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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후에 (창22:1-19절)
포쉐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생의 참 목적은 자신의 자유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주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잘 살지 못하면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살지 못하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그저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호흡을 주셔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에 강론했습니다.
*행17: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엊그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119 대원이 긴급을 요하는 환자를 태우고 응급실로 가는데 병원마다 응급실이 부족하다며 거절을 당합니다. 환자는 호흡이 멎었고 119 대원은 심폐소생술을 4번이나 하면서 환자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병원을 구했지만 결국 환자는 호흡이 끊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호흡이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흡만 하면 살아있는 것입니까. 먹고 마시고 입으면 잘 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다워야 하고, 신자는 신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스스로 굴욕스럽거나 스스로 저주스러운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다 영원히 살아야 잘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순간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행복, 불행이 전혀 없는 참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은 참 만족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심령에 갈증만 더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말씀이 두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그 말씀은 “이 일 후에” 라는 말로서 본문 1절과 20절에 나오는 말로 원문에는 “그리고 이러한 일들 후에” 라는 히브리어 ‘와이히 아할 하드라빔 하엘레’ 입니다. 아브라함은 그토록 원했던 아들 이삭을 낳았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화친조약을 맺음으로 비로소 가정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곱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 ‘엘 올람’을 불렀으며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정에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인생에 더 이상 고통이나 근심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의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그를 부르시고 여호와 이레의 시험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여호와 이레를 시험을 축복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먼저 첫 번째의 “그 일 후에” 라는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기에서 “그 일 후에” 라는 말은 ‘이삭의 탄생과 이스마엘의 문제 해결, 그리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의 화친조약으로 외부의 분쟁 종식과 가정의 화목으로 인한 아브라함 노년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후에’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행복만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한계일 수도 있고 영적으로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십 년을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을 시련에 빠트려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한 마귀의 술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종적으로 확증하여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한 거룩한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의 백성을 연단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제일 큰 시험은 아마도 광야 사십 년의 훈련이었을 것입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 여부를 40년 동안 계속해서 시험하셨습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가나안 땅에는 영원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며 지키고 따르는 것만이 합격의 영광을 얻는 비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자신의 무죄함을 간구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시험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여 자기의 마음을 단련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시26:1-2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시험에 대하여 말하기를 시험은 믿음을 연단하여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행복으로 무디어졌을지도 모르는 믿음과 영성을 다시 한 번 증명 받고 평가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부르시고 대망하던 약속의 후손, 그의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을 제물로 되돌려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을 믿음과 이성의 저울대 앞에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시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이 주는 시험으로 “템프테이션” (Temptation) 곧 유혹의 시험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떨쳐버리지 못할 때 유혹의 시험을 사탄으로부터 받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시험은 아담과 하와가 당했던 아주 달콤한 것으로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험을 극복하는 방법은 먼저 사탄이 시험할 만한 요인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적인 시험으로 대표적인 예로는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아! 유혹이 오는구나! 내가 이 유혹을 이겨내야지” 하면서 그 나무를 바라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으면 능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반대로 그 자리에 서서 그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함으로 이에 그 실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사탄의 유혹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사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탄의 유혹보다도 이 시험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사탄의 유혹이 될 만한 근거를 처음부터 아예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 읽기와 묵상과 기도를 게을리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으로 “테스트” (Test) 입니다. 이 말은 순수하게 ‘점검해 본다.’ ‘알아 본다.’ 라는 뜻으로 연단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반드시 피할 길이 있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할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험을 받을 때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우리의 취약점을 보강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며, 이 시험은 절대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시고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피크(peak)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생애의 최고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유의해야 합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복을 빼앗는 시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를 기다려 준비가 된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자격자가 되며 준비된 자가 되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은 복을 미리 준비해놓고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큰 복을 받을 준비가 갖추어지는데 그것은 진정한 복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복의 정체를 바로 알며, 그 복을 지키는 겸손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 복을 받는 사람의 겸손만큼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복을 감당할 능력도 아울러 주셔야 합니다. 잠언에 나오는 야게의 아들 아굴의 기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잠30:7-9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불같은 시험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1) 첫째—그는 하나님의 시험에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엇갈리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는 결단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인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산으로 길을 떠납니다. 가나안 땅의 남방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사흘이나 걸리는 먼 길입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는 아브라함! 그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거역하고 싶은 육신의 유혹,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때도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집안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행할 때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2) 둘째—그는 하나님의 시험에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빨리 걸어도 사흘 길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하나님의 시험, 자식을 산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이방 우상들이 요구하는 시험입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불만과 화가 마음속에서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데 사흘 동안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순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도 사흘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걸어간 사흘 길은 주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사흘 길의 예표였습니다.
