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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묵상글 ( 연중 제27주일. - 계단을 밟아야 단계에 오르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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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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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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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154447
김레오나르도 2018.10.07. 04:53
- 계단을 밟아야 단계에 오르지.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혼장을 써주라는 모세의 계명이 맞는 것인지 바리사이들이 묻자
주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리 한 것이니
그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라는 동태복수도 주님께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동태복수법이 자기가 당한 이상으로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겼으니
이 법도 사실은 좋은 의도의 법이지만 그래도 본래 하느님 뜻은 아니라는
말씀이고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번역은 완고함이라고 하였지만 개신교 번역의 완악함이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완고할 뿐 아니라 악하여 제 멋대로 아내를 버리는
당시 사람들과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완악한 인간, 인간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완악한 편인 남성이 자기중심으로 소유도 하고 버리기도
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짝지어주신 거면 싫어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남편이 매일 두들겨 패고, 심지어 칼을 듣고 죽이려고까지 하는데도?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요,
버리지 말고 데리고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음에 들면 데리고 살고 싫으면 차버리려는 마음가짐은 안 되고,
하느님께서 이 짝을 내게 주신 것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점차 사랑을 완성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내 짝이 내가 선택한 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으로 받아들이는 성사적인 자세인데 그런데
성사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이잖아요?
잘 아시다시피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성사적으로 마실 수 있고 기호적으로 마실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그저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며 마시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은 혼자 마셔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것이요,
차 한 잔을 마셔도 같이 마시고 싶어 하고 그래서 같이 마십니다.
그런데 커피와 나만 있는 사람,
커피와 애인과 내가 있는 사람,
커피와 애인과 하느님과 내가 있는 사람, 이 중에 누가 가장 성사적입니까?
요즘 혼족이 참으로 많습니다.
혼인을 한 족속이 많은 것이 아니라
혼자인 족속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절대로 하느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서 하나인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혼자서 하나인 사람은 이 사랑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제가 자주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계단을 밟아 단계에 오른다는 겁니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사다리삼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프란치스코는 분명 사람과 어울리지 못해 반려견과 사는 요즘 사람처럼
인간사랑을 통하지 않고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께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사랑의 여러 계단을 밟아 하느님 사랑의 단계까지 오르라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요 소명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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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모든 일에 있어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욕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마지못해, 할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삶의 권태로움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해 보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곡들을 수천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공연해 왔는데 지겹지 않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아이작 스턴은 연습하고 또 할수록 “이거야!”하는 인사이트를 얻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막혔던 부분이 뚫리거나, 뻔하게 지나가던 부분에서 새로움을 느끼면서 똑같은 곡을 평생 연주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렇게 반복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25년째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지만,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물론 처음 2~3년 동안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복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움도 더 많이 그리고 그 의미도 크게 다가옵니다.
특별히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 권태기를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인이든 부부든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변화 없는 관계가 지속되거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면 이 권태기가 온다고 합니다. 반복 안에서의 깊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혼을 율법으로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결합한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혼인은 사랑의 계약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며 서로 일치를 이루어야 할 영원한 책임과 소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깊이입니다. 이 깊이는 혼인에서만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축복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율법에 갇혀서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계획은 삶의 반복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반복이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반복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복되어도 깊이가 있으면 늘 새롭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깊이를 마음 깊이 새기면서 가정 안에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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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노력 없이 쓰인 글은 대개 감흥 없이 읽힌다(사무엘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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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주 2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혼인의 의미를 되새겨 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고, 우리 모두는 그분 한 분에게서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남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혼인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 원칙>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르 10,6)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남자나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서로에게 내어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서로 보완해서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할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임을 드러내줍니다.
<두 번째 원칙>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는 것입니다.
이는 혼인이 단지 서로를 위한 인간적인 “약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성사로서의 서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혹은 서로가 결혼합의를 취소하면 그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뗄레야 뗄 수 없는 결속력을 지닌, 아무리 당사자들이 그 합의를 취소하더라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서약’임을 말해줍니다. 곧 상호신뢰의 인격 관계로 묶어진 평생운명 공동체로의 ‘서약’입니다.
