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프라(Biafra) 또는 비아프라공화국은 1967년에 나이지리아의 남동부의 동부주가 분리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수립된 이그보(Igbo, 이보 Ibo)족을 주체로 한 국가이다. 1967년 5월 30일부터 1970년 1월 15일까지 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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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프라 공화국의 국기와 비아프라의 영토
개요
1963년 연방공화국으로 성립한 나이지리아는 독립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한 북부주가 의회를 장악했는데 이는 동부주와 서부주의 주민들의 불만을 갖게 하는 이유였다. 결국 1966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총리를 비롯한 다수의 군인과 정치가들이 죽고, 이보족 출신 이론시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보족은 크리스트 교를 신봉하는 민족이였고, 이는 북부의 이슬람교도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론시 정권의 연방제 폐지와 중앙집권화 정책은 북부의 반발을 사서 이론시가 암살당하고, 북부 출신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와 동시에 서부주와 북부주의 이보족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고, 새로 정권을 잡은 고워 중령은 이러한 학살을 방관하면서 연방제 부활을 획책하는 신헌법을 제안한다.
<비아프라의 독립을 선언하는 오쥬쿠>
비아프라 공화국의 성립
이러한 중앙정부의 제안에 동부주 출신 군정관 오쥬쿠 중령이 반발했고, 이웃국가인 가나의 중재에 불구하고 타협이 결렬되면서 1967년 5월 30일 이보족의 국가 비아프라 공화국이 탄생한다다. 오쥬쿠 중령은 이보족으로만 구성된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도 외에도 동부주에서 산출되는 석유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비아프라 공화국은 성립 후 가봉, 코트디부아르, 아이티, 탄자니아, 잠비아 등이 승인했다.
<비아프라 전쟁과 비아프라 군>
비아프라 전쟁(나이지리아 내전)과 열강
동부주의 독립에 나이지리아 정부는 당연히 전쟁을 선포하여 그 해 7월 6일에 경제봉쇄와 함께 대대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세계적인 대형 석유회사들, 특히 네덜란드-영국계의 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회사가 전쟁 중 생길 수 있는 이득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유정과 시추권을 보장 받기 위해 자국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내전으로 시작된 비아프라 전쟁은 프랑스가 비아프라 군에 서고, 소련과 영국, 미국이 나이지리아 정부 측에 서면서 열강들의 대리전 양상을 띄게 되었습니다.
초반 고워정권은 '치안활동'수준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전면전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초반 비아프라 군이 수도 라고스 근처까지 진격하여 승기를 잡았지만 곧 나이지리아 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개전 2년만에 대부분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옮기는 등 고립된 상태까지 전락했다. 그러나 비아프라 군은 완강히 저항하였다.
전쟁 중 단 한번 사흘간 휴전이 있었다. 1969년 1월 펠레가 속한 브라질 대표팀이 나이지리아 대표팀과의 경기를 위해 수도 라고스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펠레에 대한 존경으로 양측은 휴전령이 내려졌고, 사흘간 휴전이 이어졌다. 휴전 중 나이지리아 군의 인도로 비아프라 군도 펠레를 접경할 수 있었다. 전쟁 중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였다. 그러나 휴전이 끝나자 곧바로 양측의 치열한 전쟁은 이어졌다.
전쟁 와중 열강들은 완성된 새로운 무기들을 소비할 시장으로 비아프라 전쟁에 막대한 군수물자를 투입했다. 심지어 독일과 프랑스, 차드 용병들로 구성된 비아프라 제 4여단도 창설되어 비아프라 전쟁에 투입되었다. 전쟁 중 아프리카 통일기구를 비롯하여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재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전쟁은 1969년 12월과 1970년 1월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비아프라 군이 궤멸함에 따라 막을 내렸다. 비아프라 군의 지도자 오쥬쿠는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하였다.
