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좀 도와주십시오.”
“뭔데 그러나, 자네 얼굴 보니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제가 할 수 있으면 형님께 부탁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제 힘으로는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말해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당연히 도와 줘야지, 어디 들어 보세.”
“회사를 그만 둬야겠습니다.”
“아니,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어나?”
선희의 작은 오빠, 진식이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놀라는 표정이다.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태무를 보며 채근한다.
“이 사람아, 말 해 보라니까, 왜 입을 다물고 있나?”
“저,”
다시 말문을 닫아버리는 태무를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며 재촉한다.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 놔 봐, 무슨 일이야?”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요.”
“내가 자네 일이라면 못해줄게 뭐있겠는가? 어서 말해봐.”
“회사를 그만두고 제 일을 좀 해 보려고요.”
“아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예.”
“회사에서 뭘 잘못했나, 자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는데?”
“무역업에 손을 대볼까하고요. 뭘 좀 수입해서 팔아보려고 합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은 일인데, 경험 없는 자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뭘 수입해 와도,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다네.”
“시장 조사도 어느 정도 했고, 공급처도 알아 놓았습니다.”
진식이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뭔데, 다른 경쟁자들이 많은 물건인가?”
“현재 경쟁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냐고?”
“어군탐지깁니다.”
“뭐, 어군탐지기?”
“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한참 태무를 건너다본다.
“조사 해 본 바로는 일본 어선들은 모두 그 기계를 장착해 어로작업을 한답니다.”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수입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사람이 있나, 아직 우리나라는 다른 방도로 쓰일지 모르니까, 아마 금지 품목에 들어 가 있을지 모르는데, 하여튼 알아 봐야겠지만, 자네 참 엉뚱한 데가 있네.”
“같은 해역에서 고기를 잡더라도 일본 놈들은 싹 쓸어 가는데 우리나라 배는 거의 빈 배로 들어온답니다. 다 그놈에 어군탐지기 때문이랍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 정밀기계를 들여온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리고 우리 어부들이 비싸서 살 엄두를 내겠는가. 또 조작 방법도 어려울 것이고 말이야.”
“들여올 수만 있다면, 팔 곳은 있습니다, 그리고 조작하는 것도 제가 배워서 가르치면 되고요. 원양어선 같이 큰 배에는 이미 보급이 됐으니까, 완전히 금지품목도 아니지 않을까요?”
“알아보긴 하겠는데,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지금 뭐라 말은 못하겠네.”
“형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믿고 안 믿고 가 문젠가, 너무 엉뚱해서 그러네, 그냥 회사나 착실히 다니지 그래?”
태무는 진식과 헤어져 낯을 익혀둔 선구상회로 발길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장사 잘 되시지요?”
“잘 되기는요, 전만 못해요, 요즘은 일본 배 등쌀에 빈 배들만 들어 와요, 싹싹 쓸어가다시피 잡아가버린답니다, 글쎄.”
“그렇게 심각해요?”
“그놈들은 바다 속을 손금 보듯이 본다니까, 해 볼 재간이 있어야지요.”
“다 기술이 뒤떨어져서 그렇지요, 몇 십 년을 뒤떨어 졌으니 당해낼 수 있어요?”
“요즘은 외상값 때문에 문 닫아야 할 판입니다, 고기를 못 잡으니 돈을 달라고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요, 기름 값도 못 뺀다고 하니, 원.”
“좋은 때가 오겠지요.”
“참, 언젠가 말하던 기계는 어떻게 됐어요?”
상화주인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다.
“지금 여기저기 손을 쓰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배에 그물만 실어도 그 돈이 얼만데, 받을 길이 막막해 죽을 맛입니다, 깔린 돈이라도 회수해야 하는데 미수금이 자꾸 늘어만 가고, 사람 미치겠습니다.”
“제가 그때 말한 것처럼만 해준다면, 이익금을 일부 나눠 갖고 서로 좋지 않겠어요?”
“그러면 밀린 외상값도 받고 춤을 출 노릇이지요, 선주나 뱃사람도 다 좋은 일이지요.”
“오늘도 그 일을 알아보고 왔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말고 계셔야합니다.”
선구상회를 나온 태무는 또 어슬렁거리는 척하며 미리 점찍어둔 몇 곳을 더 들려 같은 언질을 받고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항마다 찾아다니지 않아도, 고기잡이를 나갈 때마다 선구상회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서 잡은 고기를 팔아 돈을 갚는 것을 알고 어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선구상회를 통하면 쉽게 거래가 이뤄지지만, 선구상회에 어느 정도 밑밥을 주면 더 빠르고 쉬운 거래가 된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밑바닥 조사는 끝났지만 수입할 길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고, 기계생산국의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는 일도 핵심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일본출장을 가는 직원들을 통해 다각도로 부분적인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알아봐달라고 하면 정보가 누설 될 것을 염려해 앞뒤를 바꾸거나 다른 일을 더 크게, 많이 부탁을 하면서 슬쩍 꼬리를 붙이듯이 묻곤 했다.
조각조각 붙여 짜 맞추니 시간이 걸렸지만 거의 알려고 했던 일이 마무리 돼가고 있었다.
이제 회사에서 출장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갈 핑계만 만들면 되었다.
