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서울 숭례문 바깥 용산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한 군사 요충지다. 강북의 용산은 옛 한양 도성에서 한강으로부터 접하는 내륙과 외세 문물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용 ‘용(龍)’ 자로 시작되는 땅이름은 여럿이다. 제주에는 용머리해안이 있고, 부산에는 자갈치시장 가까운 곳에 용두산이 있다. 목포에도 해안가 갓바위로 유명한 용해동이 있다.
내가 젊은 날 살았던 밀양에는 용두목이 있다. 이후 터를 잡은 창원에는 팔룡산이 있다. 팔룡산은 반룡산(盤龍山)에 어원을 두었다. 소반 위에 여덟 마리 용이 앉은 형세란다. 그래서 여덟 팔(八)로 바뀌어 팔룡산이라 불린다. 지리산에서 뻗쳐온 낙남정맥이 무학산에서 천주산으로 이어지면서 정병산으로 건너가기 전 구룡산을 만난다. 구룡산에선 다시 꼬리가 하나 생겨 백월산으로 뻗었다.
지명은 순우리말일 때 그 지역에 대한 이해가 쉽다. 한자어일지라도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한 지명이 있다. 앞서 언급한 구룡산(九龍山)을 살펴보자. 불과 해발고도가 사백 미터 조금 넘는 산이다. 산세가 그리 높지 않아 산줄기가 불끈불끈하거나 암반으로 된 골산도 아니다. 아홉 마리 용이 뒤엉켜 있는 산이라고 볼 수 없는 산이다. 용은 고사하고 아홉 마리 뱀이 엉킨 형상도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구룡산이 아홉 마리 용의 형상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산 아래 용(龍)자 돌림 마을 이름이 많다는 것을 알고부터 구룡산의 ‘구(九)’는 ‘아홉 구(九)’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읍 면소재지 앞은 용강(龍降), 용암(龍巖), 용전(龍田), 용잠(龍潛), 용정(龍井)마을이 있다. 주남저수지와 산남저수지 사이엔 용산(龍山)마을이 있다. 그 사이엔 마룡(馬龍)마을이 있다.
‘구(九)’의 중심의미는 ‘아홉’이지만 주변의미는 여럿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많은 수’다. 산 아래 용(龍)자 돌림 마을 이름을 많이 거느렸다는 뜻이렷다. 산중에도 용이 사는 곳이 있다만 그때는 분명 깊은 물웅덩이가 있다. 그것이 이름 하여 용소(龍沼)다. 그 나머지는 강가나 바닷가라야 용이 사는 곳이다. 용은 물이 있는 늪지거나 강이나 바다에 살았다. 토끼전 배경도 바다 속 용궁이다.
시월 초순 학교 정기고사가 둘째 날 오후였다. 업무부서 동료들과 학교 근처 토속식당에서 보리 비빔밥을 들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 앞서 언급한 용(龍) 자 돌림 마을이 궁금해 길을 나섰다. 먼저 반송우체국에 들려 택배를 한 건 보냈다. 이후 도계동 만남의 광장으로 나갔더니 댓거리에서 본포로 오가는 41번이 왔다. 내가 내린 곳은 용강, 용암, 용전, 용잠, 용정, 마룡을 지난 용산마을이다.
용산마을은 산남저수지와 주남저수지 사이에 있는 마을이었다. 예전 마을 앞에는 초등학교도 있었다. 그 초등학교는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환경생태학교로 바뀌었다. 나는 마을 들머리 민물횟집에서 곡차를 한 병 시켰다. 안주는 횟집 손님 밑반찬으로 나가는 도토리묵 몇 점이었다. 곡차를 비우고 산남저수지를 뒤로 하고 주남저수지를 역순으로 순례했다. 텅 빈 새장 같은 주남저수지였다.
가을주남저수지는 여름철새는 떠나고 겨울철새는 찾아오질 않은 때다. 계절 건너 봄날엔 겨울철새가 본향으로 올라가고 여름 철새가 찾아오지 않은 때다. 현세 녹색 지구는 얼음으로 뒤덮였던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 따뜻한 간빙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나는 봄과 가을의 주남저수지를 간조기(間鳥期)라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 드넓은 수면 위에는 시들어가는 연잎만 무성했다.
용산마을에서 배수장을 지나 강둑을 계속 걸었다. 둑에는 물억새 이삭이 패어났다. 둑길 풀잎에 몸을 숨긴 풀벌레들 소리가 들려왔다. 빨간 고추잠자리도 날았다. 둑 아래 대산 들녘은 벼들이 익어 황금빛이었다. 저 멀리 진영 신도시 바깥 봉화산엔 사자바위가 희미하게 보였다. 제3배수장에서 주남돌다리로 갔다. 판신마을에서 주남마을로 건너는 개울에 운치 있게 놓인 돌다리를 건너보았다. 1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