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역사는 임진왜란 최초의 조선군 승전 장수는 이순신이고, 승전 전투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자신의 휘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바다로 건너가 싸운 '임진년(1592) 5월 7일의 옥포 해전'이라고 기록해 왔다. 그러나 김탁환의 <불멸>은 그것을 부인한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이 처음 바다를 건너온 날인 4월 13일 자정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동하여 4월 14일에 가덕도 앞바다에서 100척이 넘는 적선을 맞아 싸워서 30여 척을 격침시켰다는 것이다.(<불멸> 1, 296~308쪽). 그렇다면 시기로나 규모로나 임진왜란 최초의 대승첩이다. 과연 사실인가.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닌 역사의 왜곡에 불과하다.
당시 일본 침략군은 4월 13일 오후에 경상좌수영 관할 바다로 들어가서 아무런 전투 없이 부산포 건너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14일에 부산을 치고 15일에 동래를 함락시키느라고 경상우수영 바다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의 14일 오전까지도 원균은 전쟁이 일어난 것조차 몰랐다. 13일에 수많은 왜선이 부산포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응봉(鷹峯) 봉화대의 보고를 받은 가덕진 첨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이 띄운 급보를 14일 오전에 받은 뒤, 당시의 제도에 따라 급보를 받았다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고 그 사실을 인근의 이순신에게도 통보하면서 "필시 세견선(歲遣船:해마다 대마도 왜인들이 보내던 무역선)인 듯하나"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었던 것이 임진년 4월 14일의 원균이었다.(이순신, <임진장초> 선조 25년 4월 15일 술시 계본, '인왜경대변장(因倭警待變狀)')
일본군의 공격으로 경상좌수영과 연안 고을들이 모두 무너진 뒤, 경상우수사 원균은 막대한 적의 군세가 경상우수영으로 덮쳐오는 듯하자 화급하게 경상우수영의 전함과 전구(戰具)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 적과 싸워서 물리칠 수 없으면 무기와 군량을 물에 넣거나 불태워서라도 적에게 넘겨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장수의 책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배 한 척에 몸을 담아 전라도 경계에 가까운 사천(泗川)쪽 바다로 피했기 때문에 경상우수영 소속의 군사 1만여 명은 아무런 전투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 뒤 원균은 이순신에게 "본도의 수군이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분멸(焚滅)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상적(相敵)할 수 없어서 본영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알리면서 경상도로 건너와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비슷한 자료가 <선조실록>의 선조 25년(임진년) 5월조에 들어 있다. 4월 하순에 경상도에 내려갔던 선전관 민종신(閔宗信)이 5월 10일에 평양 행재소의 어전에 나가 복명하는 중에 원균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느라고 "원균은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원균이 스스로 주장했던 이 구절들이 훗날 뜬소문의 형태로 더러 전해졌는데, 김탁환의 <불멸>은 그쪽을 선택하여 '원균의 적선 30여 척 격파설'을 바탕으로 소설의 기본틀을 세웠다.
그러나 원균이 임진년 4월에 이루어냈다는 '적선 10척 분멸설'과 '적선 30여 척 격파설'은 오로지 위에 언급한 짧은 단편적인 문장들 뿐, 전투 자체에 대한 상세한 근거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원균 자신이 경상우수영을 무너뜨린 직후의 대혼란기에 단지 두 번 아무런 근거도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주장했을 뿐, 그 후로는 이순신과 치열하게 '쟁공'하던 시절에조차 원균은 그런 주장을 전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원균을 마냥 치켜세우면서 이순신을 마구 깎아내리던 정유재란 초기의 어전회의에서도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수전에서 최초의 승첩을 거두었다'는 주장은 원균 지지자들측에서조차 전혀 주장된 바 없다.
반면에 왜적이 밀려오기도 전에 원균이 경상우수영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기록은 <선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공식 기록들과 당시대인들의 각종 기록들 도처에 남아 있다.