그래서 <혼배성사>에서 혼인서약을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 ~~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이하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 사람의 서약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수도자들의 서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서약임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은 상대를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맞이하여 평생토록 한 몸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드러내줍니다. 곧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와 의무를 함께 지는 시작이요,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아주며 사랑과 존경으로 함께 나아가는 영적동반자요 협력자로서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은 사랑과 존경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녀인 아기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아기는 자녀만이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아기이기도 합니다. 남편이라는 철부지 아기와 아내라는 힘없는 어린아이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서로의 무력함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자녀인 아기를 사랑하기보다도 남편이나 아내 혹은 공동체의 동료라는 아기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를 우러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서로를 존경함이야말로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결혼서약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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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2,23).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것 아니냐?”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아껴줄 것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가만히 보면 쟤가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하고 아담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애를 사랑할 거 아니냐?”
하느님께서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남자만으로도 그리고 여자만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각각 나름대로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이 있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줘야 할 동반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니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서로 나를 위한 맹한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가운데 공로를 쌓고 덕을 닦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10,7)라고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의 요건을 보면 먼저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 의지 않고 자기 짝을 만나 독립된 자기 생활을 위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다 큰 자녀가 자기 생활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기대고, 얹혀사는 것은 불효이며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녀를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 비관하는 어르신도 계신 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새 가정을 형성함을 축복해야 합니다. 성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줄 배우자를 “거들 짝”(창세2,1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둘 짝을 만나는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혼인 안에서 인격적 결합을 이루어“둘이 한 몸”이 되어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살아온 삶의 환경과 양식이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는 기분이 남자는 1.책임감이 앞선다(27%). 2.자랑스럽다(18.9%). 3.어른이 된 느낌(16.2%) 의 순입니다. 그에 비해 여자는 1.섭섭하다(41.9%) 2.어른이 된 느낌(16.1%) 3.책임감이 앞선다(12.9%) 로 조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고려하는 사항을 보면 남자는 1.성격(27.3%) 2.외모(22.8%). 3.가정환경(21.4%) 그리고 여자는 1.사회적 지위(25.6%) 2.성격(24.2) 3.가정환경(19.3%).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지 못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강요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서로 ‘너와 나는 이것이 틀리다’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었으면 죽기까지 그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 준 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혼인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하는 데 인연은 우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한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통해서 나도 구원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신의와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해서도 안 되며 하더라도 원인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엮어진 이상 사랑에 사랑을 더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에페5,22.33). 결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여 행복한 날 이루시길 빕니다. 서로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하고 일상 안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62,5). 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한 주간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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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는 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2011년에, 어머님은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신앙 안에서 저는 부모님과 함께 하니 기쁨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자삼락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똑똑한 제자를 만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높은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식, 세대와 세대가 경험과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가르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 중에는 ‘가르치는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였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주일하교 교사의 노래 중에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소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화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멀리서 신부님들이 제가 있는 신문사를 찾아왔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안식년 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자녀들이 뉴욕에서 공부하는 교우들도 왔습니다. 신문사는 마치 손님들이 머무는 사랑방 같았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맨해튼 구경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도 갔습니다. 지난 2월에 달라스로 왔습니다. 제가 온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오겠다는 손님도 없었습니다. 달라스의 여름이 워낙 덥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10월에는 손님이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있던 신문사의 후임 신부님이 신문 홍보를 위해 왔습니다. 모처럼 뉴욕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이 2주일 정도 온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달라스에서 사목했던 전임 신부님도 1달 정도 온다고 합니다. 12월에도 손님들이 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명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그러니 나에게 와서 쉬어라.” 벗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다면 제게도 기쁨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명동거리를 걸을 때입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는 연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신발에 껌이 묻었던지, 남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신발에 껌이 묻었네. 남자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서 사랑하는 여인의 신을 벗겨서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발에 신을 신겨주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가을바람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신발에 묻은 껌을 기꺼이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들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여동생과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엘 갔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시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고추, 마늘, 깨를 보자기에 담아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짐들은 모두 어머니가 양손에 들고,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담배를 하나 들고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그런 것을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짐을 들지는 않으셨지만 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님을 대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부부는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짐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부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주려고 할 때, 가정은 생명이 넘쳐나는 갈릴래아 호수처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에게 받으려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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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혼인성사를 행할 때 사용되는 복음 중 하나입니다. 왜 주일 복음이 혼인에 관한 복음일까요?