자기 돈으로 갔다 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번데기가 탈피를 해서 날기 시작하면 껍질이야 아무짝에도 필요 없을 것이고, 일본으로 건너 갈 때쯤이면 업무야 뒷전이라도 어차피 사표를 내던질 작정이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아니란 생각을 한지 오래다.
부둣가에 서서 심호흡을 하며 바닷바람을 가슴이 터지도록 들이마셔 본다.
불이 활활 타오른다.
주머니에 쿡 찔려 넣은 주먹을 불끈 쥐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줘본다.
벌써 손아귀에 돈다발을 거머쥔 듯 뿌듯했다.
날고 있는 갈매기가 돈다발로 보이고 우는 소리도 ‘돈‘ ’ 돈이다, 돈‘그렇게 울며 눈앞에서 왔다 갔다 날고 있는 것 같다.
신통한 놈들이다.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 본다.
선희가 딸을 순산한지 벌써 두 달을 넘기고 있다.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달작지근하고 비릿한 냄새가 황홀한 꿈을 꾸게 한다.
태무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눈앞에 돈더미가 쌓이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사슬로 꽁꽁 묶어 놓아 꼼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녀석, 지어밀 닮아서 예쁘기도 하구나, 어디 한번 안아 보자.”
능청을 부리며 선희 비위를 맞추느라 너스레를 떤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살갑게 대하는 태무의 속셈이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선희가 마음을 솔솔 풀어내고 있었다.
“당신 손 씻고 와서 애를 안아요, 손에 병균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그래 또 깜빡했네, 손 씻고 오지.”
군말 없이 나가 손을 씻고 들어오는 태무를 보면서 마음이 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이 효녀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고 쓰다듬는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태무의 웃는 얼굴에서 위안을 받으며 지난 날 악몽이 사그라져갔다.
“당신 시장하시지요? 민지 좀 봐 주세요,”
딸 이름도 꼭 장인이 지어 줘야한다면서 친정식구에게 더 살갑게 대하고 있는 것이 한편 고맙기도 했다.
“그래, 우리 딸 이리 오너라.”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민지를 품안에 안는 태무를 보면서 저런 따듯한 면도 있구나, 안도에 숨을 내쉬며 뜻을 맞춰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여전히 밥 먹는 버릇은 고칠 수 없나 보다.
반찬이 못 마땅하면 떼를 부리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럴 때마다 쳐다보며 웃으면 마주 보며 계면쩍은 듯 같이 웃어주는 태무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밥을 먹어버릇해서 혼자 먹으면 맛이 없어서 그래.”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그럼, 밖에서 드실 땐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점심은 맛이 없어, 동료들이랑 먹으니까 눈 딱 감고 먹지, 뭐. 그러니까 소화도 안 되는 것 같아, 고역이야, 고역.”
“당신도 참, 이제부터라도 습관을 좀 고쳐 봐요, 민지가 크면 흉보겠어요.”
“그게 쉽게 될까?”
돌아앉아 젖을 물리고 있다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딱딱 소리가 나게 부딪치면 물렸던 젓을 빼고 옷으로 젓을 가리며 반찬을 올려주는 사이 민지가 또 울면 다시 돌아앉아 젖먹이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단아한 기품을 무너뜨리고 싶은 것은 상대적으로 어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고고한 태도를 반드시 무너뜨리고야 말겠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선희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운만큼은 이겨내고 싶은 것이다.
“그냥 앉아서 먹이지, 힘들지 않아? 애도 계속 울고 그러는데.”
“괜찮아요, 힘들기는요.”
“이리 봤다, 저리 봤다, 내가 다 정신이 없네, 부부 사인데 좀 보여주면 어떻다고?”
“참, 당신도 어서 식사나 하세요, 내 신경 쓰시지 말고요.”
민지가 태어나기 전만 같으면 눈을 부라리고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선희는 태무에게 한 발짝 다가선 마음이기에 스스럼없이 대한다고 한 말이다.
돌아앉은 선희를 잠시 쏘아보던 태무가 얼른 눈길을 부드럽게 고치며 말한다.
뭔가 무던히 참고 있는 눈치다.
“나도 좀 먹여 줘야지.”
마치 어머니 앞에서 막내아들 말하는 것처럼 굴어댄다.
다른 집 아기는 밤 낯을 바꿔 낯에 자고 밤에 칭얼대기도 한다는데 민지는 밤이 되면 새록새록 잘도 자준다.
그것만 봐도 집안에 평화를 가져다 준 아기인 것 같아 힘줘 안기조차 겁날 지경으로 사랑스럽다.
시집올 때 가져온 녹음기를 산실에 가져가서 첫 울음소리를 담아 둔 테이프며 첫 발 도장을 찍은 것과 함께 예쁜 상자에 담아 보관하며 민지가 시집갈 때 주려고 그런다는 말에 너털웃음을 웃던 태무가 자신은 돌맞이 사진조차 없다며 웃음 끝에 눈물을 글썽이던 것이 못내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오죽 군색하게 살았으면 그랬을까 애잔한 마음에 가슴이 찡해졌었다.
웬만한 일을 덮어주고 끌어안아 줘야 할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부터 조금은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첫날밤이 생각나면 움칠 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민지를 껴안고 있으면 어떤 불안한 생각도 스르르 잊혀지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민지의 초롱초롱한 눈에 눈을 맞추면 행복한 기쁨으로 몸과 마음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