"흉칙한 적들이 형세를 떨쳐 패를 갈라 도적질하며 한 패는 연해안으로 들어가 남김없이 깨뜨리되 (경상도의) 육군과 수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수군 진영으로 말하면 오직 우수영과 남해와 평산포 등 네 진 뿐이온데, 이제 듣자오니 우수영도 또한 함몰을 당했다고 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장계, <임진장초> 선조 25년 4월 30일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미시본(未時本))
"(경상)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 현재 사천 해포에 우거하고 있고"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치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
"원균은 수군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 우응신(禹應辰)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경상우도 도순찰사 김수의 치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
"(전란 초에) 원균이 거느린 선척들은 마침 그 때에 조정의 지시를 그릇 받들어 많이 불태워 침몰시켜 버렸으므로(元均所領船隻 適於其時 謬承朝廷指揮 多數燒沈), 이순신의 온전한 군사가 아니었던들 장한 진세를 만들어 큰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이옵니다."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약포집>)
이상의 자료들은 모두 당시의 장계와 신구차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떠도는 풍문을 듣고 기록한 야사나 개인문집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왕에게 직접 올리는 장계나 신구차는 절대 거짓을 쓸 수 없는 문서이고, 그 안에 의도적인 것은 물론 몰라서거나 또는 부주의로도 거짓을 썼다면 응분의 처벌이 따르는 공문서들이다.
이순신의 경우는 그가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로 구원하러 갈 진격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올린 공문인 장계이고, 김성일과 김수의 글은 임진왜란 초기에 그들이 당시 경상우도의 큰 벼슬아치들로서 현지에 있으면서 직접 파악한 현지 사정을 임금에게 급히 알린 장계이었다. 더구나 정탁이 신구차를 올릴 때는 이순신은 잡혀와 감옥에 있던 비상시였다. 당시 원균은 신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위세를 떨치고 있고 임금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공언하던 때인데, 그토록 긴박하고 불리한 시기에 정탁이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서 임금에게 올린 신구차의 문장 속에다 거짓으로 "전란 초기에 원균은 조정의 지휘를 잘못 받들어서 거느린 선척들은 많이 불태워 침몰시켜 버렸었다"고 쓸 수가 있는가. 삼척동자라도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것이다.
더구나 이순신의 경우, 정유년에 체포되었을 때 그를 죽여야 할 죄목 중에 하나가 '원균의 아들의 나이를 틀리게 말해 그 공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전에 이순신이 임금에게 보내는 장계에다 '(경상도의) 육군과 수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원균의)우수영도 함몰되었다'고 써보냈던 것이 만약 거짓이었다면, 이순신을 죽이자고 들 때 '원균의 아들 나이 문제'와 같은 구차한 사안을 드는 대신, 바로 그 장계 구절을 문제 삼아 원균을 모함하여 그 전공을 가린 장계를 올린 죄를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탁환은 상세한 전투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단편적인 풍문을 기록해놓은 개인적인 야사의 기록인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의 기록이 그 근거라면서 "원균은 이순신의 함대가 오기 전에 독자적으로 삼십여 척의 적을 분멸"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결정적인 판별 기준이 또 있으니, 전란이 모두 끝난 후에 원균의 군공을 심사하던 공신도감의 기록이다. 심사 초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올리라는 선조의 특별지시를 거부했던 공신도감에서 선조에게 그 이유로 댄 것이 "원균은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無軍將)로서 해상 대전에 참가했고, 뒤에는 패하여 수군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선조 36년 6월 26일조). 또한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극심해진 뒤에 선조의 앞에서 원균 지지파와 이순신 지지파들이 각기 두 사람의 전공을 거론하며 거듭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때조차, 원균 지지파들 입에서 "전쟁 초기에 원균이 독자적으로 '적선 10척' 또는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라는 주장은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도 강력한 방증이 된다.
이 문제를 이리 상세하게 고증하는 것은, 이것이 ‘원균 명장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내세우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1994년에 KBS 텔레비전에서 제작 방영했던 '원균 명장설' 성향의 다큐멘터리 역시 첫머리를 원균이 적선 10척을 용감하게 격파하는 전투장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었다.
