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에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했다. (7년 공사)
조선 후기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원래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거대한 궁궐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시 황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 영역을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경운궁과 경희궁 궁역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끝나가던 시점인 1901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홍교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 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되었다. 이러한 훼손이 일제의 만행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전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다. 일제가 경희궁에 손댄 건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남은 전각 5개를 외부에 매각한 것 뿐이다.
그래서 숭정전, 흥화문 등이 다른 장소에서라도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훗날 경희궁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동국대학교에서 절로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崇政殿)은 경희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복제하여 복원시켰다.
사실 일본은 경희궁 터에 있는 비어있는 공터에 경성중학교를 신축했을 뿐, 경성중학교 건설 때문에 전각을 철거하지는 않았고 매각을 하여 팔아 버렸다.
광복 후에도 서울고등학교의 존재 때문에 한동안 복원은 꿈도 꾸지도 못했다.
땅값이 100억 원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기에 중앙 정부와 서울특별시에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 이 땅을 구매하였는데, 1980년대에 해당 부지는 여론의 성화 때문에 현대그룹은 현대사옥 건설 계획을 보류하고 사실상 공터로 방치한다.
1985년 1월 서울특별시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주요업무계획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다가오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민심수습책을 논의했고, 그 방안의 하나로 경희궁 터 공원화 계획을 발표하고, 현대건설로부터 다시 부지를 취득한다. 이 때 당시 매립한지 얼마 안 된 구의지구(강변역 일대)의 택지 5만평과 등가교환했다. 현재 강변역 일대의 빽빽히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경희궁의 흔적인 셈이다.
그러나 경희궁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경희궁 터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특별시가 잽싸게 그 자리에 서울특별시교육청(1981년), 서울시립미술관(1988년), 서울역사박물관(2002년), 서울복지재단 등을 짓는 만행을 저지르고, 또 일부 부지는 서울특별시가 끝내 민간으로 매각(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해버렸고 이것이 현재 경희궁 복원의 걸림돌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흥화문(興化門)은
1618년에 경덕궁(현재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으로 옮겼다가,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호텔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된다.
위사진은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 표기되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이다.
한양 안에서 밖으로 시신을 내가는 통로였던 광희문(서소문)과 가깝다. (광희문은 그런 이유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다.)
고종이 이곳에 장충단을 세운 이유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때 희생된 홍계훈(시위연대장) 등 군인들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워 제사지내던 최초의 현충원이었다. 그런 추모 공간인 곳을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장충단 비를 뽑아내고 제사를 중단시킨다.
▪︎1919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바꾸고 벚나무를 심어 지금도 많은 벚꽃을 피운다.
이랬던 우리의 추모 공간이 1932년 일왕의 충신을 추모하는 박문사로 변질됐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에 외국 국빈을 위한 영빈관을 건축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하야했고 공사는 중단됐다. 영빈관이 완공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7년이다.
6년 뒤인 1973년에 삼성그룹에 매각해 신라호텔을 지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라호텔(호텔신라) 영빈관에서 취임식 만찬을 진행한다.
숭정문(崇政門)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해설사는 봉황이 아닌 공작이라 함)
숭정전(崇政殿)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국대학교 정각원(본래 숭정전) 천장의 용을 / 새로 복원한 숭정전 천장에 달린 용은 조잡하다.
〈궁〉, 〈황후의 품격〉에 나오는 전통 양식 궁궐 건물도 사실 이 곳에서 외부 장면을 촬영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조선 좀비 촬영도 여기서 하였다.
자정전(資政殿)
'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
경희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에는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장희빈》에서는 숙빈 최씨(박예진)의 처소로 나왔고 영화 《사도》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의 빈전 내부를 이 곳에서 찍었다. 상복을 입은 영조(송강호)와 사도세자(유아인)가 절하는 씬 촬영 역시.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 어진의 모사본을 전시 중이다.
태령전 뒤에 큰 바위가 있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
방공호 ~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3년 말경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 전신국이다.
경교장
경교장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서거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입니다. 1396년 한양도성이 1차 완공되었을 때 ‘의義를 두텁게 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돈의문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후 1413년 풍수를 이유로 문을 닫은 뒤, 1422년 현재의 ‘돈의문 터’에 다시 지어졌었는데.... 이때부터 돈의문은 신문新門 또는 새문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돈의문을 지나는 도로는 신문로 또는 새문안로라 불리고, 그 안쪽 동네는 자연스레 새문안 동네로 불렸습니다. 돈의문박물관 마을이 있다.
첫댓글 경교장, 경희궁, 새문안교회 등 듣기만 했던 곳을 처음으로 방문~봉구 덕분에!
1센티만큼 비껴 다른 각도로 보면 사고가 달라질 수 있다는 책의 내용을 실감~~
정동길을 걸으면 옛문화방송국에서 광화문으로 나가 버스 타고 집에 오곤했는데...
신호등을 건너기만하면 새로운 곳이 있는데 늘 습관대로 살아왔다. 그 점이 나의 단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이젠 한 방향보단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둘러봐야겠다.
세상엔 멋있는 도시도, 아픈 역사도, 멋 있는 남정네도 많으니
이쪽 저쪽 둘러 보시게 ~~ 많이는 비껴 가지 말고 딱 1cm만 비껴 가면 즐거운 인생살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