요즘 사람들이 이혼은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혼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픈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이혼보다는 오히려 결혼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고 여기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사랑이라는 말로 홍수가 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사랑’으로 홍수가 나길 바라셨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이것을 바꾸면 언제나, 늘, 항상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오늘 복음이 혼인에 대한 복음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혼인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자신들을 하느님과 혼인한 여인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을 버린 이스라엘 민족과 달리 그분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천국 문을 여셨고,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혼인은, 세례는, 신앙은 결혼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혼인은 이루어짐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평생 서로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께 성실하길 주님께서는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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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 샌드위치
각 나라와 지역은 그 나름의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 안에는 맛도 향도 포함됩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놀란 것은 맛이었습니다.
먹음직해 보이는 음식 중 일부는 너무 짰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작은 도시의 시장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장을 돌아보던 중 사람들이 줄 서 있는 한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여행하는 중 길게 줄 서 있는 가게를 발견한다면 꼭 그 줄에 서서 그 음식을 맛봐라.
여행하며 음식을 즐기던 백종원 님이 했던 말입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일행과 줄을 섰고 ‘랍스터 샌드위치’를 샀습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감동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짜지도 달지도 않고 랍스터의 향기가 그대로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들 말입니다.
오늘이라는 여행 안에 우리에게도 이런 선물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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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키엣 대주교님.
삼위일체 사랑과 우리의 사랑
하느님께 가는 길은 혼자보다 둘이 함께, 같이 갈 때 지치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축복의 징표입니다. 부부는 서로 하나이기에 서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그 사랑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어떤 누구도 그 사랑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배반한다면 그 행복도 파괴될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후 아담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금단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그녀를 선택한 것은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짓지 않고 비난만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언제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고 약속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결혼식에서 평생 사랑하고, 평생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 맹세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맹세를 하더라도 우리 몸 안에 깊이 존재하고 있는 악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몸 안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악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기에 내가 흔들리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도록 조종합니다. 그러나 악을 이기는 힘은 나에게는 없습니다. 내 몸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실 때 만이 그 악을 누를 수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꿈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내와 남편, 자식,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한번 돌아봐 주십시오.
그가 기쁠 때, 슬플 때, 힘들 때 옆에서 그저 그를 바라봐 주십시오. 그의 고통이 덜어지고, 그 사람이 다시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진다면 나 역시 행복함을 느낄 것입니다. 내 옆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슬퍼 보이고 추해 보인다면 그건 내 탓입니다. 그를 사랑으로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을 그토록 아끼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함께 하자는 말을 꼭 해보십시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남녀의 사랑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삼위 일체의 사랑, 그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영원한 합일체의 완벽한 사랑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가정이 둘이 되고 셋으로 나누어지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 진실된 사랑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내 옆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2. 지금 우리의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멀어져 가고 있습니까? 왜 멀어지고 있는 지, 왜 처음의 약속과는 다른 사랑이 되어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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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주님과 일치의 여정
“주님 중심, 주님 닮기, 서로간 거리”
교회는 하느님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식구, 한가족입니다. ‘1인 가구’라 해도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외로울 수 없음은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에 속해 있기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에 속해 이렇게 주님의 한가족임을 확인하는 미사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축복의 하느님,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고백이 정말 ‘하느님 다우심’을 잘 드러냅니다.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우리는 허무의 존재, 무지의 존재도 아닌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10월3일 결혼 50주년을 맞이한 어느 노부부중 부인이 쓴 글 제목도 반가웠습니다. “반세기 누려온 가난한 행복”, 이 노부부는 무조건 구원이요 성인이라 저는 감히 고백합니다.
‘부부는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제 꽤 살고 보니 정말 함께 평생 살아가는 부부들을 보면 참 신기하고 반갑고 기쁘고 고맙고 존경스럽습니다. 얼마전 두가지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자매가 얼마나 기뻐하는 지, 순간 깨달은 진리입니다.
“아, 서로가 구원했구나! 서로 감사해야 하겠구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혼인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혼인할 수 없고, 자식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습니다. 부부 둘이 함께 해야 혼인도 할 수 있고 자식도 가질 수 있음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사이좋게 살다가 직장 문제로 3개월 “혼자”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합류하여 “함께” 살게 된 분에게 그 차이를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와 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니! 정말 소스라치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를 보세요. 하느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반려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에 앞서 사람인 아담은 하느님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하셨으나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반려견이 반려식물이 좋다 해도 사람 아닌 것들은 결코 나의 반쪽인 협력자가, 반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빼낸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사람에게 데려오셨을 때, 기뻐 환호하는 사람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얼마전 사랑하는 짝을 만나 기뻐하는 형제자매의 심정도 이와 흡사했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이 진리를 재차 확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 영문 주석 마지막 말마디도 잊지 못니다.
