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 설교 1
행 2:14-24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14-24 /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그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앞으로 나서서 군중들에게 외쳤다. `유대 동포 여러분, 그리고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자, 들어 보십시오. 15) 여러분 중에는 우리가 술에 취해서 그런다고 하는 이도 계십니다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아직 술 취하기에는 이른 시간입니다. 아침 9시부터 술 취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16) 오늘 아침에 여러분이 보신 이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것입니다. 17) ㄱ)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ㄱ. 70인역 욜3:1-5) 18) 또 그날이 오면 너희의 남녀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나의 영을 부어 주고 19) 땅과 하늘에서 이상한 상징들, 곧 피와 불과 버섯 연기들을 보여주겠다. 20) 여호와의 그 위대하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캄캄해지고 달은 피같이 붉어질 것이다. 21) 그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 약속하신 것과 똑같이 시온산과 예루살렘 도성에서 구원을 받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불러내시는 자들은 살아 남을 것이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놀라운 이적들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앞에 예수가 자기가 보낸 분임을 증거하려고 행하신 일입니다. 23) 하나님께서는 미리 작정하신 대로 그분을 여러분의 손으로 로마 정부에 넘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24) 그런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손아귀에 그분을 가두어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각 나라의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에 대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자 그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요엘서의 말씀(욜 2:28-32)을 인용하며 현재 일과 연관성을 설명합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15) 베드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예수께서도 특별한 상황을 기회로 제자들을 교훈하셨듯이 베드로도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설교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몇몇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합니다. 베드로의 이런 당당한 모습은 이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나약했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요엘의 예언(16-21) 베드로의 설교는 계획된 설교라기보다는 지금 일어난 현상에 대한 설명과 도전을 위해 즉흥적으로 선포된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말씀에 대한 놀라운 영적 통찰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그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말세에 하나님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시겠다는 것과 둘째, 말세에 일어날 다양한 징조가 있을 것, 그리고 셋째,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이 예언이 지금 군중들이 목격한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이루신 사역들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으니(22-24) 요엘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해야 할 것은 이 예언을 현재의 사건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으심, 부활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은 이미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군중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증언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너희’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죽으심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음을 증거합니다.
적용: 하나님은 과거의 하신 말씀을 섭리 안에서 분명히 이루십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이루신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여러 어려움과 근심으로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에서 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설 교 >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사도행전 2:12-21 / 김삼환 목사
오늘은 술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잘못된 술 문화를 고치고, 성령에 충만한 하나님의 선민, 자녀답게 살아가는 새 시대를 준비하는 귀한 말씀을 우리가 은혜로 받아 들여서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성도 한 분 한 분에게 술 취하는 것 이상의 성령에 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모든 문제가 많이 있는데 이 문제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물론 사탄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술로 말미암아 오늘 이 사회와 국가에 엄청난 고통과 어떤 재난 보다 더 큰 재난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습니다.
술은 모든 범죄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범죄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파멸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남자 20%가 술로 인해서 이미 인생이 끝난,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이런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전 국민의 10%, 320만 정도는 중독자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어떤 장애자 보다 더 불행스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이야 마음에 평안도 있고, 장애인들이야 기쁨도 있지만은 알콜 중독자는 기쁨도 없습니다. 평안도 없습니다. 장애인들이야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지요. 그러나 중독자는 모든 주변을 다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가정 파탄이 일어나고 폭력을 휘둘러서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아내는 집을 뛰쳐나가고, 사업은 할 수가 없고, 건강은 망가졌고, 부모, 형제, 집안, 자녀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알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알콜 중독은 가정 전체의 몰락을 가져다 주는 무서운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얼마 전 신림동에 김씨라고하는 52세 어머니는 딸이 26살인데 두 달 후면 결혼을 해야 하는데도 남편이 날마다 술을 먹고 취해 있으니까 이 딸이 목을 매어 자살해 죽었어요. 어머니를 통해 끝없는 좌절과 고통을 참고 나왔는데 결혼시킬 준비도 전혀 안하고, 술에 취해 있으니 이 딸이 그만 소망이 없어진 거예요.
청량리에 어떤 부인은 25세인데 남편이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고, 때리고 하여 잠을 자는 남편에게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남편을 죽인다고 한 것이 술을 먹은 남편은 빨리 그래도 도망을 했고, 부인만 구속을 당했어요. 이런 일들이 매일 매일 한도 없이 일어나는 거예요. 부인은 대학을 졸업했는데, 남편을 술집에서 만났는데 초등학교만 졸업을 했으면서도 대학을 나온 것처럼 거짓말하고 속아 결혼하고, 이제 인생을 다 망치고, 얼마나 절망이 되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술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가 잘 들어 보세요. 일년동안 우리나라에 술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이 20008명입니다. 여기에 술 먹고 음주 후에 자살하는 사람이 일년에 1355명이예요. 이것은 7월 2일 나온 신문이예요. 술 먹고 헛디뎌서 죽은 사람, 술먹고 난간에 떨어져 죽은 사람, 차를 몰고 추락해서 사망한 사람이 840명, 술 먹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차를 몰고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674명, 술 먹고 불을 지르던지, 술 먹고 불에 타 죽은 사람이 382명, 술 먹고 살인으로 인하여 남을 죽이는 사람이 379명, 이것은 그냥 집계에 나온 것 만이구요, 그 외에도 많고 많은 사회의 온갖 범죄뒤에 감추어져 있는 통계는 셀수도 없는 거예요. 술 먹고 병들어 죽은 사람은 계산도 할 수 없어요. 술 먹고 자신만 자살해 죽든지 물에 뛰어들어 죽든지 불질러 죽든지 그것은 괜찮아요. 그건 자기 하나만 피해가 가는데 모든 범죄를 저지르는 거예요. 살인 범죄의 68%가 술과 관계되어 있고, 폭행의 62%가, 살인미수의 54%가, 강도의 40%, 절도의 44%, 어린이 강간의 70%가 다 술먹고 하는 일이예요.
모든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전부 술과 관계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범죄를 막으려해도 술이 뒤에서 밀어주는데 방법이 있느냐 말이예요. 별 것 아닌 것으로 모두 생각하고, 재미로 생각하고, 남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 살면서 친구 따라 한 잔 하는 것을 다 모두 평범하게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그냥 간단하게 한 잔 하고 그냥 그저 대학 다니면서 한 잔 하는 것으로 평범하게 하나의 악세사리로 생각하고 출발했던 것이 그냥 술길로 빠져 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좁은길로 술병에 이끌려서 나중에는 술을 의지하여 술이 아니면 나를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것은 술밖에 없기 때문에 자나 깨나 술을 찾고, 술을 의지하여, 결국엔 술에 기대어 취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안되는 이런 자리로 모두 공식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끝나면 괜찮지요.