[장계의 내용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는가]
여기서 잠깐 '장계 제도'의 문제를 짚어본다. 김탁환은 <불멸>에서 이순신을 야비하고 간교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서 '장계' 문제를 거듭거듭 거론한다. 원균이 연명장계를 보내자고 하자 이순신이 나중에 보내자고 하고 먼저 몰래 보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원균의 공을 빼앗느라고 몰래 장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내 말 잘 들으시오. 옛 인연을 생각해서 그대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요. 다시는 날 의식하지 마시오. 그대의 적은 나 원균이 아니라 부산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들이오. 나의 전공을 훔치는 것은 용납하겠으나 내 앞에서 함께 연명 장계를 올리자느니 하는 수작은 부리진 마시오. 또 한 번 그런 속임수를 쓴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이순신이 쓴 장계 초본을 보자고 요구하는데, 이순신이 초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초본은 없소이다."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숨기고 계속 내놓지 않자, 원균이 "그대가 쓴 장계는 한 달 안에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오. 조정 대신들을 거치면 한 달 안에 그대가 쓴 장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말이오.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소." 운운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불멸> 2, 122~124쪽)
장계는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장계가 임금에게 도달할 때까지는 장계를 쓴 사람만 그 내용을 알 뿐 다른 사람은 일체 알 수 없고, 다만 그 장계에 대한 회답인 유시가 내려왔을 때 유시 속에 언급된 내용에 의해서 짐작하거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조정에 있는 대신들을 통해서 알아보면 한 달의 시차를 두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장계제도가 어떻게 운용되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사료들을 분석해 보면, 자신이 보낸 장계의 내용을 즉각즉각 인근 지역 책임자들에게 통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장초>에는, 그런 장계운용제도에 의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원균 자신이 임금에게 보낸 장계의 내용을 인근 지역 책임자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는 공문 안에 그대로 다시 기록해놓고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렸음'을 통고한 대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이순신 또한 원균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음을 다시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니, 임금과 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가지 사안을 여러 갈래로 상호 교차하여 검증하고 확인하는 조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장초> <인왜경대변장>, 임진년 4월 15일 술시본 참조). 이것은 아마도 사실과 다른 허무맹랑한 말이 아무도 모르게 장계로 올려질 경우에 발생할 행정의 오도와 혼란과 낭비를 막기 위하여 상호교차 확인과 감시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운용했던 것이라고 파악된다.
장계제도가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음은, 이순신의 죽을 죄 3가지 중에서 첫째 죄목으로 꼽혔던 '부산 왜영 대화재사건 관계'에 관련된 이순신 및 이원익측의 장계들에 의해서도 극명하게 증명된다.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고, 이원익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임을 띠고 남도에 내려가서 수륙군을 모두 통괄하면서 왜적에 대한 방어를 총지휘하고 있던 이순신의 상관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거제 현령 안위 등이 사신의 복물선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갔을 때 왜영을 불태웠다고 보고했다면서 그들의 보고 내용을 그대로 임금에게 알리면서 포상해주기'를 청한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이 정유년 1월 1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월 2일에, '이순신의 그 장계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올린 것으로서 진상은 그와 다르다. 그 일은 이원익이 자신의 군관에게 명하여 도모하게 하여 실행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이 청한 대로 그의 부하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이원익측의 장계가 조정에 도달했다. 이원익으로부터 그런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라는 지시를 받은 이조좌랑 김신국이 올린 보고였다. 그것을 본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이려 했다"면서 격노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1일조, 1월 2일조). 다음 달에 이순신을 체포하여 서울로 끌어다가 투옥시킨 선조는,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죄 세 가지 중에서도 첫번째 죄로 꼽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측의 장계 내용과 두 장계가 조정에 도달한 날짜를 고찰해 보면, 그 장계를 보낸 뒤에 이순신이 상관인 이원익에게 이러이러한 내용의 장계를 임금에게 보냈음을 즉각 통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벌어질 리 없었던 사태 진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이순신 지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하게 이순신을 아낀 사람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는 것을 이원익이 사전에 알았더라면 사실을 설명하여 그런 장계 자체를 올리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인데, 사후에 알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토록 비통한 비극의 빌미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첫 승첩인 옥포해전 뒤에 원균이 요구한 연명장계를 거부한 까닭은, '연명'이란 형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연명한 사람들이 함께 장계의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균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한 연명 장계는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균이 그 전투에서 행한 행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이순신은 연명 장계를 거절하고 따로 자신이 보고 겪은 바를 그대로 기록한 장계를 보내었고, 그 일로 두고두고 끈질기게 원균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김탁환이 주장하고 묘사한 것처럼 장계의 내용을 원균 전혀 모르게 몰래 보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르게 장계를 보낸다는 것이 제도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이순신은 '왜적의 간자(스파이)'를 사칭한 사기극을 벌였는가