“But Jesus is right! Divorce is not the answer”
(예수님이 맞다! 이혼은 답이 아니다)
그래서 저는 힘든 부부가정생활중 기도하며 온힘을 다해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지체없이 “살아 있는 순교자”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것은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간곡한 요청입니다.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보라는 것이며, 그래도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사랑의 하느님은 이혼을 허락보다는 묵인하실 것입니다.
아주 예전 제 신학교 시절 교회법 교수신부님이 로마에서 혼인법 마지막 교수님이 했다는 말마디로 한학기 강의를 끝내던 장면도 잊지 못합니다. 고도의 사목적 배려로, “교회 혼인법을 총동원하여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살 수 없는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바로 이것이 복음정신이다.”라는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쪽입니다. 참 좋은 협력자와 반려자를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한 한쪽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일치만으로는 하나된다 해도 영원한 반쪽으로 머물수 있으니, 나의 원래 반쪽인 주님과 만나야 비로소 온전한 한쪽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고마운 것은 내 반쪽인 주님과 하나됨으로 온전한 한쪽의 사람이 된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진짜 반쪽인 주님과의 일치가 없으면 우리의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은 결코 영원히 해소 될 수 없습니다.
부부는 물론 함께 하는 형제자매들이야 말로 얼마나 고마운 하느님의 선물들인지요! 그래서 혼자서는 구원이 없다 하는 것이고,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 하는 것이며, 우리 삶의 여정앞에는 반드시 붙은 말마디가 있으니 바로 “더불어(together)”입니다. 이래서 부부가정공동생활, 수도가정공동생활, 교회가정공동생활입니다. 서로 따로가 아니라 모두가 ‘주님 안에서’ 이뤄지는 가정공동생활입니다.
여기서 제가 더불어의 일치의 여정에서 강조하는 세 요소가 하느님 중심, 하느님 닮기, 서로의 거리 존중입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막연한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며 하느님 닮기는 예수님 닮기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으로 제대로 살기위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는 필수 4대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해당될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구원의 영도자이신 예수님을 삶의 목표로,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 비로소 더불어 일치의 여정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예수님 고백이 참 장엄합니다.
“우리는 천사들 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형제이자 도반이요, 우리의 영원한 반쪽이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 방향 예수님 같아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모두 예수님께 맞춰갈 때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저절로 서로 간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사랑은 예술이자 평생 배워야 할 기술입니다. 아무리 배워도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노력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형제들 모두가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서로간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져 저절로 다양성의 일치가 형성됩니다.
예수님 중심과 닮기에 이어 서로의 거리 존중입니다. 홀로와 함께의 균형과 조화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막연한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서로의 거리를, 차이를, 영역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할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중심의 삶이 깊어지면서 날로 주님 사랑을 더욱 닮게 되어 형제들 서로간의 우정도 깊어지며, 서로간의 예의와 배려의 사랑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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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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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이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가 되는 어린이에 대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서 어린이는 선천적으로 나약하고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어린이는 참된 제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하느님과 같은 태도로 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임은 하느님 나라를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지 않고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의미입니다. 진실로 위대한 비결은 자신을 낮추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겸손 없이는 아무도 참된 하느님 나라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은 어린이 같은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에 다니엘에게 하셨던 것처럼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신 당신의 비밀을 어린이들에게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클레멘스는 ‘어린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 말씀에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복음적으로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스승이고 안내자인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같은 내면성은 가슴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자신의 양심에 느껴지는 절대적인 가치관과 이상에 귀를 기울이고자 함입니다. 어린이의 단순성, 무죄성, 대상을 환희에 찬 마음으로 느끼는 것 같은 것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어린이 같은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모태에 있을때의 어린아기에게는 자기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어린아기는 어머니와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그의 존재 전체요, 우주입니다. 그는 그가 어머니와 분리된 개체인 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은 자신의 온 존재요 자신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하나임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칭찬과 꾸중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이렇듯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관계안에서 사랑과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온전히 닮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게 됩니다. 이 모상은 하느님 나라를 드러나게 하는 확실한 표지입니다.
