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기자오의 막내딸(1315~1369)이 몽골군에게 공녀로 끌려갈 때, 식구들은 초상이라도 난 듯
대성통곡을 했다. 원나라에 가면 군인의 첩이나 노비, 또는 창녀로 팔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기 때
문이었다. 몽골군은 일가족 중에서 가장 실하게 생긴 10대 처녀만 공녀로 끌고갔다. 원나라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공녀제도는 관례화되어 고려처녀의 씨를 말리고 있었다. 흉흉한 소문에 공녀로 차출
되면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처녀도 늘어났다.
기씨 소녀는 남달랐다. 어린 나이에도 너무 걱정 말라며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떠났다. 기씨 소
녀는 연경에 당도하자마자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눈에 띄었다. 한족(漢族)보다 고려인들이 더 믿
을 수 있고 영민하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대부분의 환관을 고려인으로 충당했다. 몽골인들은 유전적
으로 고자가 거의 없었고, 유목민 특유의 성격상 환관이라는 직책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고용보는 고려인들을 대표하는 환관으로서 황실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고용보도 자신의
신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처녀가 계속 필요했다.
기씨 소녀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해왔으며, 소녀의 아버지 기자오도 총부산랑까지 지냈다. 덕분
에 소녀는 어릴 적부터 서책을 가까이하여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쌓았다. 미모뿐만 아니라 교양까지
갖춘 재인이었던 것이다. 고용보는 기씨 소녀에게 궁중예법을 가르친 뒤 원나라 황제인 순제에게 다
과를 올리는 궁녀로 앉혔다. 순제는 처음에는 기씨 소녀의 미모에, 다음에는 예법과 교양에, 다음에
는 믿음직한 성품과 충직한 마음가짐에 빠져 그녀에게 성은을 입히고 비로 책봉했다. 원나라 서서인
『元史』 「후비열전」에는 기비가 갈수록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내용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순제는 황태자 시절 고려의 서해 대청도에서 1년 5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로 인
해 가뜩이나 고려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순제가 기비 같은 총명한 고려여인의 보필을 받게 되
자 자연스럽게 깊이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비는 곧 황후 타나시리의 표적이 되었다. 친정이 원나라 전체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황후로
서 일개 후궁은 경쟁상대가 못되지만, 유독 갑질에 이골이 난 황후는 기비에게 채찍질까지 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상을 잘못 골랐다. 타나시리의 친정아버지는 1329년 8월 순제의 부친인 명종을
암살하고 순제를 고려로 귀양 보냈던 인물인데, 순제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때마침 황후 집안에서는 순제마저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다
가 탄로가 났다. 1335년 순제는 승상 빠엔과 손을 잡고 역모를 꾸민 황후의 일족을 일제히 제거하고
타나시리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가뜩이나 순제보다 제국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빠엔은 타나시리 일족을 제거하고 나자 지
분을 요구했다. 순제도 이를 거절할 수 없어 빠엔이 추천하는 웅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를 황후로 맞
아들였다. 이번에도 황후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에 기비는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
다. 그러나 웅기라트 가문은 기비를 추천한 고용보를 공격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기비의 세력을 견제
했다. 1339년 기비는 순제의 맏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순제는 기비가 제공해준 묘책에 따라 빠엔을
제거한 뒤 기비를 제2황후에 책봉했다. 기황후의 시대가 온 것이다. 기황후보다 먼저 책봉된 빠엔후
두 황후는 실권이 없어 기황후를 견제할 수 없었다.
기황후는 몽골 출신 고관들과 고려 출신 환관들을 중심으로 황후를 호위하는 권력기관 자정원을 편
성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에 임명했다. 한편 처형된 빠엔의 조카를 중서성 우승상에 제수하여 웅기
라트 가문과도 화해를 도모했다. 고려에서 수시로 바치는 공녀는 모두 기황후를 거치게 하여 황족과
고관들에게 골고루 선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환심도 사고 고려 조정 내에서도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 여인은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었다. 이처럼 고려에
서 온 여인들이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자 고려양이라고 하여 고려의 의상‧장신구‧화장법 등이 중국풍
이나 몽골풍을 젖히고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1353년 순제는 기황후가 낳은 장남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에 책봉했다. 동시에 고려 출신 환관 박불
화를 원나라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에 제수했다. 1358년 연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는 황실의 양곡과 재산을 풀어 1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러나 워낙 기근이 심하여
곳곳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장차 명나라(1368~1644)를 건국하게 될 한족 장수 주원장도 그
러한 봉기 세력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기황후는 원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능한 순제를 교체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기황후가 박
불화를 앞세워 황제 교체를 시도하자 순제가 알아차리고 크게 반발했다. 순제는 기황후가 낳은 황태
자를 중서령추밀사에 제수하여 군권을 맡기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합의를 보았다. 기황후가 타협안을
수락한 것은 패착이었다. 1365년 제1황후가 죽고 기황후가 제1황후에 올랐다. 무능한 순제는 원나라
를 더욱 약화시켰다. 기황후가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도 없이 1366년 원나라는 주원장에게 연경을 빼
앗기고 몽골 초원으로 쫓겨 갔다.
기황후가 원나라를 주무르는 동안, 오빠 기철을 필두로 고려의 기씨들은 조정을 맘대로 주무르며 역
사상 가장 큰 적폐를 저질렀다. 재위 5년(1356), 공민왕은 기철 일행을 일망타진했다. 분개한 기황후
는 1364년 공민왕을 폐출하고 충선왕의 3남인 덕흥군을 고려왕에 봉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공민왕
이 칙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기황후는 원나라의 고려인 출신 장수 최유에게 1만 군사를 주어 공민왕
을 처형하라고 보냈지만, 압록강을 건너온 최유의 군사는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여 퇴각
했다. 이로써 고려에 대한 기황후의 간섭도 막을 내렸다. 그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고려와 백성
들에게 은덕을 끼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기황후는 그러지 않았다. 기황후와 그 일족은 못된 짓
만 골라서 저지름으로써 후대에까지 악명을 떨치고 있다. 권력의 속성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평창매표소를 들멀리로 대성문 대남문을 들려 내려온 북한산 산행은 단풍속 의 고운 행보 였습니다. 한수회의 9명이 함께한 소통 역시도 즐거움을 더하였습니다. 점점 단풍이 짙게 물들어 가는 도심풍경 역시도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성남대로의 가로수도 그렇고 시내버스 노선역시도 아름다운 가을 풍경 입니다. 즐거운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