사람의 인격을, 성격을, 다 망가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다 파괴하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나면 자기 중심적이고, 잘 흥분하고, 신경질적이며,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누구에게나 시비를 걸기가 일수고, 열등감이 자주 생기고, 우울감이 오고, 불안해지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그 다음부터는 안 먹으면 안되는 거예요. 잠도 안오고, 괴롭지도 않은 인생, 괴로우려고 자신의 귀한 인격을 파괴해서 열등감을 가져다 주는 거예요. 기억력이 없어져요. 무례해 져요. 어른도 아이도 없어요. 어린아이도 술 먹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삶의 경쟁도 직장 생활에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 비관하게 되고 남을 비판만 하게 되는 거예요. 술 자리 처럼 남을 비판하는 곳이 없어요. 온 세상을 다 비판해요.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 술에 더욱 의존하여 인생을 끝내게 된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건강한 인격, 양심, 도덕이 다 무너져 버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들도, 성품도, 다 파괴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결혼할 때 좋은 대학 나왔느냐? 인물이 좋으냐? 이런것만 보지 그가 술을 먹느냐, 안 먹느냐, 이런 것은 보지 않아요. 술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모두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술 마귀를 추방하고, 술을 끊고, 성령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계속 들어 보십시오. 오늘 술의 정체를 들추어 내어서 술마귀를 쫓아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라는 전 세계에 술을 제일 많이 먹는 나라, 세계 최고의 고급 양주들을 수입하여서 프랑스, 독일, 미국 술의 최고의 고객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2000년 1월 12일 신문에 의하면 전국민 어린아이로부터 모두 평균으로 2500만명이 한사람, 한사람이 소주 58병을 먹어요. 58병하고 0.9병을 먹어요. 놀라지도 않네요. 아이들하고, 교인을 빼면 얼마나 많이 먹는 거예요. 맥주는 61병을 먹어요. 막걸리, 양주등은 다 놔두고 여행을 가서도 최고의 선물은 술입니다. 술을 들고 와야 됩니다. 사위든, 자식이든, 술 안들고 오면 술판을 모르고, 술집으로 안가면 인정해 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술을 먹어도 지나치게 먹고, 폭주로 먹고, 더럽게 먹고, 죽으라고 먹고, 완전히 술이 되도록 먹는 거예요. 우리의 술 이름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술 가운데 폭탄주가 있구요, 폭탄주보다 더 무서운 수소 폭탄주가 있구요, 충성주, 동동주, 회오리주, 바람주, 드라큐라주, 이것만 아닙니다 .요사이는 골프주가 있구요, 육각수주, 육각수주는 컵 6개를 앞에 놓고 각각 다른 술을 붓는 거예요. 소주, 맥주, 위스키, 포도주 등을 탄산수와 함께 마셔서 속이 뒤틀리도록 마시는 거예요. 금테주도 있어요. 폭포주, 다이아몬드주, 회오리주에다 얼음 한 조각을 넣으면 보석처럼 반짝인다고 해서 다이아몬드주 이제 10월부터 11월이 12월이 되면 술집으로 불야성을 이룹니다. 밖에 나갔던 분들이 다 들어오구요, 불경기가 오면 자리가 바뀔 뿐이지 술을 더 많이 먹습니다. 괴로우니까..
또 대학입학 때가 되면 학력고사가 끝나는 12월 부터는 그냥 모든 대학, 금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80만명과 함께 술집으로 온 나라가 그냥 술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년 5월까지는 술로 끝나는 이런 계절이 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요즘 대학을 들어가면 구두에다 따라주는 구두주, 가래를 섞어 먹는 가래주, 별의 별 것을 다 통과를 해야하는 이런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술을 먹어도 그 전에는 주로 막걸리였고, 어른들이 주면 한 두잔 마시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온 나라 온 국민이 술잔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말 깨어 있어야 합니다. 20세 이상 성인 남자 83.5%가 술을 먹습니다. 여자는 54.9%가 먹습니다. 그러나 지금 노인들 세대 50세 이상은 적은데 지금 대학생은 전혀 다릅니다. 대학생 남자의 89.8%가 술을 먹고, 여학생도 84.6%가 술을 먹습니다. 남녀 학생들이 다 비슷하게 술을 먹고 거의 다 먹는다라고 보아야 합니다. 86년에만 해도 여자들은 20%였습니다. 이제는 여자들에게로 술잔이 넘어가고 있고, 더 무서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작년에 강원도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술먹는 실태를 조사했어요. 놀라운 것은 강원도 초등학교 6학년 학생중 매일 술을 먹는 학생이 1152명으로 집계가 나왔어요.
어른들이 비디오 보고, 아이들은 안보는 줄 알아요. 지금은 성인이 되어야 술을 먹는 것이지 하고 안 먹는 시대가 아니예요. 바로 그대로 이어져 가는 시대예요. 초등학교 6학년이 이러하고 아래로 점점 더 내려가고 있습니다. 여대생들도 하루에 맥주 5병씩 매일매일 먹는 사람이 10%예요. 이제 집에 며느리 잘들어 와서 잘못보면 시아버지가 들어와도, 술주정하고, 이래봐요. 술먹으면 뭐가 뭔지 모릅니다. 술먹으면 다 마비되요. 취해 버리니까요. 어젯밤에 뭐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막걸리 색깔처럼 모두가 다 희미해 집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나온것인데 어떤 사람이 처갓댁에 가서 술을 먹고 취해서 자다가 화장실에 간다는 것이 장인, 장모 방문을 열고, 그냥 볼일을 본거예요. 웬 밤에 뜨거운 수돗물이 터졌나? 하여 불을 켜고 보니 난리가 난거예요. 이 정도만 되어도 괜찮지요.
사람이 술을 먹고 인격, 지성, 양심, 어느 것 하나 안무너지는 것 없이 다 무너집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괜찮지, 술은 모든 병에도 어머니예요. 질병의 어머니예요. 간암, 간경화, 위암, 특별히 위확산되어 위를 못쓰게 되는 거예요. 소화력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취장염, 고혈압, 중풍, 식도염, 후두암, 당뇨, 심장병, 소화기구에서 내려가서 소화시키는 곳까지 다 망가져 버리는 것이 술입니다. 술을 먹으면서 여기에다 담배까지 피우면 질병이 471%로 증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마음만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정 버리고, 사회 버리고, 몸 버리고, 건강 버리고, 모두 다 파괴하는 파괴자가 술입니다.
그런데 점점 부흥하고, 발전하는 곳은 술집 밖에 없습니다. 금년 1월부터 6월까지 우리나라 술집이 30000개나 늘었습니다. 여러분, 아파트 단지가 이렇게 커도 몇천 세대가 안 되는데 술집이 6개월 동안 3만개가 늘었어요. 우리가 조금 번영하면서 돈을 어디에다 다 쏟아붓느냐? 술집에 다 쏟아붓는 거예요. 룸싸롱이 5204가 늘어나서, 작년보다 4배가 늘었구요, 소주방, 호프집이 13080개 극장, 식당이 2803개, 단란주점 8843개가 늘어 났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늘어날 수 있어요. 술집문만 활짝 열려 있고, 술집만 번영하구요, 일년에 수십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나고, 여기에 생명이, 가정이 파괴되어 보는 손실은 그 값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지요. 술은 파괴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영업상무다, 큰 회사의 경리담당 이사다, 이러면 외국 바이어들하고 날마다 술먹고, 회사를 위해서, 목사님 어쩔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구, 술 먹고 그 회사가 건강할 줄 아느냐고, 모든 바이어를 술로 처리하는 회사는 술처럼 취해서 흔들리는 거예요.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회사 살리고 자기의 건강은 망가뜨리면 그것은 뭐예요. 나도 살고 회사도 살고,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 우리가 속히 술문화에서 떠나야 하는 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 드리느냐? 제가 오늘 여러 가지 배경이 많아요. 우리 나라 교인이 30%라고 하는데 교인도 술을 많이 먹는다라는 통계가 나오는 거예요. 그 숫자만이라도 우리가 막아내면 교인들만 막아도 이 나라가 이 정도로 술판, 개판이 되지는 않는다구요.
이렇게 범죄가 늘어나고, 이렇게 가정이 파괴되고, 우리는 후진국에서 이제 중진국으로 들어온 지가 얼마 안되고, 개발도상국 벗어 난지가.. 아직 그 가운데 있고 지금 IMF가 또 오느냐, 왔다 갔다하는 이 상황인데도.. 동방예의국가예요. 지금 우리 이혼율은 프랑스도 앞지르고, 일본보다 0.2% 앞지르고 있어요. 남의 나라 일로 생각했는데 우리가 점점 다 따라가고 있고, 아니 다 추월하고 있어요. 교통사고 제일 많고 이혼율까지 제일 많을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범죄까지 이렇게 많아지면 어떻게 하느냐 말이예요.
이 배후에는 다 뭐가 있느냐? 사탄이 있고, 음란한 음주 문화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은 술 못먹게 하는 종교는 개신교밖에 없습니다. 어느 종교라도 다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서 술 좋아하는 분은 개신교에 잘 안 나옵니다. 믿기는 믿고, 제가 말하기는 어렵지만은 거기에 가면 괜찮은데요 합니다. 이런 말 수십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술 끊어야 됩니다. 오늘 나오신 분들, 안끊고 나오는 분들, 오늘 끊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끊을 수 있습니다. 술, 담배 끊어야 여러분에게 좋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리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술과 도박과 여자는 왕자를 거지로 만들기에 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글리스턴경은 전쟁과 흉년과 전염병 모두 다 합쳐도 술이 끼치는 해악에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도 지금 200명이 죽었다구요. 술로 인해서 지금 얼마나 많이 매일매일 죽어갑니까? 지난 번 장티푸스로 온 나라가 펄쩍펄쩍 뛰어도 몇 명 죽었습니까?