남해현은 경상우수영 소속으로서 전라좌수영의 바로 이웃 고을이다. 이순신은 휘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를 구원하러 가던 때, 먼저 남해현에 사람을 보내서 "현령이 군선을 정비하여 중로까지 나와서 전라도 수군을 맞이해 달라"고 통고하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낯선 경상도 바다의 물길을 안내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남해현은 '적이 급하게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성 안에 인적이 없고 곡식창고와 병기창고의 문도 열려 있었다"고 복명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왜군이 들어가 주둔하면 인접한 전라도까지 위험해지겠다 싶어서 군관 송한련에게 "정말 남해현 성 안이 모두 비어 있으면 왜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불사르라"고 명령해서 보낸 바, 송한련이 가서 창고들을 태우고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 일을 자신의 <난중일기>에 명확하게 기록해 놓았을 뿐 아니라, 불태운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자로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 그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해서 보고했다 (<임진장초>의 '근계위대변사(謹啓爲待變事)',임진년 4월 30일 미시 계본).
그런데도 김탁환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해괴하게 왜곡했다. <불멸>을 보면, 이순신은 부하들과 비밀히 짜고 남해현의 무기고와 곡물창고를 태운 뒤에 왜군들의 방화로 위장하여 "불지른 건 '왜군의 간자'였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다들 속아넘어갔으나 원균과 그의 부하들은 지혜롭게도 목격자를 찾아내어 데리고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찾아가서 대질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목격자의 증언 때문에 이순신측이 할수없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자 이순신을 향하여 "천벌을 받소이다, 장군. 그렇게 덮어버리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소이까?" 라느니, "하늘이 두렵지 않소이까?" 하고 공격하는가 하면, "간악하다"느니 "왜놈보다 더 비열하다"느니 하며 마구 야단치고 이순신의 부하들의 멱살을 잡고 수염을 잡아당기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등 크게 혼내주고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은 꼼짝못하고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불멸> 2, 44~122쪽)
어째서 김탁환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이처럼 비루하고 추악한 꼴로 왜곡하는가. 소설의 세부 묘사를 보면, 김탁환은 이순신이 몸소 기록해놓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서 남해현 창고 방화사건을 취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그 부하들이 그 사건을 숨기기 위해서 몰래 짜고 '왜적의 간자'까지 사칭하는 사기극을 벌여 세상을 속이다가 원균과 그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혼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③ 이순신은 정유년에 부산에 진격하지 못했는가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1597년(정유년)이다. 그는 생애 최대의 고난과 슬픔은 물론 최상의 영광을 모두 이 해에 겪었다. 그런데 1월의 정유재란 발발부터 2월에 이순신이 체포되고 7월에는 원균이 전사하는 등, 극히 중요하고 긴박했던 상황이 두 소설에 모두 매우 부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이순신이 정유년 2월 10일에 직접 함대를 이끌고 다시 부산 앞바다에 진격했었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때의 부산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초기인 임진년에 이순신 함대가 부산의 왜영을 치러 갔던 부산 전투와 다른 전투임)을 두 소설의 저자 모두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경우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해도 특유의 소설 구조상 큰 무리 없이 넘어간다. 그러나 김탁환의 <불멸>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치욕적인 결점이 된다. <불멸>에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이순신은 너무 두려워서 끝내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었던 까닭이 바로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죄 때문이었던 것이라고 극력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멸>에는 잡혀간 이순신 대신 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도원수 권율을 상대로 "이순신은 부산을 치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잡혀간 것이오이다. 그러나 소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불멸> 4, 99쪽). 그러나 그것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왜곡된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하긴 이순신이 정유년 2월에 감행한 수군 단독의 부산 왜영(倭營) 공격전은 위의 두 소설가만 모르는 게 아니다. 실로 기이한 일이지만, 정유재란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도 전문적인 이순신 연구가들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 관련 자료들이 충분히 또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런 실정이다. <선조실록>의 선조 30년(1597)조에 실린 기록들을 날짜별로 정리하면서 살펴 보면 정유재란 당시의 긴박했던 정황과 흐름은 다음과 같다.
