 소재인 켄투키에게 몇가지 영리한 장치 혹은 ‘제약’을 부여함으로써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첫번째 장치는 켄투키의 눈이 카메라라는 것이다. 사용자는 켄투키의 눈을 통해 소유자와 그가 생활하는 공간을 엿볼 수 있지만, 소유자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가 선의를 가진 좋은 친구일지, 악의를 가진 관음증자나 협박범일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긴장이 시종 이어진다.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에 정보와 의사소통의 비대칭성이 더해진다. 켄투키-사용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동물의 울음소리(또 하나의 소름 끼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와 바퀴를 이용한 이동으로 제한적인 의사 표현만 할 수 있다. 반면 켄투키-소유자가 하는 말은 모르는 언어라도 번역기를 통해 사용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는 사용자-소유자 사이에 일종의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낳고, 이로 인해 숱한 사건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장치는 켄투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켄투키의 ‘생명’은 하나뿐이어서 사용자가 아주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거나 제때 충전기로 이동하지 못하고 배터리가 소진되면 더이상 ‘되살릴’ 수 없고 연결은 영원히 끊겨버린다. 이 유사죽음은 이야기에 비극적 우연을 더하고 긴박감과 긴장감을 부여해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또한 사용자-소유자의 관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질 때 지독히 어둡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술은 인간의 내면을 고스란히 되비추는 거울
단절과 고립을 낳는 초연결 사회의 역설
사만타 슈웨블린은 한 인터뷰에서 기술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리틀 아이즈』로 “우리가 기술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게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왓츠앱, 트위터, 페이스북과 스마트폰을 합친 것 같은 장치”인 켄투키였다. 소유자와 사용자가 다른 방식의 접속은 사람들 사이의 우발적인 “상호 이해와 연대”를 통해, 그리고 “두 종류의 삶”을 향유함과 동시에 삶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처럼도 보인다. 실제로 몇몇 이야기에서 (적어도 처음에는)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익명적 관계의 잠재성에 대한 희망이 간간이 엿보이기도 한다. ‘켄투키 해방 클럽’ 멤버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한번도 본 적 없는 눈을 찾아나서는 소년 마르빈의 이야기나 짤막하게 뉴스로 등장하는, 구급차를 불러 심장발작을 일으킨 주인을 살린 켄투키의 일화처럼 말이다(하지만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소설 속 현실은 아주 부정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켄투키-사용자들은 “여러개의 눈으로 전세계를 한눈에 내다보는 유리창”처럼 소유자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가 하면, 이를 통해 상대방에게 협박을 일삼고, 아이들을 상대로 도착적 행위나 납치를 자행하기도 한다. 반면 소유자들이 켄투키들을 학대하거나 파괴하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이는 순진무구한 사물이 아니라 상품을 매개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리틀 아이즈』는 소셜 미디어와 스마트 기기로 그물처럼 짜인 현재의 초연결 사회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지구적 봉쇄가 다시 한번 가시화된 상황에서 읽는 이 소설은 고독과 고립에 대해, 온라인을 통한 연결에 대해 더욱 가슴에 사무치는 통찰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