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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숨겨두고
밤마다 서동을 찾아가 안고 잔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가사(歌辭) <서동요> 앞부분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
공주는 걸 그룹 ‘레드 벨벳’의 아이린만큼이나 예뻤다. 사비성 밖에서 마 장사를 하던 서동은 그 소문
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찾아갔다. 대궐 주변을 맴돌며 궁리를 하던 서동은 <서동요>를 지어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면 공짜로 마를 주겠다는 서동의 제안에
온 동네 아이들이 즐거이 참여했다. <서동요>는 이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고, 그 소문은 곧장 진
평왕 귀에도 들어갔다. 진평왕은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대소신료들의 의견을 물은 끝에 선화공주를
나라 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터덜터덜 유배지로 걸어가는 선화공주 앞에 웬 거렁뱅이가 나타나 호위를 자청
했다. 따분하던 참이라 공주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래지 않아 두 청춘남녀는 정분이
나서 <서동요> 가사처럼 ‘밤마다 안고 자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서동은 공주를 집으로 데려다 살림
을 차리고는 비로소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홀로 된 어머니가 연못가에 살았는데, 어느 날 연못 속에
서 용이 나타나 어머니를 범하여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서동은 용으로부터 물려받은 신통력
을 발휘하여 진평왕에게 다량의 황금을 보냈고, 재주에 탄복한 진평왕은 서동을 사위로 삼았다. 덕분
에 서동은 백제 제30대 무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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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삼국유사』가 전설과 야사 위주의 사서(史書)라 해도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 최
명희는 소설 「魂불」에서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의해 백제를 폄하하느라 일연이 무왕을 서동
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했는데, 호남 사람 특유의 자격지심과 신라에 대한 적개심에서 나온 주장일 뿐
내용이 백제 폄하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부터는 이덕일의 「여인열전」 대신 정사(正史)의 기록을 따른다. 서동은 실존인물로서 백제
제29대 법왕(재위 599~600)의 서자였다. 젊어서 청상이 된 서동의 어머니는 실제로 사비성 밖에 있
는 한 연못가에서 살았는데, 미모가 출중하다는 소문을 들은 세자 시절의 법왕이 찾아와 과부를 유혹
하여 교접 끝에 오래지 않아 아들 장(璋. 무왕)이 태어났다. 그러나 평민 신분이라 세자가 보위에 오
른 뒤에도 민가에 눌러 살아야 했다. 그런데 법왕이 재위 1년 5개월 만에 후사 없이 급서하자 유일한
혈육인 장이 보위에 추대되어 백제 제30대 무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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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인 한성을 빼앗겼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433년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마립간 사이에 나제동맹을 체
결하여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는데, 개로왕이 전사하고 급하게 보위에 오른 백제 제22대 문주왕은
신라의 도움으로 겨우 망국의 위기를 모면했다.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나라를 재정
비했다. 이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주변의 영토를 되찾았지
만, 진흥왕이 한강 주변 땅을 독차지하자 분개한 성왕은 554년 손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
가 관산성(현 충북 옥천)에서 역습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원수지간이 되
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끈임 없이 전투를 벌였다.
백제와 신라가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기간은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과 신라 제26대 진평왕
(재위 579~632) 시절이었다. 두 임금은 진평왕이 죽을 때까지 무려 33년간이나 재위기간이 겹쳤었는
데, 그 사이에 13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전투도 대부분 무왕의 선공으로 이뤄졌다. 그럴 수밖
에 없는 것이,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서해안의 항구와 한강 주변의 기름진 옥토가 모두 백제의 옛 영
토였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서해안의 항구를 통해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빠른 속도로 국부를
이룩하고 외교적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니 무왕을 서동으로 각색하여 진평왕의 사위로 설정
한 『삼국유사』의 내용은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픽션이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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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백제 제24대 동성왕(재위 479~501)은 재위 15년(493) 신라에 국혼을 청했었다. 청혼을 받
은 신라 제21대 소지마립간(재위 479~500)은 공주 대신 이찬 비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냈다.
나제동맹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백제의 요청에 신라가 일개 벼슬아치의 딸을 왕비로 보낸 것은 국력
이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 얘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백제가 고구
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했을 때, 그 지역의 호족들은 기득권을 장악한 채 왕을 우습게
여겼다.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했을 때도 그 지역의 기득권자인 호족들이 끝까지 집권세력에 협조
하지 않아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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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시작했
다. 익산에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미륵사를 창건하고 왕궁도 함께 지었다. 미륵사 창건에는 익산 지
역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는데, 왕비가 된 선화공주의 모델은 이때 무왕을 후원했던 어느 호
족의 딸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익산에는 현재 미륵사터가 남아 있으며,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는 남
북 450여m, 동서 230여m의 구획을 갖춘 궁궐터도 남아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무왕이 익
산에 별도(別都)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도란 오늘날의 세종시 정도로 보면 된다. 무왕은 백제
왕 중 불사(佛事)를 가장 많이 일으킨 군주였다. 일연은 무왕의 불교 중흥 업적을 높이 사서 서동과
선화공주 얘기를 창작하여 『삼국유사』에 수록한 게 아닌가 싶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오늘 한수회의 북한산 산행, 도봉산이 이러한데 북한산 역시 고운 단풍을 만끽 하리라 여깁니다. 주변이 온통 가을로 채색되어 가고 있는 아름다움이 가득 입니다. 많이 걸으시며 즐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