1월 13일: 지난 수년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화의교섭이 깨진 결과, 풍신수길의 재침 명령을 받은 일본 가등청정 부대가 부산에 상륙. 다시 발발한 왜란 때문에 선조와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온나라 백성이 모두 전쟁의 공포에 빠져들었다.
1월 22일: 전라병사(全羅兵使) 원균이 수군의 부산진공작전을 건의한 장계가 궁중에 닿았다. 원균은 상관인 통제사 이순신과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1595년 3월에 육군인 충청병사로 임명되면서 수군을 떠났고, 1596년 8월에 역시 육군인 전라병사로 전임되어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全羅兵營)에 주재하고 있었다. 이젠 육군 장수인 그가 수군작전을 건의한다는 것은 월권에 해당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바로 이 건의가 뒷날 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의 위무(威武)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주, 현재의 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00여 명이나 200명씩 대해(大海)에서 위세를 떨치면, 가등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이 장계는 몹시 선조의 마음에 들었다. 조선 육군의 전투력을 전혀 믿을 수 없던 당시 실정으로 선조가 바란 것이 바로 이런 식의 해결책이었다. 다음 날, 선조는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조)
1월 27일: 선조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한 자리에서 신하들이 이순신과 원균을 두고 크게 다투는 설전이 다시 벌어졌다. 신하들은 당파별로 나뉘어 동인은 이순신을 지지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했다. 선조가 원균을 수군으로 돌려보낼 뜻을 굳히고 "원균으로 대신해야겠다"라고 선언한 것이 이 날이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조).
1월 28일: 선조는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로서 승지 유영순에게 전교하여 다음과 같이 원균에게 하유하도록 명령했다.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바다의 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선조는 이 날만 해도 '경상도 통제사'직을 신설해서 원균에게 주고 이순신은 전라충청 통제사로서 원균과 같이 수군에 있게 하는 선에서 처리하려고 조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사발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2월 4일: 사헌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라"고 주청했다.
2월 8일: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이 함께 수군에 복무하게 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원균에게 수군 전체를 맡기고 이순신은 처단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이순신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선전관에게 표신과 밀부를 주어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운운.
2월 10일: 한산도의 이순신은 임금이 이미 자신을 통제사직에서 파면하고 체포령을 내려서 선전관이 잡으러 내려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 날 해뜰 무렵에 함대를 거느리고 통제영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진격했다. 전투 현장인 경상도의 무장들인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경상우수사 배흥립을 함대에 동행시켰다. 함대는 이 날 미시에 부산 앞바다에 닿아 왜적과 싸우고 날이 저물자 절영도에 정박했다가 다음날 다시 싸웠다. 왜적들은 육지에 올라가서 일체 바다에 나오지 않았기에 해안에 정박해 있는 적의 함선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공격하는 싸움이었다.
2월 12일: 이순신은 함대를 돌려 귀영길에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이순신 함대는 가덕도 바다에 가서 주둔하고 일대의 왜적들을 치기 시작했다.