*눅13:32-33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쫒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사흘 길은 먼 길입니다.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삭의 희생은 자신을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전혀 모순된 반대의 것으로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라.” 고 믿고 조용히 순종하였습니다.
3) 셋째--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동행하던 종들은 산 아래 머물게 하고 아들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삭은 갑자기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러 가는데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제물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담대히 말합니다.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삭을 비치려는 순간까지 수양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 사환들에게 한 말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어린 자식을 바치는 일에 조금도 마음이 상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번제로 바치러 가면서도 그는 아들과 함께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제물로 바치는 아들을 다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여호와 이레“ 입니다. 하나님은 이삭만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이삭을 대신하여 바칠 희생제물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수양을 주신 것입니다. 그 수양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실 메시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대속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을 보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귀에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창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2. 두 번째의 “이 일 후에” 입니다.
*창22:20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두 번째의 “이 일 후에” 라는 말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 겪은 아브라함 개인과 가정의 위기에 긍정적으로 대처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함으로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약속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이삭을 통하여 오는 자손 축복과 대망의 메시야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또 하나의 보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고향의 가문의 소식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나홀이 본처인 밀가에게서 아들 여덟을 낳았고, 첩 르우마에게서 아들 넷을 낳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들은 후일에 아람 족속 12지파의 족장들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나흘과 하란이라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하란은 롯의 아비였으나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죽었고 데라가 아브람과 손자 롯과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나흘이 함께 하였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이 떠난 후에 나홀이 홀로 하란으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소생이 번성하여 본처에게서 여덟 아들과 후처에게서 네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은 아브라함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홀의 여덟 번째 아들인 브두엘이 리브가라는 딸을 낳았다는 기록입니다. 후일에 이삭이 아내를 구할 때에 그의 친척이 살고 있는 메소보다미아 즉 하란으로 종을 보내었고 브두엘이 낳은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또한 브두엘의 아들 라반은 레아와 라헬 두 딸을 낳아 후일에 야곱에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 혈통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모리아 산의 축복이 구체적인 현실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인 이삭은 가나안 땅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아브라함의 혈통이어야 했습니다. 그 혈통은 오직 나홀의 소식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나온 지 약 60 여년 만에 너무나도 기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것도 모리아 산의 큰 시험 후에 들려온 소식이었기에 아브라함은 이 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온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블레셋 땅에서 행복한 가정의 달콤한 현실에 젖어 있었을 때, 하란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준비하셨고 나아가 야곱의 두 아내를 예비하고 그들에게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가나안 역사의 주역에서 서서히 사라져야 하고 새로운 구속사의 주인공인 이삭의 시대를 준비함에 있어 아브라함의 영성을 하늘로 끌어 올리고 이삭의 믿음을 연단시키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의 모든 준비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최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 이삭,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보석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꿈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이삭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고 번제할 나무를 등에 지고 모리아 산을 오를 만큼 청년으로 잘 자랐습니다. 그 아들을 보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태어날 약속의 손자들까지 미리 보면서 지극히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꿈을 무참히 짓밟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함께 받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최선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최상의 봉사와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최상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를 하였고 주저함 없이 결정하고 시행했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여생이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 월등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에 전적으로 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바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역시 ’여호와 이레‘라는 최상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천년 세월을 두고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것을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것을 받지 못하고 그저 이름뿐인 성도로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은 그 어떤 계산도 없이 단지 전폭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데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고라 자손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다가 믿음을 회복하는 은총을 다시 입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그 눈물의 골짜기가 복이 된 것을 깨닫고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시84:5-6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눈물 골짜기를 생명을 주는 샘으로 바꾸시며”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눈물 골짜기를 생명 샘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신자에게 오는 하나님의 불같은 시험은 당시에는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는 아픔 같지만 하나님은 그 골짜기를 생명의 샘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선 줄로 생각할 때에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봄바람에 돛을 단 것같은 순풍이 불어왔을 때 역풍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바라보고 그 어떤 시험에도 능히 이기고 승리하는 자기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난 후에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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