<비아프라의 비극>
전쟁의 비극과 후유증
2년간의 전쟁기간 동안 비아프라 군을 괴롭힌 것은 나이지라아의 경제봉쇄에 따른 굶주림이였다. 전쟁으로 사망한 군인의 수는 약 10만명으로 추산되나 200만명에 달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전쟁 종식 후에도 5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특히 기아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로 한 세대가 사라졌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비롯한 국제 구호 단체들이 비아프라에 파견되었으나 역부족이였다.
전후 고워 정권은 민정이양의 약속을 무시한채 집권하다가 1976년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이후 나이지리아는 잠시 민주주의 정권이 성립되나 다시 쿠데타로 무너지는 등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나이지리아 정부의 무능속에 패배자인 이보족은 북부 이슬람교 율법 도입으로 반발하다가 학살 당하기도 했다.(반대로 이보족이 거주하는 동부에서는 율법을 강요하는 북부인들이 살해당했다) 한편 전쟁에서 패한 이보족 지도자들은 다른 국가에서 망명정부를 설립하여 여전히 비아프라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similan9?Redirect=Log&logNo=50011632530
http://blog.naver.com/pljh01?Redirect=Log&logNo=40060583598
사진자료는 외국웹에서 퍼왔습니다.
첫댓글 그런 역사적 비극이 있었군요. 비아프라에 석유만 없었다면, 전쟁이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겠네요. 꼭 제2의 체첸이 생각납니다. (종교전은 코소보를 연상)
컥 정말 막장테크 제대로 타네요 -ㅅ-; (나이지리아가요.)
G-VIRUS님 덕분에 나이지리아에 대해 많이알게되었네요.
절망의 대륙...남아메리카,아프리카,중동...코쟁이들과 가까운 곳은 항상 피와 불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이 활개치는군요.신기하군요.^-^동북아시아가 그나마 멀쩡?한건 어찌보면 당연해보이는군요.멀수록...
동북아시아의 문화 특징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복종이지요. 좋게 말하면 질서적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노예근성... 지금이야 이게 민주화나 자유화에 대한 걸림돌이니 뭐니 하지만 솔직히 신생국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정이지요. 그에 반해 현대문명에 접목할 만한 문화적인 특징 자체가 희박했던 아프리카같은 곳에서는 민족자결이니 뭐니 하는 서방의 사상들이 권력가들에 의해 매우 악용된것 같습니다. 백인들의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현지인들의 잘못도 조금이나마나 피할수는 없을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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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절에는 부족이니 뭐니 상관없이 그냥 나이지리아(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자체가 그 하나의 주로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백인이라는 경찰이자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부족간의 불화가 적었던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이 거세졌을때, 열강 쪽에서는 별 생각없이 주 단위로 독립을 허용해 주었겠고, 이제 백인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니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부족간의 갈등이 폭발... 한게 아닐까 하는게 저의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요 ㅡㅡ;;)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수십년 동안 저렇게 내전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국경선을 그어대는 바람에, 원래는 서로 앙숙처럼 살던 부족들이 한 데 어울려 살게 되었는데 이게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자 어디까지 국경선을 정해야 하느냐를 두고 싸운다고 하더군요. 아프리카의 나라들 국경선들이 직선으로 반듯반듯한 이유도 서구 열강들이 자기들에게 편한대로 정했기 떄문이라고 합니다.
유럽인들이 그런 국경선을 또 죽을힘을 다해 지키는 것도 정말 미스테리한 일이지요
예전에 이와 관련한 다큐 소설이 소개된적이 있었는데요. 당시 참전했던 장교의 회고담식... 내전에서 고립된 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군인들에게 몸을 내맡겼답니다. 근데 그 당시 유행하던 말이 "폭격 하실래요?" 였어요. 이 뜻은 콘돔을 쓸 것인지, 아니면 안 쓸(폭격) 건지를 묻는 말이었답니다. 이 대상이 비아프라인지 콩고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네요. 마지막이 참 안타까운 내용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