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운송에 컨테이너 혁명이 일어 난 때는 1960년대 말이었다. 그전까지는 일반 화물은 나무 상자나 박스를
짜서 실어 보냈는데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는 방식이 가히 혁기적이었다. 70년대 들어서도 우리나라 항구에는
컨테이너 하역용 Gantry 크레인이 설치된 부두가 없어 원양 대형 원양 컨테이너선은 가까이 일본 고베항과
요코하마항에 기항하여 우리 인천과 부산에서는 그곳까지 실어 나르면 다시 미국과 유럽등으로 환적하였는데
이런 소형 컨테이너선을 Feeder선 이라 했다.
당시 대표적인 Feeder 선사는 미국 SeaLand의 대리점인 한진그룹의 대진해운과 일본 NYK의 대리점인
고려해운이 있었다, 나는 1975년 해군을 제대하고 컨테이너의 전도를 생각하고 부산-요코하마항을
일주일에 한차례씩 운항하는 대진해운의 3천톤급 인왕2호의 2등과 1등항해사로 승선했다,
조중훈은 월남전 동안 (1955년~1975년) 항만하역과 화물운송 용역으로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여 수송 관련
기업을 대대적으로 일구었는데 땅에는 한진 운수, 하늘엔 대한항공, 바다에는 한진해운의 전신 대진해운을
세웠다. 제조업이라고는 제주생수가 유일하다.
내가 탓던 인왕2호에는 월남에서 철수한 한진 멤버들이 선원으로 타고 있었는데 초기 조중훈의 사이곤 항
본부 바지선에서 국제전화도 없어 동고동락하던 무전통신 담당 통신사도 있었고, 조중훈씨 사촌동생 조모씨를
조타수로 데리고 있어서 조중훈과 월남에서의 많은 비사를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조중훈씨는 625동란 후 1톤 화물차 한대를 운전하며 새벽에 인천에서 해산물을 받아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운송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통금이 있던 때라 통금 전에 인천에 가야 해서 서둘러 가고 있던 어느날 밤 열두시
가까워 오는데 서양 여자 한분이 자동차 본넷을 열어 놓고 길가에서 손을 흔들고 있더란다. 모두들 통금 때문에
본체도 안하고 지나치는데 조중훈씨가 가보니 차가 고장 나서 오고가도 못하고 있어 당시 화물차 운전할려면
수리 보수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던터라 차를 고쳐 주고 보냈더란다.
그 부인이 고맙다며 서울 오면 꼭 연락하라는 명함으로 어느날 전화했더니 남편이 미8군 군수참모 대령이더란다.
야밤에 꼼짝도 못하고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몰랐을 자기 부인을 구해 주었다고 극진히 대접하고 무슨 일이든
도울 일이 있으면 얘기하라더란다. 뒷날 어느 사람이 그정도 빽이면 미군 고물이니 폐기 차량 불하 받을 수 있게
청탁을 해 보라해서 그래서 폐기차량을 불하 받아 수리해서 화물자 10여대의 운수 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었고,
얼마 뒤에 그 미 대령이 진급하여 월남 미군의 군수참모로 갔는데 조중훈씨에게 사이공 항만이 베트콩의 기습도
당하고 월남인을 믿을 수 없다고 하역과 운송 용역을 줄테니 한국인을 데려 오라해서 무려 기만명에 달하는
인력을 송출하여 오늘의 한진 그룹을 이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다.
사람이 평생 2~3번의 기회가 오는데 그 기회를 얼마나 잘 잡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갈린단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그 사람 본인이나 조상이 선업을 닦았느냐에 달렸다 하니 나의 처신이 곧바로 내 손자들의
장래가 달렸다 생각하니 재삼 숙연해 진다.
인왕2호에 같이 있던 조타수 조모씨는 나의 코치로 인천의 대한항공 창고 괸리 소장으로 갔었고,
나는 얼마후 고려해운으로 옮겨 첫 선장이 되었고, 25회였던 2등항해사 이모군은 훗날 울산항 도선사로,
역시 25회였던 2등기관사 이모군은 훗날 현대중공업 전무로 근무하다 퇴직하였다.
다들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