그러나 술에는 밤마다 수천, 수백명이 매일매일 죽어가고 더 무서운 전쟁, 이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이 있는 재난은 없습니다. 홍수가 나봐야 몇 명 죽습니까? 홍수가 나봐야 얼마나 손해 납니까? 오늘 술집 뒤에는 수많은 조직 폭력배가 있고, 그 뒤를 봐주는 권력들이 단속하는 분들이 다 봐주고, 단속한다고 전화하고 가고, 이러니까 끊임없이 술집이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말하기를 악마는 사람을 망치려고 찾아 다니는데 너무 바쁠때는 자기대신 술을 보낸다. 이런 말이 있어요.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와요.그러니까 술, 마귀라고 보아야 합니다. 술 마귀입니다. 술에서 벗어나는 길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 믿고 성령충만하면 술은 아무것도 아니것으로 보입니다. 오 술이여가 아니예요. 에.. 술이여..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따라해 보세요. 술 마귀야, 떠나갈 지어다.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기쁨을 얻으려고 술을 먹었다면 성령으로 참 기쁨을 얻으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성령으로 말로 다 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문이 열리면 다른 문들은 다 닫힙니다. 죄악의 문이 닫힙니다. 불행의 문이 닫힙니다. 괴로움의 문이 닫힙니다. 하늘문만 열리면 이런 저주의 문은 다 닫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바로 믿지 않고, 교회생활, 성령충만한 생활을 안하면 다른 문이 다 열립니다. 우리나라에서 교회 비판하고 하지요. 이 문, 교회의 문이 닫혀 보아요. 세계에 우리와 비슷하게 술많이 먹는 나라가 소련입니다. 소련은 왜 술 천국이 되었느냐? 옐친 보십시오. 늘 벌게 가지고... 그러나 결국 임기 못 채우고 물러나는 이유가 술 때문입니다. 소련은 온 나라가 술에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교회의 문을 닫고부터 술판이 벌어졌어요. 술을 먹어도 기독교 문화가 아닌 나라가 독하게 먹습니다. 커피도 독하게 먹구요, 술도 독한 것, 담배도 독한 것 피구요, 북한 사람들도 담배를 줄줄히 피우고, 독하게 피웁니다. 저 북한을 건지는 길도 성령으로 건져내야 할 줄 믿습니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 술병을 치워야 됩니다. 집에서 술병을 쫓아 내어야 합니다. 은혜에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잘못된 것에 빠지지 않는 길은 오직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셔서 다른 불의한 일에 저주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뭐든지 빠지면 안됩니다. 바둑이 좋지만 빠져 보세요. 바둑밖에 안 보입니다. 어떤 교인은 대표 기도 하다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아멘 해야 할 것을 ‘아다리’하더래요. 그것은 바둑에 빠진 거예요. 뭐든지 빠지면 죽습니다. 빠지면 안됩니다. 낚시에도 빠지면 안되고 술에도 빠지면 안되고, 미움에도 빠지면 안되고, 골프에도 빠지면 안되고, 도박에도 빠지면 안됩니다. 강원도 정선 지금 야단이 났지요. 증권에도 빠지면 안됩니다. 당구에도, 이 세상의 모든 것 좋은 것 같지만 빠지면 안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 있느냐?
성령에 충만해야 됩니다. 은혜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충만하는 길은 간단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냥 오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도 좋으냐? 네가 원할 때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아이 김하나 전도사 방에, 아들이라고 문을 확 열고 들어 가나요. 아들아 내가 들어가도 좋으냐? 며느리 집에 갈때도 아가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가도 좋으냐? 나는 며느리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오늘 나와 밥 먹을 수 있니? 오늘 시간이 괜찮니? 왜. 내가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녀의 시간과 생각과 계획을 내 것으로 구속시키지 않습니다. 너는 너의 길이 있으니까? 너의 생각이 있으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잖아요.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너희가 열면 나를 영접하기를 좋아하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너를 도와주고, 너에게 기쁨 주고, 은혜 주고, 좋게 만들고,” 할렐루야!
마귀는 그런 법이 없어요. 문 두드리는 마귀가 어디 있어요? 그냥 들어오지 좋으냐고 물어 보는 마귀가 어디있어요? 가룟 유다에게 물어보고 들어갔나요? 그냥 들어오는 것이지.. 틈만 있으면 들어오는 것이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예수 잘 믿는 길은 영원히 잘 믿게 주님이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해야 돼요. 주여, 내가 거룩하기 원합니다.
♪거룩하기 원합니다. 참 맘으로, 참맘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참 맘으로, 참맘으로, 찬송하기 원합니다. 참 맘으로, 참맘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참 맘으로, 참 맘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주여, 내가 당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럴때에 주님은 조용하게 무례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는 언제나 조용하게 평화스럽게 찾아와서 우리 가정에 평화를 주고, 아주 하모니를 이룹니다. 내 영혼에 기쁨을 내 삶에 새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갈때도 그냥 가시지 말고, 좋은 극동방송 틀고, 기독교 방송 틀고, 그것도 좋지만은 본 교회 목사 설교도 좀 틀고, 내가 테이프 선전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본인이 좀 원해야 될 것 아니예요. 설교도 자기에게 큰 은혜가 되는 계절, 절기가 있어요. 언제 그 설교가 참 은혜 되더라. 그러면 그것을 자주 틀고 듣는 거예요. 그러면 자동차 안이 천국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오늘 모든 성도들에게 오늘 베드로를 통하여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셨던 초대 교회의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교회에 임하고 이 시간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 임하고, 새벽기도 나오는 여러분에게 임하고, 여러분의 가정에 임해서 가정 식구들이 모여 기도 할 때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이세상 술 취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취하여 천국을 바라보고, 힘있고, 능력있는, 그리고 영광스럽고 거룩한 삶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설교(1)
우선동 목사
1. 새 술에 취함
13절에서 얼마의 사람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는 제자들을 조롱하기를 “새 술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단순히 술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왜 ‘새 술’이라고 했을까요? 술에 취하는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먼저 의식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점점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도 불가능해 집니다. 그리고 말에도 조리가 없어집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하는데 횡설수설, 중언부언합니다. 그 다음에는 자세가 흐트러집니다. 몸을 잘 가누지못하고 걸음걸이도 비틀거립니다. 게다가 허세와 만용까지 부립니다. 온 천지가 자기 것인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의도 없어집니다. 술 취했다는 말과 무례하다는 말은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게 되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입니다. 이것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술에 취한 사람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술을 마셔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술고래라고 부르지 술취했다고는 안 합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을 조롱하던 자들이 감히 그들을 술 취했다고 비웃지 못하고 새 술에 취했다고 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무식한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담대하게 다른 나라 언어를 구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꼭 술 취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모인 제자들의 이상한 모습을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인 술 취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습니다. 제자들이 말은 많이 했지만 누구도 횡설수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조리가 있었고 감동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의식도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들을 가리켜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술 취한 것 같은데 일반적인 술 취한 사람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 년 포도 수확이 끝남과 동시에 포도 틀에서 짠 새 포도즙을 담가 두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다음 해에 개봉하면 그것은 향기로운 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새 술을 히브리어로는 ‘티로쉬’라 불렀는데 ‘마음을 사로잡다’, ‘마음을 빼앗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무리들은 성령 받은 주님의 제자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새 술’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맞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성령이라는 전혀 새로운 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향기롭고 감미로운 진리의 새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엡5:18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했던 것입니다. 비슷한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방언하는 제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던 무리들도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잘 알고 우리를 좋아하는 같은 성도들에 의해서만 확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 밖에서 주님을 부정하고 성도들을 조롱하는 사람들마저 우리의 새로운 변화를 인정하게 되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진정 성령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에 속한 모습으로 살고, 교회에서는 신자의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소주나 맥주에 취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에 취하셔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 충만의 시간
베드로는 방언을 하는 자신들이 술에 취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해 그때의 시간이 제3시였던 것을 15절에서 밝힙니다. 제3시는 요즘 시간으로 아침9시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아침9시, 낮12시, 오후3시 이렇게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기도시간인 아침9시에 술을 마셨을 리 없다는 의미로 그 시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오순절과 같은 절기에는 아침10시까지 보통 금식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금식 시간 중인 아침9시에 술 취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성령 충만함을 자타가 인정한 시간이 아침9시라는 사실에 대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9시는 보통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현실적으로 가장 세속적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버겁고 피곤한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에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지게 될까요?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봐야 할 사람, 하고 싶지 않은 일 그러나 해야 할 일, 건너뛰고 싶은 과목 그러나 나가야할 진도,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 아침11시가 넘은 시간에 우리의 영혼은 예배당에서 은혜롭게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9시나 이 맘 때는 어떻겠습니까? 그때에도 여러분이 여러분의 집이나 일터나 학교에서 성령 충만한 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내일 하루의 시작을 진리에 사로잡혀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시각으로 시작하시겠습니까? 내일 아침9시에 여러분들 주위의 동료나 지인들이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자신들과 동일한 지극히 평범하고 속된 사람 중의 하나로 여기든지 아니면 향기롭고 감미로운 예수 잘 믿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성령 충만함은 주일에, 예배당에서, 예배시간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성령 충만함은 주일이 다 지나고 나서 월요일 아침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제일 말씀과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시간에 성령님을 의식하며 진리의 빛 속에서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성령 충만함은 별도의 시간이나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세속적일 수 있는 월요일 아침9시에도 성령님을 좇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진짜배기 신자입니다. 목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성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말세에 부어주시는 성령
