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목차와 공자연보(孔子年譜)
제1편 학이
제2편 위정
제3편 팔일
제4편 이인
제5편 공야장
제6편 옹야
제7편 술이
제8편 태백
제9편 자한
제10편 향당
제11편 선진
제12편 안연
제13편 자로
제14편 헌문
제15편 위령공
제16편 계씨
제17편 양화
제18편 미자
제19편 자장
제20편 요왈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듯한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현재 논어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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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주 영왕 20년(B.C 552)에 주의 제후국 중 하나인 노나라, 즉 현재의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나라의 대부인 숙량흘이며 어머니는 안징재이다. 둘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 아니하고 공자를 낳았다. 안징재는 이구산(泥丘山)에서 기도를 하고 공자를 낳았으므로, 자를 중니(仲尼). 이름을 구(丘)라고 하였다.
공자(孔子)라는 명칭에서 자(子)는 스승에 대한 존칭의 의미이다. 공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자라서 계자가의 창고지기와 소와 양을 치는 비천한 일을 하였으나 창고지기를 할 때에는 요량을 공평하게 하고 소와 양을 칠 때에는 소와 양을 번성시켰다고 한다. 공자는 무사였던 아버지 숙량흘의 피를 받아 체구가 당당했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으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달리 무(武)를 멀리하고 문(文)에 기울었다.
“열 다섯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한 것은 그가 문화적 전승자로서의 길을 내디뎠음을 후일에 밝힌 것이다. 특히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禮)를 중시했고 예에 대한 것을 많이 배웠다. 공자가 누구에서 가르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공자의 태생이 노나라였으며, 노나라는 일찍이 주나라 건국 공신이자, 주나라 문화의 창설자인 주공 단의 후손이 세운 나라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주의 문화를 정통으로 삼고 이를 이어받아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서주의 문화와 도덕으로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의 시대에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에는 삼환이라 불리는 세도가(孟孫氏, 叔孫氏, 季孫氏) 왕실을 누르고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노나라의 군주인 소공이 이들을 몰아내려 하다가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을 하고 1년 후 제나라에서 객사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향한다. 공자가 43세가 되던 해 노나라에 정공이 즉위하자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다. 이때 자로와 민자건등의 제자들의 그의 문하에 모여들고 공자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공자는 52세(B.C 501)에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결코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듬해 53세 때에 협곡에서 제나라와 노나라의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군주가 폭력으로 노나라 군주를 협박하려 들었다. 이에 노나라 군주를 수행하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러한 공에 의해 공자는 54세때에 대사구(大司寇)라고 하는 최고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해 공자는 삼환씨의 세력을 꺾고 정치적 개혁을 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나이 56세에 모국인 노를 떠나 약 14년간을 두고 다른 나라를 방랑했다. 즉 위, 조, 송, 정, 진을 찾았고 다시 위와 진을 거쳐 채와 초로 갔다. 그간에 세 차례 노에 돌아오기도 했으다. 그러나 그의 방랑의 여정은 초라하고 불행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갖은 수난과 박해를 받았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참된 군주를 만나 정치적 이상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끝내 그의 정치적 포부는 달성되지 못하였고, 현실 개혁의 의도는 늘 좌절되어야만 했다. 이에 공자는 젊은이들의 교육, 지식인들의 양성, 그리고 저술에 뜻을 두고 그의 나이 69세때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비록 현실 참여와 정치 참여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교육과 학문에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그의 제자는 3천명에 이르렀으며, 6예에 통달한 제자만 하여도 72명이나 되었다.
공자는 노나라도 돌아온 뒤 5년이 지나 74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그가 이룩한 사상에 비하여 그의 일생은 너무나 보잘것없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뛰어날 수 있었고, 또한 말년에 그의 교육적 성과가 있었기에, 유교가 지금처럼 집대성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보아진다.
공자 연보(孔子年譜)
1세(B.C.551) 공자 노나라 추읍에서 탄생
3세(B.C.549) 아버지 숙량흘 돌아감
8세(B.C.544) 유희를 할 때 제기를 가지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함
15세(B.C.537) 공자 학문에 뜻을 둠
19세(B.C.533) 송나라 계관씨에게 장가를 감. 위리(委吏)로 일함.
20세(B.C.532) 아들 리를 낳음
21세(B.C.531) 노나라의 사직리(司職吏)가 됨
24세(B.C.528) 어머니 안징재 돌아감
30세(B.C.522) 인생관이 확립됨. 노자에게 예를 물음.
34세(B.C.518) 맹씨 가문의 두 아들의 스승이 됨. 주나라의 도읍 낙양으로 여행하며 주나라 문화와 음악을 배움.
36세(B.C.516) 노나라 소공(昭公)을 따라 제나라로 감
37세(B.C.515)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에 전념함
40세(B.C.512) 잘못된 학설에 미혹되지 않을 정도로 성숙됨
46세(B.C.506) 주나라로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묻고, 장홍에게 음악을 배움
47세(B.C.505) 노나라로 돌아옴
51세(B.C.501) 노나라에 벼슬하여 중도재(中都宰)가 됨
52세(B.C.500) 노나라 정공(定公)을 도와 외교적 공을 세움
53세(B.C.499) 노나라 사공(司空)이 됨
54세(B.C.498) 노나라 사구(司寇)가 됨
55세 - 69세(B.C.497 - B.C.483) 벼슬을 버리고 제자들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주유함
69세(B.C.483) 아들 리가 죽음. 애제자 안회 죽음.
71세(B.C.481) <<춘추>>를 짓다.
73세(B.C.479) 공자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