2월 17일: 남쪽에 내려가 있던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의 부산 진격작전에 관해서 올린 보고가 이 날 처음으로 조정에 도착했다. 관련 보고는 2월 20일, 2월 23일 계속 조정에 올라왔다.(<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조). 이순신은 적을 치고 있던 가덕도 앞바다로 찾아온 선전관에게 체포되어 함께 한산도로 돌아갔다. 이순신은 선전관과 함께 온 원균에게 한산도에 있는 모든 물품을 인계했다.(<이충무공전서>)
2월 26일: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 의하면,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사무 인계를 마친 이순신은 이 날 죄인의 신분으로 한산도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이충무공전서>)
3월 4일: 이순신은 초저녁에 서울에 도착하여 옥에 수감되었다.(<이충무공전서>)
3월 13일: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고문당하면서 신문 받고 있는 이순신의 죄목 3가지를 적시해 주면서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도록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는 뜻을 대신들에게 전하게 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
3월 20일: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2월 28일자로 올린 장계가 궁중에 도착했다. 내용은 지난 달에 있었던 이순신 함대의 부산 공격을 매우 헐뜯는 것이었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나아갔다 물러섰다 하면서 병위(兵威)를 과시하고 가덕도 등처에서 접전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그 때의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이번 부산 거사에서는 우리나라 군졸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 매우 통분한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제장(諸將)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20일). 원균은 감옥에 갇혀 있는 이순신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 장수들까지 이순신 함대의 부산 진격전과 관련된 죄인으로 처단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4월 1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석방되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복무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4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이 3월 29일자로 올린 서장이 조정에 도착했다. 원균은 이 서장에서 새로운 수군작전을 제시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였던 지난 1월에 자신이 제안했던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가 무위를 과시하여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수군단독작전 대신, 수군과 육군의 합동작전 곧 "육군 30만명을 뽑아서 수륙합동작전으로 왜적을 쳐야 한다"는 게 자신이 통제사가 된 뒤에 그가 새로 생각해낸 작전이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19일조). 이후 원균은 계속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하면서 수군 단독의 부산 진격전을 거부했다. 율곡의 ‘10만 양병론’조차 실행할 수 없었던 조선의 당시 국력으로 ‘육군 30만명을 동원한 수륙합동작전’은 실현이 전혀 불가능했다.
7월에 들어서자 선조도 수군 단독의 부산진격작전을 계속 거부하는 원균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났던 모양이다.비변사에 전교하여 "원균에게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10일조)
원균이 계속 부산 진격을 거부하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치며 부산 진격을 명했다. 수군 단독의 부산진격작전은 본래 원균이 건의했던 것이고, 더구나 불과 5개월 전에 이순신이 직접 실행했던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규모의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하면서 수군 단독의 진격을 거부하는 원균에게 매를 친 것이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할수없이 전 함대를 끌고 드디어 부산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부산 앞바다까지 나갔다가 아무런 전투도 없이 배를 돌려 본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7월 15일 새벽에 칠천량 바다와 고성 지역 해안에서 추격해온 왜적에게 함대가 거의 전멸하고 원균도 전사했다. 그 소식은 7월 22일에 조정에 닿았다. 경악한 선조는 이 날짜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조)
이상이 <선조실록>의 기록을 따라서 정리한 당시 정확한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도 두려워서 감히 실행하지 못한 부산 앞바다 진격작전을 원균에게 하라면서 도원수 권율이 곤장을 치는 바람에 진격했다가 수군이 모두 무너진 것이니 원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탁환의 <불멸>은 거기서 더 나아가 소설의 전체 구조가 '원균은 전부터 수군을 끌고 부산에 용감하게 진격하려고 계속 애쓴 반면, 이순신은 원균의 부산 진격을 극력 만류하고 자신도 끝까지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원수와 조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원균이 완강하게 부산 진격을 거부하다가 곤장까지 맞았던 것은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인데도, 이처럼 사실과도 맞지 않고 소설 구성의 앞뒤도 맞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한 원인은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이 모두 전투 전에 몰래 전장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며 원균의 부하 장수인 우치적의 입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저들은 애초부터 싸울 뜻이 없었사옵니다. 장군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위해 일부러 따라온 것이옵니다. 장군! 이순신이 이 모든 일을 꾸몄을 것이옵니다.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키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전투중에 배에 불이 붙어 충청수사 최호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균은 이렇게 소리친다.
"이순신, 이노옴! 네놈이 끝까지 날 괴롭히는구나. 좋다. …내 반드시 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아 네놈을 찾아가겠다. 가서 네놈의 생간을 씹어삼켜 최호의 원한을 풀겠다. 기다려라. 이놈!" (<불멸> 4, 135~136쪽)
이처럼 원균에게 불리한 건 모두 이순신 탓으로 덮어씌우는 것이 <불멸>의 기본 구조이다.