베드로는 16절 이하에서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각각 다른 언어로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을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한 욜 2:28-32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욜2:28에서 “그 후에”라고 기록된 것을 의도적으로 “말세에”라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그가 성령이 오심으로 마지막 날이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말세’는 메시야가 오실 때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을 성령께서 오신 시대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부어진 영은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모든 육체에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말씀이 이제 오순절을 기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모든 육체”는 직접적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을 가리키지만, 멀리는 앞으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할 미래의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도 다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어 주다”는 단어는 더 정확히는 ‘퍼붓다’가 됩니다. 마치 한 여름날에 맹렬한 소나기가 쏟아질 때의 강렬한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억수로 퍼붓는 소나기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혜주심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과 성령의 세례는 연령이나 신분에 제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일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때까지 성령은 유대 지역에서, 그것도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하셨지만 오순절 이후부터 성령은 온 세상에 그리고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그래서 말씀을 깨닫고 자신의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분들 위에는 성령이 폭포수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세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은혜를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 위해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성령이 임하실 때
베드로는 17-18절에서 요엘서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이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합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되며, 남종들과 여종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예언”은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고, “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상하거나 특별한 장면을 보는 것, “꿈”은 잠을 자는 상태에서 특정한 상황을 보거나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하면 점쟁이들이 입신하여 과거를 말하고 장래를 말하고 꿈을 해몽하고 하는 식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면 기도 받는다고 하고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예언기도 받으러 찾아가기도 합니다. 말로는 주여, 주여 하고 하나님을 찾지만 세상 점쟁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두 번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척하는 신비주의 신앙입니다. 또 다른 경우의 오해는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하니까 인간의 희망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비전’이 그것입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와 같은 내용으로 예언과 환상과 꿈을 설명하려 듭니다. 목사는 목회 성공의 야망을 가져야 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성공의 꿈을 가져야 하고, 학생은 원하는 대학 합격이라는 소원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들을 비전으로 포장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속의 예언, 환상, 꿈이 오늘날에는 신비주의나 비전 두 가지의 오해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된 예언과 환상과 꿈이란 무엇입니까? 요엘서는 선지서입니다. 선지자들이 꿈꾸어 왔던 것들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한 회복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그 소망의 핵심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고 그분이 다스리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나 예레미야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심판과 회복을 동시에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했던 예언이며 전했던 환상이고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사11장을 보십시오. 1-2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10절은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환상이고 꿈이며 이것을 전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행2:3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불이란 이사야서에서 심판하고 소멸하여 정하게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을 정결케 하여 자기 백성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에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17-21절의 내용이며 요엘 선지자가 꿈꾸던 비전입니다. 그리고 요엘서의 말세의 현상이 피와 불과 연기로 나타난다고 19절이 말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가 되는 천지개벽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만이 말세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자를 골라내는 작업도 말세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왔고, 성령이 임하였고, 그 결과 교회가 지상에 나타난 것이 바로 말세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어온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전하는 설교의 내용이 바로 예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전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천국에 들어가지만 복음을 거부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앞날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예언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내용을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방언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세다, 지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곧 심판을 당하리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술 취한 자들의 소리처럼 황당하게 들리겠습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이 사실에 대하여 미쳤다고 반응하고, 너나 믿으라고 조롱합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초대교회 시대에도 있었고, 노아 홍수 때에도 있었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의 시대에 참으로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자는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하는 목사와 성도들이 예언자이고 환상을 보는 사람이며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제가 이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참된 예언을 하는 사람입니까? 누가 바른 환상을 보는 사람입니까? 누가 올바른 꿈을 꾸는 사람입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예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전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확신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언자입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보물을 쌓고자 애를 씁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 저 너머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환상을 보는 사람이요 주님이 주신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려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 그리고 은혜를 누리게 되지만, 그 말씀과 초대를 거부하면 그에게는 예비 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21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는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아무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살아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 모두 위에 그리고 우리의 전도를 받는 이 지역 모든 택한 백성들 위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2)
우선동 목사 / 열린문교회
1. 초대교회 첫 설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원근각처에 흩어져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2백만 명 가량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외지에서 절기를 지키러 모여든 유대인들로 인해 예루살렘 시내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때 만약 무슨 일이든지 일어난다면 그것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예비하신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셨으며 그로 인해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급속히 빠르게 성장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권능을 받게 되었고 즉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그들이 배우지도 않은 나라의 말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이적이었으며 그 이적은 예루살렘 거리에 몰려든 많은 순례자의 무리들을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그렇게 각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자기 사는 곳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제자들을 보며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행2:2-4에서 묘사하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장면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초자연적인 소리가 들렸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임하심을 보았으며,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배우지도 않은 언어를 말하는 초자연적인 이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주님의 제자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14절부터 나타나는 복음의 선포, 곧 설교였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여 설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그 땅에 교회가 태동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일이나, 선교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나, 복음전파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아닌 곧장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하여 보게 되겠지만 사도행전에는 설교 혹은 연설이 자주 등장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했던 3편 정도의 연설을 제외하고도 19편 정도나 되는 사도와 제자들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8편은 베드로의 것이며, 9편은 바울의 것이고, 스데반과 야고보의 설교가 각 1편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1/5은 베드로와 바울이 한 설교로 채워져 있으며, 여기에 스데반의 설교마저 추가하면 사도행전의 1/4이 설교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설교의 분량이 많습니다.
