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 넣어 두다(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57. 아리마대 요셉
1] 저물었을 때에
이때는 금요일이 끝나고 안식일이 시작되려는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된다. 신 21:22,23에 명한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屍身)은 밤새도록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 신 21:22,23 -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다음날이 안식일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모습을 만인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 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그대로 십자가에 달아 놓는 것이었다. 만일 그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의 용인(容認)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죽은 자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었으며 그나마 대역(大逆)죄로 죽은 경우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2]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아리마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대개 '리다'(Lydda)나 '라마다임'(Ramathaim 삼상 1:1)으로 간주한다. 마가와 누가는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직(要職)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 막 15:43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 눅 23:50,51 -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누가는 그가 '의로운 사람'으로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만이 그가 '부자'임을 의식적(義識的)으로 밝힌다.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던 마태는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사 53:9-12의 예언을 상기(想起)했을 것이다.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다는 것(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함)과 요한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요셉은 재물이 넉넉했음이 분명하다.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 곧 그의 추종자라 한다.
* 마 13:52 -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마 28:19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비록 요셉이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은밀(隱密)하게 예수를 좇았다고는 하나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고 예수의 삶을 좇아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58. 예수의 시체를 달라
1] 빌라도에게 가서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요셉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차 확신하고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그 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 요 19:38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가서'(*, 프로설돈)란 긴급히 달려왔음을 암시하는 말로서,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 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貫澈)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음을 시사한다.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철저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명절에 즈음하여 이방인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했고 또 시체와의 접촉을 멀리 해야만 할 입장이었다.
* 요 18:28 -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儀式的) 부정보다 예수의 장사에 더 관심을 가졌다. 신앙의 바른 도리에 입각한 자는 다른 어느 것보다 예수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둔다.
2]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마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요셉은 '당돌히'(용감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다. 요셉의 이 같은 간청은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접견(接見)하고 난 직후로 판단된다.
* 막 15:43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 요 19:31 -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먼저 십자가 형장(形場)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시체를 내어주었다.
* 막 15:44,45 -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 없이 시체를 내어준 사실은 적어도 그가 예수는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공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절 참조).
59. 정한 세마포
1]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요셉 혼자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체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박힌 십자가를 뽑은 다음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야 했고 시체를 옮기는 채비를 갖춰야 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옮기는 일, 씻는 일, 몰약을 섞는 일 등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 안에 요셉 혼자하기에는 사실상 벅찬 일이다.
2] 정한 세마포로 싸서
'정한 세마포'란 질 좋고 깨끗한 아마(linen)를 가리키는 것 같다. 세마포는 주로 시체를 싸는데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를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요셉을 도왔다고 한다.
* 요 19:39 -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또한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60. 새 무덤
1]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59절의 '정한'이라는 단어와 '자기의 새 무덤', 그리고 '큰' 돌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복음에서만 강조어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새'무덤이란 아직 죽음에 영향력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신 예수의 시체를 안치(安置)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 행 2:27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의 휴식처였던 것 같다. 이곳의 위치는 갈보리 언덕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된다(Parrot). 그곳은 암석들로 구성되어 있어 돌로 깎은 무덤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소였다.
2]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요셉은 모든 것을 '놓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의 신앙의 성격을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헤드린의 결정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形言)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이같이 주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인일 것이다.
61. 무덤을 향하여
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가리킨다(56절 주석 참조). 이 두 여인들은 예수의 장래를 주도하던 요셉과 일단의 무리들, 그리고 56절에 언급된 동료 여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어둠이 깔리는 그 무덤가에서 예수께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지울 길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법에 의하면 처형된 자들을 위하여 애곡(哀哭)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여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지로 참으며, 예수의 장사(藏事)를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예수의 처형과 매장의 증인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인들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당시의 상황에서(M. Roshha-Shanah, 1:8) 이 여인들의 증거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예수의 매장 장소에 두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법적인 효력을 지녔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으심 내지는 부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 고후 3:1 -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 히 10:28 -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이 증거와 기록은 모든 가현설(Docetism)의 도전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