④ 이순신은 역모에 뜻을 두었는가
<불멸>의 결말은 더구나 해괴하다. 원균이 죽은 뒤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대첩으로 명성을 되찾은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역모를 꾸민다. 그들은 이순신을 옹위하고 휘하 수군을 동원하여 거병함으로써 무력으로 나라를 뒤엎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해놓았고, 이순신도 '그 길'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고 이순신 폄훼에 앞장섰던 인물인 서인의 거두 윤두수가 그런 정황까지 모두 "훤히 꿰뚫고" 이순신에게 서찰을 보내어 “왕실과 만백성을 위해 전사하라”고 요구한다. 윤두수는 뒷일은 내가 책임지겠다면서 "사사로이 목숨을 아끼고 시간을 벌다가는 김덕령처럼 개죽음을 당할 뿐이란 걸 명심하라"면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길'을 가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그 서찰을 받은 뒤 이순신은 '군사를 일으켜 운명을 시험할 것인가, 앉아서 사약을 받을 것인가,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과 부하들과 가문과 후손들까지 광영을 입게 할 것인가.'라는"세 가지 가능성 속에서 휘청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윤두수의 권고대로 전사를 가장한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우기, 그런 권고를 하기 전, 윤두수는 유성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장수가 있소. 결코 왕실을 배신하지 않을 장수와 결국 왕실을 배신하는 장수. 원균, 신립, 이일 등은 차라리 자결을 할 망정 결코 왕실을 배신하지 않을 장수들이오. 허나 이순신은 왕실을 향한 충정이 그다지 두텁지 않아요."(<불멸> 4, 329~373쪽)
이처럼 김탁환의 <불멸>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은, 철저한 이순신 폄훼 구조이다. '원균은 용맹하고 이순신은 소심하다'는 기본 설정에 맞추어 이순신의 모습을 너무도 비루하고 초라하게 그린다. 또한 무엇이든 원균에게 불리한 건 이순신 탓이고 이순신이 잘한 건 원균의 덕으로 되어 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키고" 있는 탓에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죽은 것인 반면에(<불멸> 4권, 135쪽), 원균이 죽은 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거둔 것은 전날 밤 꿈에 "원균처럼 싸우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불멸> 4권, 232쪽) 이순신에 대한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욕이다.
이순신이 "나는 원통제사를 평생 흠모하며 존경하였느니라. 임진년 승리도 절반은 그의 공이다"라고 원균을 찬양하는가 하면(<불멸> 4권, 162쪽), 기세등등한 원균이 쓰러진 이순신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틀어쥐고 개처럼 질질 끌고 운주당 섬돌 위로 올라가도 이순신은 "꺼억꺼어억." 가래 끓는 소리를 낼 뿐 전혀 반항하지 못한다.(<불멸> 3권, 340쪽)
장수로서의 능력도 원균이 더 뛰어났다고 계속 강조한다. 그래서 이순신이 통제사가 된 무렵의 장면에는 이런 대사들이 등장한다. "이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모두 자기보다 위인 장수를 그대로 두고 볼 이수사(주, 이순신)가 아니지 않소? 이수사는 반드시 원수사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킨 다음 자신의 수족을 경상우수사로 앉히려 들 게요." "하오나 원수사(주, 원균)는 조선 수군의 중심이오이다." "…이수사가 통제사에 오른 데는 좌수영의 전공을 꼼꼼하게 적어올린 그의 장계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비변사의 대신들은 결국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올린 장계를 놓고 갑론을박했을 테고, 아무리 원수사가 공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이수사의 장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오. 원수사가 이수사의 반만큼만 정치에 밝았더라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겠지." (<불멸> 3, 53~54쪽)
이순신은 원균보다 전공은 모자라는데, '정치에 밝은 이순신이' 장계를 잘 써서 원균을 밀쳐내고 통제사 자리를 차지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김탁환이 전혀 허구로 꾸며 넣은 이순신과 원균의 여인 관계 구도이다. '원균의 여자'인 '무옥'은 아름답고 신원이 확실한 처녀로서, 여자쪽에서 원균에게 반해서 접근하여 원균의 여인이 되었다. 반면에 '이순신의 여자'인 '박초희'는 여러 남자를 거친 여자이고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자신이 낳은 매국노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인데, 이순신쪽에서 그 여자에게 반하여 접근하여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심지어 그 여자 때문에 적장인 일본의 소서행장과 은밀한 거래까지 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관계를 대략 짚어 보면 이렇게 설정되어 있다.
