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들어오고 첫 겨울을 맞았다. 다른 육군과 달리 해안 경비를 담당하는 전투경찰의 운영 체계는 사뭇 다르다. 우선 초소별로 주식인 쌀과 보리와 연탄과 소금은 보급을 받고 부식은 돈으로 일정금액을 지급받는다. 따라서 겨울을 넘기기 위해서는 초소별 김장을 담가야한다. 부식비도 3개월 분 중 일정 금액을 미리 김장용 배추와 무, 총각무로 보급 받고 양념 비는 비용으로 지급 받는다.
배추와 무 등을 본부로부터 배달되면 전 분대원은 지개로 초소로 나르고 바닷물을 길어와 약간의 소금을 더 풀어 절이는 작업을 한다. 절여진 배추는 다시 초소에서 고개를 내려 해안가에 풀어 우선 바닷물로 한번 씻는데 물때를 잘 못 계산하여 밀물에 배추가 둥둥 떠내려 가서 첨벙대며 건져내느라 한 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리고 동네 우물가에서 배추를 씻는다. 양념과 고춧가루는 미리 부안 읍내에서 사다 두었고 무를 체 썰고 버므리고 속을 채우는 것은 우리가 가끔 들러 라면, 건빵을 나누어 주던 동내 과부 아주머니와 소대장과 평소 스탭을 맞추던 춤바람 난 격포의 과부 구릅 몇몇이 담당한다. 그사이 우리는 초소에 닿아있는 밭 가장자리 시누 대밭 언저리를 구덩이를 2개 정도를 파고 커다란 비닐부대를 묻을 채비를 한다. 김장은 이곳이 전라도 땅이어서 과부들의 습관대로 죽을 쑤고 고춧가루와 젓갈과 무 그리고 양념을 걸쭉하게 버므려 적당히 배추 속에 발라 준비해 뒀던 비닐 부대에 차곡차곡 넣어 채운 뒤 갈무리하여 대나무와 짚으로 덮어 두면 끝나게 된다. 김장도 잔치여서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삶아 뒤풀이를 하는데 후임 병이 없는 신참인 나도 호사하는 날이다. 격포 과부의 흘러간 유행가와 세련된 군바리들의 최신 유행가가 어울리고 주책없는 소대장이 격포 과부와 은근슬적 스탭을 밟는 몸짓을 하면 과부 아주머니가 군바리들의 눈초리를 의식하여 하얗게 눈을 흘기는 모습도 너그럽게 용서가 되며 마무리가 된다.
김장이 끝나면 이제는 취사용 나무를 한다. 연탄이 보급되기는 하지만 연탄난로에 취사를 해결하기엔 화력도 시원찮고 시간도 너무 걸려 따로 부엌을 만들고 솔가지, 시누 대와 동네에서 얻어온 짚으로 취사를 해결한다. 취사용 나무더미를 3-4가리를 마련하면 겨울맞이는 제법 준비되어 마음이 푸근해진다.
바닷가 절벽위의 초소는 조금은 나태하고 평온한 겨울 속에 잠기지만 말단 신병은 더욱더 고달파진다. 아랫동네의 우물에서 물은 더 자주 길어야하고 때가되면 찾아오는 식사를 위해 밥하고 설거지하고 또 밥하고 설거지하고 조금의 짬이 없다. 동거안을 위해 깊은 산에 홀로 들어가 명상에 잠기려하였더니 무섭게 찾아오는 식사시간 때문에 명상보다는 끊임없이 식기를 부여잡고 겨울을 나버렸다는 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스님이야 혼자 몸이었지만 여기는 11명의 장정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걸식 들린 군바리들이 아니던가! 추운 겨울에 바닷바람과 물에 자주 담그는 손은 잘 관리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귀찮은 졸병을 주인으로 둔 손은 어렸을 적 트던 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보다 나은 것은 크림 정도 발라주는 정도이지만 불을 지펴 밥해 먹는 손이어서 튼 틈 사이와 손톱, 주름과 손금은 까만 기름때가 끼어 몇 날을 불려 조약돌로 갈아내지 않으면 벗겨지지도 않았다. 이런 손으로 해주는 밥이건만 대원들은 잘도 먹어댄다. 때로는 하도 잘먹어대어 초소의 식구인 개들을 굶기기도 하는데 개를 위해 보리가 보급되어 이를 삶아 챙겨 주어야하는데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짬밥이 남지 않으면 그냥 건너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개들은 생사 권을 쥔 나를 애처롭게 따라 다니지만 이런저런 인정이 매 마른 졸병의 군화 발에 채이기 밖에 더하겠는가. 몇 끼 놓친 뒤에 챙겨주는 개밥은 힘센 수놈 차지가 되고 암놈은 더욱 초라하게 말라간다.