행 2:14-41은 성경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첫 번째 설교이자 주님의 제자가 했던 가장 처음의 설교, 초대교회의 첫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는 사도적 설교의 원형이며 오늘날 모든 설교자들의 모범 설교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말씀의 전파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역의 최우선 순위는 항상 설교에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말씀전파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말씀전파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교회에 있어서 복음증거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표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주님의 지상사역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지상사역이 막1:15에 나오는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최우선 순위도 말씀의 전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3년의 공적인 생애를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설명해 주시고 자신에게 나아온 연약한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다 보내셨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과 주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사역은 말씀의 전파 곧, 설교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왜 설교가 이처럼 중요합니까? 이에 대하여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설교는 한 편의 듣기 좋은 강연이나 유익한 하나의 교훈 정도가 아닙니다. 설교는 한 사람의 전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대신하는 주님의 사역입니다. 성도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뜻을 발견하게 되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게 됩니다. 성도는 그 설교를 통하여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도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 증거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시는 도구인 설교가 점차 그 빛을 잃고 가치를 상실해 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찬양이나 연극이나 간증이나 큐티나 성경공부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설교를 대신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설교는 줄어들거나 생략되고 성도들이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들이 늘어가고 있으며 설교시간은 짧아지고 찬양시간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첫 번째 원인은 설교자들에게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만으로 만족하려는 충성스런 설교자들이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육체에 굴복하지 않고, 사단과 타협하지 않을 설교자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고 있으며, 현재와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은 제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서, 영원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전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우목사의 겉모습을 바라보지 마시고 우목사의 음성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의 뜻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2천 년 전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밝히기 위해 구약성경의 욜2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을 17-21절에서 보았습니다.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요엘 선지자는 말세가 되면 성령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충만히 부어질 것이며 또 여러 가지 기사와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었는데 베드로는 바로 그 예언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자신들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21절을 통해 베드로가 욜2장을 인용한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날을, 그리고 해와 달이 어둠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종말 직전에 도래할 대환난을 의미합니다. 그 환난과 종말이 지금 당장 닥친다 해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요엘의 예언을 결론 삼아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요엘이 언급한 징조나 기사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아도 한 인간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는 것은 그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확고한 증거라는 의미에서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이 달동네 나사렛 출신인 인간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로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16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황제의 신전이 우뚝 서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감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할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정확하게 답했습니다. 거지 몰골을 하고 앞에 서 계신 자기 스승의 모습 속에서도 베드로는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구원자십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 고백을 받으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승화된 그 놀라운 고백은 실은 베드로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황제가 아닌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함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직접 경험한 베드로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요엘 선지자의 말로 자신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음을 전파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것임을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흔히 타 종교에서 주문을 외우듯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기도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창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은 창2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4:25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창4:26은 하나님께서 형 가인에게 맞아 죽은 동생 아벨 대신 주신 셋의 아들 “에노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유한한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의미의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에노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바른 신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가 있는 공적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한계와 연약함, 나아가 죽음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문제임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때, 다시 말해 언젠가 자신의 생이 공동묘지에서 마감할 수밖에 없음을 통감했을 때, 그제야 죽음 이후를 책임져 주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마음을 다해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종말, 나의 마지막 그리고 그 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에노스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원래 죽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이던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은 죄 때문 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삯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는 자신을 구해 낼 수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구원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참 생명이자 구원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입니다. 롬10:13-14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한 ‘부름’ 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1:12을 통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음을 밝히신 하나님께서는 요3:16에서 당신의 약속을 한 번 더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듯 당신의 이름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죄인 됨과 그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임을 성령님의 은총으로 통감한 사람이 온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그를 건져 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이 시간 구원받은 성도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까? 답은 ‘네’라고 하셔야 합니다. 롬10:10 말씀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님의 은총속에서 우리의 죄인임과 에노스임을 깨달아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미 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역시 계속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아니 구원받았기에 더더욱 주님의 이름을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입으로 주님을 부르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삶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 즉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분의 인격과 생명으로 살고 우리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구원에 대한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실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자신이 에노스임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연약한 존재,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 죽음 앞에 무기력한 존재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실 것입니다. 그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주 예수님만을 붙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를 잘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 목사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보여주시기를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잘 들으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설교를 잘 들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설교에 집중하면 내 자신의 참 모습이 보이고 고쳐야 할 나의 연약함이 보입니다. 설교를 잘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담대한 마음이 생겨서 험악한 세상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설교를 잘 들을 때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설교를 잘 들어야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주님을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설교를 잘 들어야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이런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포기할 수 없는 꿈
수영로교회 / 이규헌 목사
본문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 사도가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요엘서에서 말세에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했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에는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말세에’라고 했는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시는 때까지를 말세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오늘 이 시대 전체가 말세입니다. 인류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고, 그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역사의 모든 것이 종결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오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신자가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신앙은 길을 잃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승부를 거는 인생이 아니고, 마지막 날에 다가올 세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될 것을 믿는 신앙과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말의식을 가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모르니 긴박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영적 민감성과 긴장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데 예수님이 오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배 후에 예수님을 맞는다면 최고일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잘 때도 옆에 옷을 준비해놓고 잤고, 구름 낀 날에는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순수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늘 회개해야 하며 언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혼란을 주고 영적으로 어지럽게 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를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때를 분별합니다. 오늘날 많은 영적인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그 날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넷째, 신앙생활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언제나 오늘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이 반듯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매한 태도로 세상과 타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약속하신 것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입니다. 부어준다는 표현은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바닥을 긁는 것이 아니라 넘쳐 흐르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강권적으로 주장하시는 힘에 우리가 끌려가는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마지막 시대에는 마귀가 날뛰고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배교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악하고 타협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애매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배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강력한 사로잡음으로 믿기로 작정된 구원받은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압도하는 성령의 힘에 사로잡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때는 내가 임의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저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눈치를 보고 겁먹고 도망갔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였다고 일침을 가하며 거침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겁이 없어지고 눈치도 안 봅니다. 직장에서도 예수 믿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전도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을 부어주실 때 일어나는 뚜렷한 현상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입니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는 말씀처럼 이 꿈은 미래에 일어날 일의 막연한 추측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니 꿈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그 인생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젊은이나 늙은이나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막벨라 굴을 삽니다. 그 땅의 추장이 그 굴을 공짜로 주고자 했지만 굳이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500년 후에 그 곳이 가나안 땅의 심장부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마치 사진 찍듯이 정확하게 내면에 새겨집니다. 형들이 그렇게 미워하는데도 요셉이 그 꿈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그 꿈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하지 않았고 그 꿈이 범죄의 자리에 빠지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선명합니다. 한 개인에게도 주의 영이 임하시면 그 인생 가운데 어떤 꿈을 주십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십니다. 특별히 미래가 보이는데, 이것이 우리 삶을 흥분되고 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삶 속에 포기할 수 없는 꿈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회복의 꿈입니다.
창세기 1장 26~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을 하나님과 동급의 대리자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적 권위입니다.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창조의 일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존엄성, 가능성, 잠재력은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며 하나님의 속성과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거의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존엄성과 가능성, 인간에게 있던 그 고귀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비극은 인간됨의 목적이 사라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찾아온 가장 큰 비극입니다. 왜 사는지, 왜 태어나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존재할 것인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먹고 사는 것에 매여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본래 목적을 위해 살지 못하고 허무한 목적을 가지고 살다 보니, 그 목적을 이루어도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죄를 짓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존재가치와 인생의 뚜렷한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우리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적이 뚜렷합니다. 어느 역본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복입니다. 회복은 내적인 회복, 내면의 변화, 존재의 혁명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이고, 그 목적은 먹고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장들의 작품은 작가의 영광을 드러내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대작이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고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때를 ‘속사람의 변화’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면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 3:16)」 예수를 믿어도 겉만 변한 사람이 있고, 속이 변한 사람이 있습니다. 금에도 도금이 있고, 순수한 금덩어리도 있습니다. 속이 변해야 진짜 신자입니다. 그 때 바로 회복이라는 말을 씁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내적인 변화가 확실하게 일어나면서 존재의 혁명이 일어나 삶의 목적이 정확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 추구하고 좋아하던 것에 흥미가 없어지고, 관심과 관점이 바뀌고 가치가 달라지고 취미도 달라집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하면 살아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밥맛이 생기고 인생이 재미있어집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죄 짓는 삶이 더 이상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변한 사람은 절대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 성령께서 내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바라보고,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회복이라 하고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회복의 역사,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우리에게 심어져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날 때,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멋있고, 보기만 해도 감탄이 일어납니다.
