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남원읍 하례리 1570번지(이 번지는 없어짐) 현재는 1608-7번지.
시대 ; 고려
유형 ; 산업시설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이 가장 먼저 설촌된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당시(1500년대) 감귤원 감독관은 하례2리 마을에 입향하여 이곳을 설촌하였다고 하는 조세진이다. 이 일대의 입지조건을 보면 땅이 매우 비옥하며 사방에 절벽과 동산으로 방풍이 되어 있다. 귤은 고려시대 문종 이전부터 임금에게 진상되었다고 한다.(제주일보 2010.04.09.) 효종4년(1653)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탐라지(耽羅志)』 과원조(果園條)에 정의현 지역에 정자(亭子)·독학(獨鶴)·별(別)·우전(牛田)·금물(禁物)·향목(香木)·원통(元通)·성산(城山) 8개소가 등장한다. 영조42년(1766) 윤시동 목사가 편찬한 증보탐라지에는 앞의 8개소에 더하여 우미(又尾)·상효돈(上孝頓)·서(西)과원이 추가되었고, 정자(亭子)·별(別)·향목(香木)·성산(城山)과원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탐라지(耽羅志)』와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의 금물과원 과수 자료를 비교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130년 정도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과수의 종류가 많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물(禁物)이라는 이름은 임금님께 진상을 올리는 과수원으로 다른 사람은 건드릴 수 없는 과수원이라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정의현 서쪽 50리에 있었으며,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한 귤[산물]을 진상할 때는 떡갈나무 잎에 싸서 보내었다고 한다. 1953년에 김문희·김범준 등 도내 석학 12인으로 구성된 담수계(淡水契)가 펴낸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는 정의현 과원을 위미원(爲美園)·예촌원(禮村園)·우진원(牛陣園)·신원(新園)·원귤원(元橘園)·별과원(別果園)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9세기에 금물과원은 폐지되고 예촌원이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위치한 과수원[1591-4번지]에는 '금물과원(禁物果園)'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비석이 존재한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에서 귤이 진상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고 기념으로 과거를 보게 하기도 했다. 국가가 관리했던 과원 중의 하나였던 금물과원터는 제주가 귤의 고장으로서 역사적 연원을 찾아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조선 시대 과원의 설치 및 변천을 통해 감귤을 포함한 과실의 재배 현황 및 진상 액수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주민의 경제생활을 엿 볼 수 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금물과원(禁物果園)이 2010년 복원됐다. 제주도 서귀포농업기술센터는 2008년부터 도내 재래감귤을 조사하면서 대부분 100년이 넘은 재래감귤을 확보하여 재래감귤을 재배했던 금물과원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2리 서귀포농업기술센터 부지 1천500㎡에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과원 주변 방풍수도 옛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해 대나무로 조성되었다.
금물과원 안내판에는 〈제주는 예부터 귤의 고장이라고 불리워져오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감귤을 왕실에서 접대, 제수품으로 사용하면서 필요한 감귤을 충당하기 위하여 제주목에 23, 정의현에 8, 대정현에 6개소 총 37개소의 과원을 설치하여 조정이 관할 과원으로 운영하였다. 이곳 농업생태원 일대에는 중종21년인 1526년에 금물과원이라는 국가과원이 가장 먼저 설치되어 400여년 동안 존속되었던 곳으로 지금도 근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금물과원에는 당유자, 유자, 진귤, 금감, 청귤, 석금귤, 종정귤, 감자, 당금자, 탱자 등 감귤뿐만 아니라 뽕나무, 동백, 매화, 모과 등을 재배하였으며 방풍수로 대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았다. 이 과원에는 금물과원 당시 재배했던 재래귤과 약용과수 및 1913년 일본인 미네(峰)씨가 도입한 온주밀감을 식재하여 다양한 품종을 보존하고자 복원하였다.〉라는 안내문이 써 있다.
《작성 21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