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5대 궁궐 중 남은 두 곳을 오늘 다 가보려고 한다. 우선 지난번에 스쳐지나갔던 덕수궁을 둘러보고 성공회 성당을 지나 광화문에서 종로로 죽 걸으면서 창덕궁까지 갈 예정이다.
덕수궁 정문 대한문 공사 때문에 옆문으로 들어갔다. 어제 뉴스에서 덕수궁의 궁중유물전시관 이사 장면을 보여주더니 그래서 그런지 뭔가 허전하다. 석조전 건물 뒤 산책길로 걸어가는데 괜히 쓸쓸하다.
덕수궁은 그 옛날 매년 가을이면 궁궐 정원에서는 국화전시회를 하면서 석조전에서는 국전이 개최되어서 덕수궁 국전은 유명했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도 않았으면서 매년 국전이 열리면 서울에 가고싶어서 대구 가시나 둘이서 안달이었다. 당일 코스로 계획을 세워서 첫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왔다가 막차를 타고 내려가는 가을 나들이를 여러 번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갖가지 모양이 아름다운 국화전시회에서 국화 향기를 맡으며 가을이 깊어 가는 것을 음미하고는 했는데 과천에 미술관이 생긴 이후로 국전을 관람한 기억은 없다.
다른 궁궐에는 없는 현대적인 건물인 석조전이 있어서 그런지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덕수궁에는 있다. 그래서 다른 궁궐보다는 더 가까워 보이고 부담이 없다.
비가 한 두 방울 듣기 시작하는 덕수궁 정원을 하릴없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사색에 잠겨보다가 사진도 여러 장 찍어본다. 세월은 흘러갔지만 건물은 남아서 이렇게 사람들은 찾아오고 그 세월을 그리워하다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도심 속에 이런 궁궐이 남아있는 게 너무 고맙고 마음에 안식을 주는 것 같다.
덕수궁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성공회성당으로 들어갔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 성당은 서울에 현존하는 유일한 로마네스크 건축물로 88올림픽 당시 세계건축가들이 선정한 아름다운 건물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건물이라 이채롭고 아름답다. 대학 졸업 후 산업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곳 교장선생님이 성공회 신부님이셨다. 사모님과 아들 하나 그리고 신부님이 성당 사택에서 사셨는데 선생들끼리 성공회는 결혼에 성공해서 그렇게 이름지었다지 하는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성당 본당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좀 멋적어서 머뭇거리다가 그냥 나왔다.
성당을 나와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거리를 걷는다. 이슬비에 촉촉히 젖은 거리가 신선해 보인다. 교보문고 건너편 신호등을 건너 종로로 접어든다. 종각에서 보신각을 지나 아트박스란 팬시 문구점에 들어가서 주머니 하나를 골랐다. 저번 창경궁에서 카메라 케이스를 잃어버려 영 불편하던 참이었다. 꽃 분홍색으로 솜이 들어있는 톡톡한 놈으로 골랐다. 산뜻해진 기분으로 신호등을 건너니 탑골공원이다. 입구부터 독특했다. 할아버지들이 우글거린다. 원각사 터와 원각사지 9층 석탑이 있는 곳이라 당초엔 들러볼 예정이었는데 탑골공원으로 들어갈 용기가 도저히 들지 않는다. 중절모에 멋을 한껏 부린 할아버지부터 노숙자 풍의 할아버지까지 지천으로 많다.
얼른 길 건너 인사동으로 방향을 돌린다. 비 내리는 인사동은 마음이 놓이게 하는 푸근함이 있다. 늦은 점심은 쫄면으로 때운다. 이번 여행동안 냉면과 쫄면은 단골 메뉴다. 걷다보니 더워서 뜨거운 음식이 싫은 것도 있지만 혼자서 먹기엔 제일 만만한 메뉴이기 때문이다.
인사동도 한 5년 전에 와봤을 때보다 많이 변해있다. 도로도 깨끗이 정비해 놓았고 못 보던 건물도 새로 생긴 것이 많았다. 특히 쌈지길이라는 건물은 구조도 특이했고 가게들도 너무 예뻤다. 가게 앞에 예쁜 들꽃 화분들을 줄지어서 화분 50개 정도를 장식해 놓은 곳도 있다. 일층부터 오층까지 계단이 따로 있지만 서서히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되어있는 나선형구조의 건물로서 각층마다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정말 희한하고 재미있는 건물이었다.
미술관 몇 곳을 들려 다양하게 그림을 감상하고 안국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창덕궁으로 갈 요량으로.
창덕궁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개별관람이 안 되는 곳이다. 안내원을 따라서 정해진 시간에 들어가야 한다. 일반관람이 매 15분, 45분에 있었고 특별관람은 하루에 3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시간이 안 맞아서 특별관람은 다음을 기약하였고 안내원을 따라서 일반관람을 시작하였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더욱 풍성하게 궁궐을 느낄 수 있었다.
돈화문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을 거쳐 비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착각이 일기도 했다. 내가 국민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만화책이 비밀의 화원이었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 유명한 명작소설이었다. 비원에는 화초를 심지 못하도록 되어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목이 우거져 청신한 수목 내음이 좋았다. 비원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부용지에 들려 아름다운 정자 부용정을 보고 멋진 건물 주합루에 심취해서 자세히 보았다. 입실은 금지되어 있어서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정조 때 지은 누각으로 궁중도서관인 규장각과 열람실이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연못을 바라보며 공부를 하면 공부가 저절로 되었을 듯 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연경당에 들렸다. 순조 때 지은 것으로 궁궐 안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다. 임금님이 민가체험을 해보고싶을 때 들렸던 곳이라는데 궁궐보다는 더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몸 속에 평민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겠지.
마지막으로 어차고에 들렀는데 순종이 사용하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장난아니게 멋들어진 자동차는 캐딜락과 다임러 라고 한다.
요 며칠간 세 번에 걸쳐 조선의 5대 궁궐을 돌아보다 보니 마치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하다. 하긴 다른 세상은 다른 세상이지. 풍수지리상으로 가장 좋은 중심지에 넓은 터를 차지하고 지은 곳이니 오죽 하겠는가?
가끔 마음이 지쳐 허전할 때 과거 역사를 뒤돌아보며 그땐 그랬었지 하는 회고를 해봄으로서 다시 힘을 얻는 그런 여지를 유적지에서 찾을 수 있기를 또 지친 마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첫댓글 위에서 차례로 성공회성당, 인사동 쌈지길의 가게, 창덕궁 비원안 정자.
아니, 멋진 사진까지! 선배님, 서울 지역 관광 전문 가이드로 나서도 손색이 없으시겠어요^^ 나중에 기회 만들어서 꼭 여행해 보고 싶네요.
책 한번 냅시다
서울...멋지군 ^^
설마 직접 찍으신 사진이여요? 음~너무 근사해요!
고롬 직접 찍은거지.그냥 셧터만 눌렀을 뿐인걸.... 다른 편에도 사진 올리까?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