둘째, 공동체의 꿈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120명의 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신약의 교회가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물 붓듯이 부으시니 거대한 공동체가 일어났는데,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3천 명이 돌아오고, 나중에는 5천 명, 나중에는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돌아와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의 흑암 권세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 실현하고 축복을 흘려보낼 교회가 지상에 시작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은 이 유대민족을 사용하셔서 열방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고 마침내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기까지 이루실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교회에 있습니다.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움직여 가느냐에 따라서 그 민족과 세대와 도시와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세에 교회의 향방과 움직임은 굉장히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축복하실 때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부흥은 한 부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로부터 장년까지 모든 세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계층에 변화가 일어나고 모두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부흥은 하나님의 편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파도가 밀려오면 인간은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남종과 여종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히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 젊은이들에게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도 부흥의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철야에도 기도가 뜨겁고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어린 아이의 맑은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가정 안에, 모든 세대 안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 사랑방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셔서 영적 광풍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애를 써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뿌리지 않은 씨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마치 봄바람이 불면 온 땅의 언 것이 녹고, 들녘에 우리가 뿌리지 않은 꽃과 풀이 돋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이 깨어나 변화할 것입니다. 예배 안에도 하나님의 큰 역사와 은혜가 있어서 회복이 일어나고 병이 낫고, 소망이 생기고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일으키시면 뚜렷한 증거들이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기획하고 꿈꾸지 못했던 그 이상의 역사들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그것에 몸을 맡기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37년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대형 교회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만족하고 안주하며 수영로왕국을 만들어 숫자가 많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몇 사람이 모였던지 주의 영이 임하시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꿈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흥을 강력하게 사모하면서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가 맛보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의 파도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셋째, 열방의 회복과 부흥의 꿈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부흥은 한 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일도 아닙니다. 열방 가운데 우주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역사는 산불과 같이 번져 아무도 그 불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타고 타 올라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붙어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 가운데 도시와 나라와 열방을 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100년 단위로 거대한 부흥의 파도가 일어났고, 20년 단위로 중간 정도의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07년에 일어난 평양 대부흥도 세기 초에 일어난 초대형 부흥의 불길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 일어난 그 파도는 미국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불길의 열매로,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같은 젊은 선교사들에 의해 한반도까지 넘어와 조선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오늘 부흥의 파도가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부흥의 불길이 시대마다 일어났고, 도시와 나라를 일으키고 다른 나라로 흩어져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작은 파도가 올 때는 가만히 누워서 먼 바다를 보면서 큰 파도가 오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부흥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도시나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도 어떤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임하셨지만, 모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사도행전에서 주셨던 지상명령에는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이 사도행전의 핵심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이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에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핍박을 통해서 강제로 흩어지게 하셨고,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 13장). 이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로, 흩어지기 위해 세운 교회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그 불을 끌어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가지고 복음을 흩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면서 그 교회의 탑 리더인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부흥이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한국 교회를 계속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세계 선교사를 보면 모든 역사의 흐름은 선교가 어디에 머물러있느냐에 따라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실 위기에 빠져있고,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해외에 있으면서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소식에 눈물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다시 가능할까, 한국 교회가 무너질 것인가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학적으로보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사용하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 교회가 아주 뜨겁게 일어나고 있지만 세계선교를 감당할 지도자와 신학이 빈약합니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교회도 일어나고 있지만 성경에 대한 깊이가 부족합니다. 만약에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를 돕고 주도한다면 주님은 한국 교회를 사용하시고 교회를 붙드실 줄 믿습니다.
개인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선교에 헌신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2월 3일부터 있을 선교부흥회는 인생의 본질을 확인하고, 역사를 관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선교적 삶(Missional life),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선교적’이라는 말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가 선교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대추수와 대부흥기에 선교적 삶, 선교적 교회로 우리가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개인과 가정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다니고 사업을 해도 선교에 눈을 뜨면, 내 인생의 존재이유를 발견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선교를 떠나지 않아도 내 삶이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말세 중에 말세이고, 어떤 때보다도 기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이 때에 주의 영이 사도행전에 임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하셔서 각 개인에게 구원의 사건이 뚜렷하게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겉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혁명이 일어나고 삶의 가치와 목적이 바뀌어 진짜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 성령께서 직접 통치하시며 물 붓듯이 부으셔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각 사람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이 날마다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부흥의 불길로 민족과 세계 열방 가운데 흩어져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속히 하나님의 재림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꿈과 환상
사도행전 2:16-18 / 김남수 목사
한국에서 오신 분들과 또 미국의 여러 지역과 오래 헤어졌던 가족들, 친구들 주님 안에서 예배 드리면서, 함께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도록 특권을 주셨다는 것은 한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은혜 받게 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장 2장에 나온 말씀을 계속해서 공부하는데, 첫 부분에는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모여서 같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강하게 임하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각 사람 머리 위에 불이 혀같이 갈라져서 머리 위에 마치 촛불이 켜져 있는 것처럼, 그런 불꽃이 보이면서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고, 그 사람들이 성령의 말하심을 따라 다 방언을 말하고, 이러므로 전에 경험하지 못했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방언을 시작했는데, 그 조용한 다락방에서 소란한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몰려오고, 또 방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서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방언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유는 그 방언을 하는데, 각각 자기들의 방언으로 뜻을 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사람들이 바대에서 왔고, 메대 엘람, 또 메소포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본도와아시아,브루기아와밤빌리아,애굽과구레네,리비야까지 여러 지방, 로마에서 시작해서 아프리카의 여러 크고 작은 나라에서 와서 절기를 지키려고 온 사람들이 보니까, 자기들이 쓰는 말로 저 사람들의 방언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므로 참 놀라왔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면서 어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서로 어쩐 일이냐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나 보다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12,13절에 보니, 어찌 된 일이냐니까, 어떤 이가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너무 술을 마셔 취했나 보다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일어 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보고 듣는 것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대낮인데, 여러분 생각처럼 이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요엘이라는 선지자가 여러분에게 예언 했던 것처럼,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라는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진 이 사건이 이 말씀입니다 라고 저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 오늘 성경 본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지금 오순절이라는 주제를 갖고 말씀을 드리면서 오순절에 일어 난 사건이 성령 강림 사건이고, 성령 충만한 사건이 있었을 때에 어떤 일이 있어났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관심 있게 보아야 될 것인데, 오순절 성령 강림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난 다음에 두 가지 현상이 생겨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저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고, 또 하나는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확실하게 무엇이냐는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언어가 흩어 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사를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불행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게 되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야 하고, 그리고 자기들 민족끼리 대화 해야 하는 것을 남과 같이 감정을 섞어 이야기 할 수 없는 제한을 받게 됩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은, 성경에 있는 말씀처럼 큰 배가 작은 키에 의해 방향이 결정 되는 것처럼, 사람의 혀는 이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사람의 혀는 마치 작은 불이 큰 불을 만들어서 집도 사르고, 나무도 태우고, 산도 불태우는 것처럼, 이 말은 불과 같다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 입술에 말로 내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고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사람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하고,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인간이 흩어진 언어를 인간이 교만하고 범죄하므로 흩어진 언어를 성령이 강림하시면서, 그 언어의 일치와 연합을 이루셨다는데,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사실,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방언 하시는 분들과 방언 하지 않는 분들의 갈등도 있고, 방언하는 교회와 방언하지 않는 교회와 대단히 어려움을 겪게 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우리 교회는 방언을 하는 교회라고 종종 말을 합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믿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잘 못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방언이 최고의 은사다, 방언이 무슨 특별한 것처럼 해서 방언을 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부작용이나 교만한 행동이 방언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경은 방언의 위험과 유익과 조심성과 방언의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과 은사를 사용하는 주의 점을 사도 행전,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성경적 가이드 라인에 의해서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러나 성경이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하고 영적 언어인 방언의 중요성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을 공부하면서, 성령 충만을 공부하면서, 성령 세례를 공부하면서, 그 다음에 성령의 은사들을 같이 공부해 나가면서 하나 하나 계속해서 성경을 배우겠습니다. 