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복'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세속적인 복이든 영적인 복이든 아마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이 빠진 설교가 드물고, 복이 빠진 기도가 드뭅니다. 어느 목사님은 아예 복을 입에 달고 삽니다. 입만 여시면 복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는 것이 복인지,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인지 주객이 바뀌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오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된 그 자체가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인데, 그것을 경시하고 더 큰 복을 받겠다고 엉뚱한 일에 분주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진리의 우물가에 앉아서 목이 마르다고 엉뚱한 포도주를 찾는 격입니다. 마치 우물가의 그 여인처럼 영원한 생수를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보고 계속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 신도들의 이런 기복적 욕구를 이용하여 거룩한 교회를 마치 복채를 나누어 주는 저급한 종교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 때문입니다. 그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오도하여 무속적인 성황당 신도로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세속적인 복이 그리 중요했다면 왜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을까요. 이왕이면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셔서 요즘 일부 귀족 목사님들이 애용하시는 표현 그대로 '더 크고, 더 멋지게, 더 많이' 사역을 하실 것이지 겨우 보잘것없는 어부들 몇 명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셨을까요.
차라리 왕자로 오셨으면 병이 든 사람들을 일일이 손수 치료할 필요 없이 전문 의원들을 대량으로 동원하여 더 많이 고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라면 막강한 재물을 동원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큰 권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회당들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진리에 접근하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지만 실제로는 말구유로 오셔서 유대인의 종처럼 섬기며 살다가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고 세속적 복을 많이 받으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 어디에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어디에 헌금을 잘하면 무병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자손이 잘된다는 말이 있습니까. 요즘 만연하는 소위 성공주의나 성장주의는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해도 못 살고 병들고 파산하신 분들은 어찌 해석해야 하나요. 십일조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도 쫄딱 망한 이야기들은 왜 거론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신앙 좋은 목사님들은 절대로 중병에 걸리면 안 되겠지요. 아울러 일본 같은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왜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이제 정직해져야 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가장 왜곡하고 오도하는 곳이 바로 공교회라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단은 권력과 명예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 교회들은 이런 사단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며, 오직 부흥과 성장만이 있는 것처럼 큰소리칩니다. 교회에 돈을 바치면 큰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왜 그런 목회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전부 다 교회에 바치지 않습니까. 열심히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면 아예 전부 바쳐서 복을 곱빼기로 받으셔야지요. 왜 자신들은 뒤로 부동산을 사고 법인을 만들고 돈을 은닉합니까. 구약 십일조의 참된 정신은 '십분의 일'이란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건만, 일부 약삭빠른 목회자들은 더도 덜도 아닌 딱 십분의 일만 바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괜히 그 이상을 더 강조했다가는 자신도 모두 다 바쳐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이들 중 상당수는 밤중에 몰래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고약한 도적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가 주는 생생한 교훈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의 권력이 비대해져 세속을 향하자 로마의 황제도 감히 대항하지 못 했습니다. 신의 이름을 빌어 호령하니 감히 가로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신도들은 무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장식된 미사에 참여하거나 경문을 반복하여 외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성경은 오직 사제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신도들이 성경을 직접 읽거나 해석하면 바로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대적 교권을 구축한 후 성직자들은 거의 집단적으로 부와 권력에 탐닉했습니다. 교황이 세속화하여 타락하고 추기경, 신부, 수도사, 그리고 수녀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무자격한 자들이 거룩한 직분을 사유화하거나 돈으로 매매한 결과입니다.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영아들이 버려지고, 대부분의 신도들이 가난한 농노로 신음할 때 사제들은 화려한 저택에서 호의호식했습니다. 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주 교회당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그들 중에 과연 몇이나 천국에 도착했을까요. 이것이 과거 중세 교회의 비극적 실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똑같은 성경을 들고서 어찌 교회가 저 모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기 중에 가장 쉬운 것이 '종교적 사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왜곡되면 흉기가 됩니다. 신앙이라는 미명으로 무장된 종교적 신념은 매우 위험한 무기입니다. 중동 지역을 한번 보십시오. 종교 지도자들의 '성전(거룩한 전쟁)'이라는 한마디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슴지 않고 폭탄을 매고 자살 공격을 감행합니다.
