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먼옛날. 노비의 값은 얼마였을까요
《말ㆍ馬보다 하찮았던 노비》
삼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그 어떤 시대에도 노비는 단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성종 후기의 태평치세라는 영조ㆍ정조 때에도 노비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한줌도 안되는 귀족과 양반이 오로지 글공부나 하고 국가 백년지대계 운운하는 동안 이 '말하는 짐승'들은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렸다.
양반집이면 누구나 노비를 거느렸고 상속할 때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조선의 노비들 역시 대대손손 노비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에 성호 이익 같은이는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 없었던 것으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 그 괴로움을 받게 된다'
며 안타까워 하고있다.
노비들은 심지어 말ㆍ馬보다 값이 쌌다.,
1698년 7월 6일,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무릇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五升布) 15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값은 4,5백 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은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살에서 40살 까지는 4백 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1살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때는 노비 열명이 말 한마리 값》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같은 戰時에는 노비의 값도 더욱 폭락했다.
임진란이나 병자란 때는 말 한마리 값이 은자 열냥정도 라고 했으니 노비 한명의 값이 은자 한냥에 불과했더ㆍ 셈이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는 동산(動産)이었다.
재산 상속을 할 때는 일일이 노비의 숫자를 셈하여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노비들읜 주인집의 상속에 즈음하여 부모 자식간에 생이별을 하기가 다반사였다.
노비 매매를 빙자하여 멀쩡한 양인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먹는 인신매매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세비 들어와 노비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비는 주인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대상이었다.
주인 나리의 심부름을 하는 청지기,
상전이 외출할 때 수행하던 상노,
안방마님의 시중을 들며 얘기 상대를 해 주는 안잠자기.
마님의 몸종인 상지기,
밥을 짓는 식모나 찬모, 바느질 하는 침모 등도 노비나 다름 없었다.
이들 역시 매매의 대상이었는데,
동학혁명 당시에는 소 한마리와 계집종 하나를 포함한 다섯명의 노비와 맞바꾸었다.
노비(남자종 奴ㆍ여자종 婢)는
人이 아니고 口.
첫댓글 이런 시대도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