오늘 중요하게 생각 할 것은 우리가 언어 생활이 중요하고, 영적인 언어가 중요하고, 신령한 언어인 방언이 성경적이라는 것과 또 신령한 영적 언어가 기도 생활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방언이라는 내용이 오순절, 성경의 중요한 사건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전제해 말씀 드립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목사, 장로, 전도사, 집사, 안수 집사의 직분을 맡길 때에는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경험을 가졌는지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인터뷰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으면 언어생활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말이 바뀌기 전에 마음이 바꿔야 되는데, 마음속이 바뀌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가 바뀐 것은 곧 심령의 변화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바뀐다는 것은 바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자가 목사이던, 전도사이던, 장로이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의 생각 속에는 부정적이고,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어둡게 생각하고 교회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적어도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은혜 받은 마음, 하나님이 주신 은혜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그래야 그런 말을 하고, 말을 해야 사람을 치료하고,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강단에서 은혜 받지 못하고 율법적으로 사람을 때리고 심판하고 재판하기 시작하면 교인들의 심령이 죽게 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체험과 은혜를 받은 경험이 있느냐를 우리 교단에서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임직식을 할 때에 여러분들이 준비하고, 기도 하시고, 성령 충만 받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중요하게 이렇게 은혜를 주신 다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 나는가 하면은 언어의 변화가 일어 나고, 사고와 생각의 변화가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부어 주시면, 아이들은 예언 할 것이요, 젊은이는 환상을 볼 것이고, 늙은 이는 꿈을 꿀 것이라는 변화가 일어 날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고와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과 우선 순위의 변화가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런 변화가 일어 나게 되고, 그런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교육을 생각하고 사립 초등 학교를 세웠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후원을 하고, 사립 학교를 잘 시작해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잘 가르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원해 장기적인 투자이기 때문에 교회가 정말 많은 후원을 해주어서 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후원을 해야 될 지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 3년째 되는 해에, 아이들이 에세이를 써서 몇 명이 발표하는 것을 지켜 봤습니다. 그 중의 한 아이는 부모님이 성령 충만한 은혜 가운데 늘 아이들을 기도로 키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가 에세이를 발표하는데, 그 아이는 3~4학년쯤 되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친구, 구주이신 것과 학교가 좋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또 이 학교가 초등 학교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중,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계속해서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는 이 곳을 졸업을 해서 앞으로 선교사로 나가게 되겠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예언적, 은혜를 받지 않은 어린이는 이렇게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서너 명이 어린이들이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어린이나, 다른 어린이도 마찬가지여서 제가 부교장에게 물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이렇게 쓰도록 지시했느냐고 하자 어린이들의 스스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은혜를 받으면 예언적, 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육신에 머물고, 자기 중심적인 야망에 붙잡혀서 평생을 살다가 그냥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면 거룩한 꿈이 생기고, 거룩한 비전이 우리에게 생겨지도록,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 주신 목적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꿈을 갖게 되고, 젊은이들도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일생에 내가 무엇을 해야 될 일이냐. 어느 가정에서, 며느리, 사위를 맞이 할 때 이렇게 물어 본다고 합니다. 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이렇게 물어 본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인생은 왜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 가며, 무엇을 위해 인생을 불태울 것인가 하는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은혜 받기 전에는 확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확실 했는데 잘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확실한 젊은이로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그리고 대단히 영웅적인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이 하나님을 방해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목표를 세웠던 것입니다.
아메섹 도상에서 은혜를 받자마자, 이 청년은 목표가 달라 져서 내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다. 내가 살던지, 떠나던지, 거하던지, 떠나던지, 몸이 있던지, 떠나던지 내 삶의 목표는 이것이다. 내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표다 하는 것이 확실 해 졌으므로, 확실한 목표를 위해 달려 갈 때, 고난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다 지나고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쓸데 없는 일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 목표가 무엇이고,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젊은이들의 꿈이 무엇이고, 나이 많은 분들의 꿈이 무엇이고, 성령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받게 하시고, 성령 충만한 후에 목적이 우리가 변화돼서 꿈을 꾸고, 이상을 갖고, 환상을 보는 이 거룩한 꿈이 우리 마음 속에 생겨지는 것이 은혜 받은 사람들의 대단히 중요한 역할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냥 살아 가기 쉽습니다. 꿈이 없으면 방황하기 쉽습니다.
인생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가는데, 우리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확신 있는 삶을 살아 가고, 분명히 걸어 가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되지, 그냥 실수하거나, 여기다 저기다 우왕좌왕할 시간이 없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확실한 꿈이 없어서 인생을 방황하게 되고, 내일에 대한 분명한 꿈이 없어 불안해서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5,6년 전의 통계입니다만, 미혼 여성 1,000명 중 57%가 토정 비결을 보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 토정 선생이 옛날에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일종의 점보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이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가 운명이라는 것이 다가 와도 미리 알고 재주껏 피하면 피할 수 있다는 요행 심리가 우리에게 많습니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불안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을 알아 보고 피하려고 하지, 우리가 원대한 꿈과 먼 비전을 갖지 못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참 어려움입니다. 9년 전의 통계인데, 삼성 증권의 사원 336명을 조사 했습니다. 사원 41%, 대리 52%, 간부 36%가 점을 봤다는 것입니다. 이 엘리트 사원들이 점 보는 이유를 조사 해 보니, 29%가 장래에 대한 불안 이라는 것입니다. 24%가 재미로 봤다는 것입니다. 점을 보고 재미를 느끼는 것이 문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호기심, 우연, 시험 보기 전에 합격, 불합격을 알고 싶어서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진정한 꿈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런 미신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떠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묶여서 야망과, 욕심에 사로 잡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 수 많은 사람들의 고난과 가난과 무지와 질병과 죽어 가는 사람들을 건질 하나님의 거룩한 꿈, 인류애적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저들을 위해 피 흘리셨으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도 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꿈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면, 나이 많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늙은이들도 꿈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권사님 한 분이 혼드라스에 가셨습니다. 쉬러 가셨는데, 얼마나 부엌에서 일을 하시고, 아이들을 먹이고, 신바람 나게 일하시는데, 학교에 큰 도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학교를 갓 시작했으니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쉬러 가셨는데, 선교사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몇 달 동안 아이들을 돌보고, 먹이고, 그 식당, 부엌, 배식에 책임을 지고 도와주신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연세 드신 어른들, 이곳에 바쁘신 일이 없으시면 저에게 말씀 하시면 제가 모시고 가고, 가면 여러분들이 어디든지 필요하고, 남은 생애 선교사로 일할 수 있는 꿈을 갖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일생을 바쳐서 저 고난 속의 불쌍한 자들을 위해 내 생애를 바칠 각오와 거룩한 꿈을 갖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돈을 버시거든 그 돈을 벌어서 나만 잘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 돈을 가지고 사회 사업,교육 사업과 구제 사업, 그리스도의 복음 사업을 위해서 쓰실 수 있는 꿈을 가지고 돈을 버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불쌍한 장례식은 이민 와서 10년, 20년 허덕 허덕이다 소처럼 일하고, 한 번 쉬지도 못해 교회도 못 나오며, 밤낮없이 일하다가 쓰러져 돌아 가시는 분들을 보면 참 가슴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이런 장례식은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 번 거룩한 꿈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좀 더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과 꿈을 이루어 드릴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잡지에 나온 내용을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달, UN에서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질문은 한 가지였는데, 지금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 지고 있는 식량 부족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정직한 의견을 부탁 드립니다. 이렇게 각 나라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설문지는 크게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먹어 본 지 오래 되어 식량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서 유럽에서는 풍족한 삶을 살아 가니 부족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동유럽에서는 의견이라는 뜻을 모르고, 중동에서는 해결책이 무엇인지 모르고, 남미에서는 부탁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시아에서는 정직함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뜻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국의 유익과 번영과 안전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나라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미있게 지금 지구촌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풍자적으로 나타낸 말인 것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꿈, 그래서 오순절 때 은혜 받은 교회, 은혜 받은 한국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불로 불로, 성령 충만 그 다음에 나만 나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꿈과 환상과 비전을 잊고 자기 중심에 빠져서 다시 무서운 시련과 정결케 하는 가마 속에 들어 가서, 다시 연단 속에 들어 가서, 불 속에 들어 가서 다시 껍질을 벗고 불순물을 태워 버리는 다시 순결한 신앙으로 돌아 와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우리가 깊이 생각 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인 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지금 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도 받았습니다. 은사도 주시고, 방언도 말하고 축복도 받았습니다. 여기서 그 은혜를 주셨으므로 거룩한 꿈이 불타게 하시고, 거룩한 영광과 비전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 차게 하옵소서. 사랑하시는 주님! 이제 저희들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주셔서 이 땅의 있는 야망과 이 세상에 있는 꿈을 속히 놓게 하시고, 고난 당하고 있는 지구촌의 수많은 구원 받지 못한 영혼과 가난과 굶주림과 헐벗은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거룩한 꿈을 갖고 일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저 서바나를 꿈꾸었던 거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전 세계를 바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위대한 비전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꿈을 계획하십시오
사도행전 2:17-21 / 김경수 목사
사람들은 하루를 살 때 직장, 사업장, 학교, 가정 등등, 정해진 영역에서 자신이 계획하고 경영합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 날들이 모여 일생이 되는데 하루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듯이 일생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생각하고 계획하며 경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하루를 삽니다. 정해진 궤도에 의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하루가 흘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놀라운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게 되고 특별한 일은 나타나지 않는 하루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 언쟁이 일어나면 하루를 그르치게 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염려합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낙심합니다. 이런 삶은 수동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하루를 수동적으로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건설적으로 계획하며 생산적인 결과를 기대하면서 하루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극도로 절제하게 되고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며 종국적으로는 기대했던 결과를 이루는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꿈을 계획하는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되어 풍성하고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는, 꿈을 계획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좋지 않은 계획들을 잘 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집안 내력을 보면서 자신은 앞으로 이런 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계획을 세웁니다.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부정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의 소유와 배움, 그리고 외모로 인하여 미래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을 계획을 세웁니다.
