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풍경을 담다
세상의 모든 초록이 피어나는
봄날의 금강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2019. 3+4 vol. 500
봄꽃이 화르르 지고 난 뒤의 주인공은 신록이다.
연둣빛 여린 새순은 꽃보다 화려하다.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옮겨가는 시간.
마음이 급해지는 건 신록의 시간이 꽃만큼 짧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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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graph 박경일(문화일보 여행전문기자)
봄의 신록이 빚어낸 대표 경관으로 충북 옥천을 꼽는 것은 거기에 금강이 있기 때문이다. 봄이면 신록은 물이 오르는 물가의 나무들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너무 넓지 않고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징검다리 여남은 개쯤이면 건너갈 수 있는 너비의 물길에서 신록은 가장 화려하다. 감히 말하건대 매화 피는 이른 봄의 강이 섬진강이라면, 봄의 한복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은 바로 금강이다.
옥천은 금강의 상류에 있다. 대청호에 담기기 전의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세상의 모든’ 초록의 색을 만난다. 연한 수채화 물감이 지나간 색감이 있는가 하면 굵은 붓으로
물감을 듬뿍 찍어서 빠르게 휘저은 것 같은 초록도 있다.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나는 이런 신록 앞에서 어리고 순한 것들의 아름다운 시간을 생각한다.
서울에서 옥천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서 옥천IC로 나오면 금방이다. 하지만 산과 들이 온통 신록으로 물들고 있는 봄날의 옥천은, 그렇게 가는 게 아니다.
청주쯤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25번 국도를 타고 피반령을 넘어 보은을 거쳐 옥천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그게 너무 멀리 도는 길이라면 경부고속도로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회인IC로 나와서 수리티재를 넘어가는 것까지는 양보할 수 있겠다.
수리티재를 넘어서 보은과 옥천을 가르는 고갯마루 위에서 옥천 땅을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피반령을 넘거나 수리티재를 넘는 길은 시간도 더 걸리고 속도도 낼 수 없지만, 빨리 질러가면 볼 수 없는 아늑한 시골 마을의 고향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속도를 높이느라 지나친 게 어디 한 두 가지인가.
대청호 옆 홍차가게 소정. 봄날의 금강을 느긋하게 즐기기 좋다.
옥천에서 만나는 고향의 풍경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빛날 때가 바로 신록이 물들기 시작하는 이즈음이다. 옥천의 금강 상류 물줄기 가운데 가장 급격하게 사행하는 것이 서화천이다. 서화천에서 그림 같은 강변을 따라가는 여정은 작은 마을 지오리에서 출발한다.
서화천 물길이 굽이치는 지오리 마을 뒤에 불쑥 솟은 동산이 하나 있다. 산이라기에는 어림없고, 언덕이라 하기에는 좀 높은 곳인데 여기 올라서 굽어보는 서화천의 물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발 아래로 크게 U자로 굽이치는 물길 주변은 제법 너른 청보리밭이다. 청보리밭을 끼고 있는 농가 마당에 배꽃과 복사꽃이 만발했다.
지오리에서 서화천 물길을 잠깐 따라가면, 물 건너로 양쪽에 누각을 거느린 한옥이 나온다. 서화천의 물과 강변의 신록이 어우러진 봉긋한 구릉에 세워진 이 멋진 건물이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이 낙향해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이지당(二止堂)이다.
서당은 양쪽 끝에 앉아서 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가 다른 누각을 앉혔는데, 허리를 세우기에는 누대의 높이가 낮다. 아마도 자연을 즐기되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교육 공간의 엄격함이 건축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이지당 쪽으로 서화천을 건너는 다리 ‘이지당교’를 넘어서면 길은 곧 물길을 버리고 숲길로 바뀐다. ‘옥천 부소담악 자전거길’ 안내판을 따라가는 길이다. 길은 고리산(환산·581m) 허리쯤으로 이어진다. 벚꽃잎 흩날리는 이 길 위에서 드문드문 만나는 마을마다 어찌나 푸근해 보이는지 아예 서화천이 바라다보이는 자리를 골라 이쯤에다 집을 짓고 살고 싶어질 정도다. 비탈진 산 사면에 배나무를 심어 기르는 ‘고리산 배밭 농원’에는 배꽃이 만개했고, 울안에 심어둔 복숭아나무에는 분홍빛 복사꽃이 꽃등처럼 환했다.
어디 이곳 뿐일까. 이원대교 부근 지탄역에서 금강 상류로 이어지는 둑에 오르면 버드나무 신록이 강변 습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황홀한 경관이 펼쳐진다. 동이면 적하리의 음식점인 ‘탐강’의 이름을 차량 내비게이터에 찍고 찾아가면 너른 자갈밭 너머로 연초록 강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이게 모두 봄날의 금강이 빚어낸 경관들이다. 그래,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는 봄 풍경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이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