원균의 여자인 '무옥'은 니탕캐의 난에서 원균이 여진족을 철저하게 토벌한 데 대한 원한을 품은 니탕캐의 여동생으로서 원균을 죽이려고 왔다가 원균에게 반하여 평생을 정성껏 모시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한 여인으로서, 그 캐릭터를 보면, 신원으로는 여진족의 최상류층 여인인 니탕캐 추장의 여동생인데다가 별명이 '여진의 보석'이라고 붙을 만치 용모가 아름답고 무용까지 뛰어난 처녀라는 것이다.
반면에 이순신의 여자인 박초희는 전라도에 사는 조선인 양반의 아내인 유부녀였는데 왜구에게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끌려갔다가 거기서 매국노인 사화동이란 천민의 아내가 되어 사화동의 아이까지 가진 조선여인으로서, 조선으로 잡혀간 사화동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온 뒤 사화동이 처형되어 죽자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자신이 낳은 사화동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뒤 정신착란 상태로 떠돌던 것을 보고 이순신이 의원을 시켜 치료해준 뒤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었고, 이순신은 전쟁 중의 긴박한 때에 본영을 벗어나 박초의의 주막에 가서 머물며 박초희와 지내고 있어 부하 장수들이 수군거린다. 더구나 박초희가 이순신을 위해 몰래 자취를 감춘 뒤 대마도로 돌아간 뒤에, 소서행장이 이순신을 상대로 미인계를 쓰기 위해서 박초희를 다시 조선으로 불러왔고, 왜군측의 예상대로 이순신은 부하들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소서행장에게 '왜군 포로 열한 명'을 돌려준 대신 박초희를 받아서 옆에 두고 다시 진한 정분을 나눈다는 것이다.(<불멸> 4, 270~279쪽)
이처럼 김탁환이 그린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물론 그들의 여자관계 역시 어처구니 없다 못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이순신은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만신창이 같은 과거를 지닌 여자에게 자기 쪽에서 반하여 그 여자와 정분을 나누느라 전시에도 군영을 벗어나기 일쑤고, 게다가 그 여인이 제 발로 사라진 뒤에도 도저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가 하면, 그처럼 비열하게 적장인 소서행장과 내통하면서까지 그 여자를 밝히고 다니는 장수'로 묘사하여 누추하고 파렴치한 매국노같은 인물로 그려놓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용모가 아름답고 무기를 능숙하게 쓸 만치 무용도 뛰어나고 춤까지 잘 추면서 여진족 최상류층의 고귀한 신분을 지닌 아름답고 기개가 당당하고 순결한 처녀가 원균에게 반하여 좇아와서 온몸과 마음을 모두 기울여 지성껏 섬기는 것은 물론 왜적을 치는 전투에까지 원균과 함께 참가하여 왜적을 같이 치다가 칠천량 전투때 나란히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다. 1980년대에 돌연 시작된 '이순신 죽이기'의 흐름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순신이 본래 비루한 인간이었다면 비루하게 그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이 낳은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 중 하나로서, 적들마저 존경했던 분이다. 이처럼 부당한 모욕과 폄훼를 마구 가해도 되는 분이 아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어찌하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을 이토록 추하게 왜곡하여 욕보이는가. 그리고 이제 공영방송에서 이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소설을 대하 드라마로 만들어 전 국민에게 방영한다는 건 어떤 뜻을 지니는가.
이순신은 한 사람이고 그의 생애도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인심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각기 그를 다르게 평가해 왔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이순신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다. 그런 현상이 벌어진 근본원인은, 아직까지도 이순신의 생애에 대한 정확하고 공정한 고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있다. 이순신의 생애가 제대로 후세에 알려졌다면, 이미 역사소설 <불멸>에서 감행되었고 현재 KBS 대하 드라마 제작진이 시도하고 있는 것과 같은 황당한 역사의 왜곡은 감히 우리 사회에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인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