어떤 사람은 겨울 초입이 되면 의레 감기가 올 것이라고 계획을 세웁니다. 사업을 하면서도 부도가 나고 넘어지며 실패할 것이라고 계획을 세웁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언젠가는 해고를 당하거나 좋지 않은 일 때문에 결국은 나가게 될 것이라고 계획을 세웁니다.
혹자는, 부부간의 관계도 주변의 다른 부부처럼 근근히 지탱해 나가는 정도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다가 이혼을 하게 될지도 모를 것이라는 계획을 세웁니다. 자녀들을 보면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다릅니다. 꿈을 꾸고 환상을 바라보며 미래를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그들을 위해 유익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떠나가시면 아버지께 간청을 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일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미래의 일들을 말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꿀 것을 희망하십니다. 대부분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패배적인 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 많습니다. 마귀는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사람으로 하여금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패배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고 또 그런 계획들을 하도록 부추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가 희망적이고 발전적이며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나아가 더 풍성하기를 원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 중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복되고 형통하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좋은 것이 예비되었기에 그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까? 감사할 일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계획은 형통하고 복되며 풍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형통함을 계획하십시오. 복될 것을 계획하십시오. 풍성할 것을 계획하십시오. 날마다 좋아질 것을 계획하십시오. 앞으로 창대할 것을 계획하십시오.
혹자는 의구심을 가질지 모릅니다. 잘 되는 사람은 타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특별한 사람입니까? 누가 태어나면서 잘 되는 사람이라고 정해진 것입니까?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미래가 형통하고 창대하며 풍성한 복을 누릴 특별하고 정해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보다 더 특별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정해진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최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최고이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면서 저와 여러분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발에 채이는 돌과 같은 자들이 아닙니다. 만세전부터 예정하시고 택하시며 정해진 시간에 불러내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그리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위와 실수들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못난 사람이며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확정을 짓습니다. 남들은 잘 될지 모르지만 자신만은 결코 잘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어떻게 부르는 줄 아십니까?
(사43:4상)-“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고 부르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호세아서에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께서 호흡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벅찬 흥분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배신하며 아프게 합니까? 그럴 때마다 허탈해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총 맞은 것처럼” 가슴 절절한 아픔을 토해내십니다.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 웃음만 나와서 그냥 웃었어 허탈하게 웃으며 하나만 묻자 했어 우리 왜 헤어져 어떻게 헤어져 구멍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 잡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진 않아 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구멍난 가슴이 / 총 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살수가 있다는 게 이상해 어떻게 너를 잊어 가슴이 뻥 뚫려 채울 수 없어서 죽을 만큼 아프기만 해 총 맞은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떠나시거나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또 인내하시고 관용하시며 또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들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처럼 위태할 때도 먼저 가슴 아파하시고 상한 갈대처럼 아파할 때도 먼저 슬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비록 과거의 행실이 실수와 부끄러움으로 넘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만을 위해서 쓰신 것이 아니고 다윗만을 위해 쓰신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보내 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구구절절이 사랑한다는 말씀이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축복으로 가득 차고 넘칩니다. 이 모든 약속들은 모두 저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특별합니다. 최고입니다. 위대합니다. 보잘것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형편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잘 될 것을 꿈꾸십시오. 형통할 것을 꿈꾸십시오. 지경을 넓히는 것을 꿈꾸십시오. 결코 질병이나 죽음, 저주나 재앙, 실패나 부도 등과 같은 것을 꿈꾸지 마십시오.
꿈을 꾸었다면 지속적인 생각과 입술의 고백으로 항상 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꿈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꿈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승리할 것을 계획하십시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계획한 일들은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형통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고백하면 더욱 효과적입니다. 물론 항상 생각한 대로 되지만은 않습니다. 만약에 꿈을 꾸고 기대하며 진행되는 동안에 원치 않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손해볼 수도 있고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에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지속적으로 꿈을 생각하고 축복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며 끝내 나에게 모든 것이 축복으로 바뀔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눅18: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사이가 불편해지자 그로 하여금 좋은 땅을 선택하여 떠날 것을 권면합니다. 조카 롯은 배은망덕하게도 우선권을 양보하지 아니하고 선뜻 좋은 목양지를 향해 출발을 합니다. 나름대로 아브라함도 사람이기에 약간은 섭섭한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고 양보를 했지만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더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위대한 다윗에게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무료한 가운데 왕궁을 거닐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다윗은 그 여인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하게 되고 그 후에 밧세바를 통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치시므로 시름시름 앓게 되는데 다윗은 그 아이의 회복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땅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아이를 데리고 가십니다. 다윗의 하인들은 그 일로 인하여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 왕이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얼마나 상심할까 하면서 말입니다. 하인들이 수근대는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곧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음식을 준비하게 해서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하인들은 놀라지만 다윗은 지난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는 시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지난 과거의 실수가 하나님 앞에서 죄송하기는 했지만 철저히 금식하고 회개하고 난 이후에는 다시 미래를 희망하며 꿈을 꾸는 사람이 됩니다. 미래로 나아가는 길에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운 일이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운 일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미래에 주실 복을 소망했습니다.
다윗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아이를 데리고 가셨지만 더 좋은 아이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꿈을 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밧세바와 동침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꾼 꿈대로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솔로몬을 그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이 지금 꿈을 꾸고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는 삶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라며 한심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결코 그와 같은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와 같은 생각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들로 하여금 지난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운 일들을 기억나도록 유도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저주하고 한하면서 살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도 기억하지 않는 지난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운 일들을 잊어버리시고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와 같은 생각들이 떠오르거나 그 일로 마귀가 조롱하면 이미 지난 과거는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청산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결박하고 저주하십시오. 그리고 당당하십시오. 어깨를 펴시고 머리를 드십시오. 하늘을 향해 눈을 드십시오.
매일 매순간마다 꿈을 꾸고 생각하시며 입으로 고백하십시오. 그 기대 속에서 하루를 사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매일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미래는 창대한 복으로 가득차고 넘칠 것입니다.
나아가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한 한 여인이 불의한 재판장을 매일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재판장은 매일 찾아와 호소하는 이 여인의 원통함을 결국에는 해결해주고 맙니다. 이 여인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수동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줄기차게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유일한 길이었지만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래의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설령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계획하시는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능동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꿈을 꾼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흔쾌히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와야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하도 꿈을 꾸거나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지 않으니 강권적으로 꿈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꿀 수 있는 권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또 능동적으로 꿈을 꾼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큰 꿈을 꾸십시오. / 멀리까지 날아가는 꿈을 꾸십시오.
지경을 날마다 해마다 넓히는 꿈을 꾸십시오. / 강건할 것이라고 꿈꾸십시오.
사업이 형통할 것이라고 꿈꾸십시오. / 부부관계는 더 사랑스러워 갈 것이라고 꿈꾸십시오.
자녀들은 장차 머리가 되고 존귀한 자들이 될 것이라고 꿈꾸십시오.
목장은 분가할 것이라고 꿈꾸십시오. / 우리 교회가 창대한 부흥을 이룰 것이라고 꿈꾸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