중세 교회는 세상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속인 교회입니다. 세상에 복음의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따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처럼 지금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또 다시 세상을 속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간판만 달면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와 신도가 있다고 모두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어찌된 일인지 '병 고친다, 은사 준다, 또한 복 준다'고 하면 수천수만이 환호하며 모입니다. 반면에 바른 교회를 위한 개혁 모임에는 고작 칠팔십 명이 모입니다. 강단에서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면 강 건너 불 보듯이 무심하고, 오히려 요란한 종교 쇼를 하면 쉽게 통하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직한 목회를 하는 교회는 십년 동안 100명이 되기도 힘든데, 같은 지역 사기꾼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는 수천 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차 바른 교회들이 소수가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기처럼 참으로 슬픈 시대입니다.
신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이젠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목사의 삶을 들어야 합니다. '공금 횡령 안 했다, 성추행 안 했다, 세습 안 했다, 그리고 표절 안 했다' 이런 거짓말을 믿지 말고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수천수만 모아 놓고 설교는 청산유수인데, 뒤로는 교회 돈을 곶감처럼 빼먹으며 사치를 누리거나 간통하고 세습하는 목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그들의 그런 위선과 거짓이 진정으로 복 된 삶의 모습입니까.
이들은 교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두려워하지 않음은 물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들의 간덩이를 그리 겁 없이 키워 주었습니까. 바로 그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들이 아닌가요. 그래서 그런 답답한 공동체에서는 귀한 복음의 진리가 돼지우리에 던져진 진주가 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속이 사악했던 중세 교회가 시대를 넘어 부활하여 오늘날 한국 땅에서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부패한 인생들의 무지와 탐욕은 별로 크게 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속이지 말고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것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실 정도로 불편하게 사셨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이 신도의 삶에 우선적 목적이 되거나 교회의 상습적 가르침이 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세속적 복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은총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부자로 장수하며 살기 위해 굳이 교회를 열심히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보다 더욱 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야말로 바로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한 바른 복음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복지이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몸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이유는 부나 권력 따위가 감히 신앙의 중요한 표준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장 큰 복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출처 당당뉴스 신성남(정의사회, 복지국가, 언론개혁, 공학도 출신의 평범한 신자입니다)
첫댓글 뼛속 깊이 파고드는 회초리에 그 영혼이 살리라.....할렐루야~!
진리, 혹은 깊은신앙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님의 주장이 인기있는 반응을 얻겠지요
참된 복을 이해한 목회자들은 오히려 비난 받는 세태입니다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인가는 주님이 가장 정확히 아실겁니다
예수님이 왜 가난하게 사셨냐구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 : 9
목회자가 양심에 화인 맞지 않은 이상 자신이 깨닫고 이해하고 믿는 성경을 가르칩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복을 가르칠까요?
저주로 가득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양들을 위해 목회자가 깨닫고 믿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겁니다 님 같이 성경의 한 부분만을 주장하며
함부로 남을 비난하는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제가 이태리 밀라노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목사가 제게 말하더군요 번영신학은 이단이다 사모와 이태리로 휴가 와서는
고가의 옷을 쇼핑 해 휘감은 채 하는 말이 설득력이 있었겠습니까
제가 목회의 현장에서 보게 된 현실은 강단에서 번영신학을 비난하는
목사들이 삶의 질은 그 교회 교인들의 삶의 질 평균치 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누리고 있더군요
제가 축복의 복음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왜곡된 성경관으로 양들까지도 제한되고 눌린 삶으로
끌고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자녀들이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 하시는데 성경을 미숙하게 이해한 이들
때문에
그들을 따르는 양들을 이 땅에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이 아닌 뙤약볕의
돌짝밭으로 인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이 땅에서 판결 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가면 드러 나겠지요
그렇다면 겸손하게 자신의 신앙이나 주님 앞에서 돌아 보는게 좋지 않을까요
어쩌면 당신이 틀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