야간 순찰과 식사당번, 선임 병들의 세숫물 수발을 위한 물 긷기 자잘한 초소살림을 도맡아 하기엔 서울 샌님 출신의 말단은 팥쥐의 신세나 다를 바 없었다. 해안의 날씨가 변화무쌍하고 파도가 요동을 치지만 평온한 날이 계속되기도 한다. 한데 이상하게 허전한 기분이 들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 구박 받는 개중에 암놈인 메리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개밥을 챙겨주면 수놈인 낙타만 허겁지겁 먹고 낙타 또한 밥만 챙겨 먹고 부리나케 사라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었고 개까지 챙길 만큼 내가 한가롭지도 않았다. 며칠이 그대로 지나고 드디어 소대장도 메리가 없어진 것을 눈치 채게 되었다. 초소의 경비견은 묶어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방목해서 길러 아랫동네는 물론이고 수놈은 때로 아주 먼 동네까지 원정도 다녔다. 밤에 순찰을 나서면 구박은 하지만 밥을 챙겨주는 나를 제일 따르는 낙타가 앞장서 조를 이루는 선임보다도 든든해 때로는 큰 선심 쓰듯 선임 을 쉬게 하고 낙타와 둘이서 어둡고 험한 해안가 순찰도 해오던 터였다. 내 앞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호위하는 낙타는 잔소리와 시답지 않는 경험담을 지껄이는 선임 보다는 훨씬 정이 갔다. 소대장은 없어진 개를 찾아내라고 성화를 대었다.
없어진 메리를 찾으려했으나 도무지 범위도 없고 자유 분망하게 풀어 길러서 어디로 숨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특별히 관리하는 개도 아니어서 그까짓 것 없어지면 다른 초소에서 새끼 한 마리 얻어오면 되지 하고 대원들은 쉽게 포기해 버렸다. “메리 이년 어디에서 바람 났나보지 뭐!” 그렇게 또 몇 날이 지났다. 아침을 끝내고 낙타에게 밥을 챙겨주었더니 역시 허겁지겁 먹어치우곤 쏜 살 같이 달아난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개를 뒤 쫒았다. 낙타는 우리초소를 벗어나 우현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낙타가 털을 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곳은 용두 곳이라 하여 예전에 무장 간첩을 추적 끝에 몰아서는 유탄 발사기로 때려잡은 곳이며 소나무와 바위가 험해 으슥하기도 하고 시누 대가 우거져 평소에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한참을 달려 앞서던 낙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숨이 턱에 닿아 몰아쉬며 없어진 낙타를 찾으며 시누 대 숲을 더듬었다. 아! 나는 한 순간 숨이 멎는 충격을 받았다. 메리가 바짝 야위어 시누 대의 으슥한 틈에서 웅크리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낙타는 대나무 잎을 골라 쉼터를 만들어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꿩이나 토끼를 잡으려 놓은 올가미에 메리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올가미를 점검하던 사람은 접근을 허용치 않는 낙타의 서슬에 줄행랑을 놓았으리라. 가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상태를 보니 메리의 앞발이 올가미에 걸려 있고 올가미에 걸린 발은 퉁퉁 부어있었다. 조심스럽게 올가미를 넓히려 했더니 메리가 아프다며 내 손을 물려고 하였다. “가만히 있어라. 세상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불쌍한 것!” 메리도 주인의 손길이 저를 구해줄 줄을 알았는지 다소곳해 졌다. 살을 파고든 올가미를 제거해주니 메리는 그제 서야 미약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걷지 못하는 메리를 안고 초소로 돌아오는 길 낙타는 한껏 고무되어 나의 주위를 겅중거리며 맴돌았다. 누가 이들을 똥개라고 업신여겼는가!
초소에 도착하여 메리에게 우선 물을 주었더니 허겁지겁 먹어대었다. 그리고 라면을 삶아 밥을 말아 특별 식으로 주었더니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분대장과 소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소대장이 모든 대원은 집합하란다. 집합한 대원들에게 소대장이 걸죽한 사투리로 일갈했다. “야 이 거 뭐시어 개만도 못한 놈들아! 한갓 개색갱이도 이럴진대 너희들은 어찌 그 모양이여?” 썩을 놈들! “겨울철이라 너무 푹 퍼져 부려 개지구 그렇게 맥을 놓을 것이여? 싸가지없는 놈들!” “개가 있었던 곳은 우리가 매일 살펴야할 지점이 아니것냐?” “긍께 일주일 만에 올가미에 걸린 개를 찾았어? 다리몽댕이를 부려띠려도 시원치 않을 놈들!” 여기 분대장을 열외하고 몽땅 꾀 벗어부려라! 실시!” “.....?????? ” 순간 우리 모두는 어안이 벙벙했다. 꾀를 벗다니? 우리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금 전라도 출신 소대장의 고함이 터졌다. 몽땅 빨개벗으란 말이여!
우리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속살을 들어 내놓고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바들거리고 있었다. 겨울의 살을 에는 바람은 수백 개의 바늘이 되어 전신의 살갗을 콕콕 쪼아대고 있었다.
PS. “꾀를 벗다”라는 말은 전라도 사투리로서 “옷을 벗다”라는 뜻이다. 이를 활용한 말로서 “꾀북쟁이 친구”라 함은 어릴 적 친구라는 말이며. 우리의 고전 판소리 중 ‘별주부전’에서 거북이가 토끼와의 언쟁에서 “네 꾀를 벗기겠다”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네 옷을 발가벗기다 즉 가죽을 벗기다 라는 말이다. 내 친구 홍 장학은 고등학교 국어 선생인데 나의 경험담으로 꾀를 벗다 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단다. 예전에는 꾀를 벗기다 는 뜻을 재치, 즉 잔꾀를 없애주겠다 라고 해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나? ㅋㅋㅋㅋㅋ ( 이 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