끝으로 어린아이는 ‘왜’란 이유를 통해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만남을 통해, 사건을 통해 다가오는 기쁨, 고통, 괴로움 등을 하느님께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신앙이 성장되어갈 때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며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곁에 와 있게 됩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어린이 같은 마음을 지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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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치에티 (Chieti) 근방의 란치아노(Lanciano)에서 일어난 성체기적
이탈리아-7세기
이미 12 세기 이후로 빵의 모습에서 실제의 살로 이러한 장엄한 기적이 계속되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찰되고 연구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적의 성체는 은으로 된 예술적인 성광 위에 두 개의 유리판 사이에 보존되고 있다. 또 살로 변한 부분은 두꺼운 근육질로 된 적회색을 띠고 있다. 반면에 그 성체의 다른 부분은 원래의 흰 빵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성광은 무릎꿇은 두 명의 천사들에 의해 받쳐지고 있고 그 사이에 성작이 다섯 개의 서로 다른 혈구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담고 있다. 시장(市長) 로드리게스(Rodreguez)가 1574년에 이 성체에 관해 공개적으로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 때에 그 다섯 개의 혈구가 개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한데 뒤엉켜 있다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교회 안쪽 입구의 왼쪽에 있는 한 비석문이 이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그 성스러운 성체 곧 살과 피에 관한 교회의 최종 조사는 1886년 10월 26일 란치아노의 대주교의 감독하에 실행되었다. 그 예수님의 피의 무게는 16.5그램에 달했다.
조사위원회는 성체의 살이 기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1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성체가 여전히 먼지가 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을 특히 중시했다. 그에 따라 이 성찬식의 기적은 오로지 그 성체의 살부분이 영원히 존속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모든 조사위원회의 위원들에 의해 확정되고 강조되었다.
란치아노 시는 기적의 덕분으로 1921년 압부르젠(Abbruzzen)의 제1차 성찬식 전례회의 본부로 지명되었다.(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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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
- 항상 기도하기 -
생생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조촐하게
하느님께 깨어 있을 때,
우리는 하루에 스물 네 시간 기도하는 겁니다.
내면적으로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르며
영과 진리로 그분을 찬미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4,23)
그 귀중한 소망이 모든 것에 스며들고
여러분의 뼈와 골수까지 꿰뚫게 하십시오.
[기도]
사랑하는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 마음은 항상 당신께 집중될 수 없고
때때로 잠도 자야합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항상
당신께 열려있을 수 있습니다.
귀 여겨 듣는 은총을 주시고,
항상 당신 목소리에 대비케 하소서.
-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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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풀려하다니 / 연
박윤식 [big-llight] 241005 18:58 ㅣNo.17656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분께서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것은 너희가 완고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두 몸이 ‘한 몸’으로, 두 영혼이 ‘한 영혼’이며, 두 인격이 ‘한 인격’이 된단다. 이는 혼인은 ‘하느님 창조 질서’이기에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운명이 그대의 것과 같아졌다니, 생각할수록 놀라운 가르침이다. 사실 모든 운명은 하느님께서 좌우하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계산과 노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분에게는 한계가 없다. 천일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일 같기에. 그래서 앞날은 그분께 맡기는 게 정석일 것이다. 당연히 하나 된 운명을 바꾸는 것보다,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빨리 바꾸라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근본적인 의미를 일깨우신다. 그 첫째가 남녀의 평등성이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에. 여자는 남자의 재산이 아닌,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모습을 닮은 인격체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졌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평등하다. 나아가 혼인한 당사자인 그들도 서로에게 동등하게 되면서, 모두 하느님께 속하기에 평등하다.
다음은 남녀의 보완성이다. 그들은 서로 의존하며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알게 모르게 곳곳에서 남성 우월주의가 엄연히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남녀평등이 없는 부부 사이는 결코 건강할 수가 없다. 이는 부부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여야 한다는 동반자 의식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기에 그렇다. 인간은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니까.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워주고 약한 부분은 서로 책임져 줄 때만이, 가정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내려놓으면서 누군가를 드높이고자 사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혈연도 아닌 부부가 평생 사랑하는 것은 자녀나 형제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더 큰 희생을 요구할 게다. 남녀 모두 같은 살과 뼈를 가진 하느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인격체이다. 이처럼 남녀의 평등성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세는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다. 배우자 약점을 덮어 주고 차이점을 존중하는 태도는, 자녀들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배우게 하는 원천도 될 게다.
이처럼 평등성과 보완성인 하느님께서 창조 때부터 부여하신 그 소중한 정신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어렵게 만나서는 쉽게 떠나려 한다. 고통은 피하고 기쁨만 누리려 한다. 그러나 쉬운 인생이 어디 있을까? 본래부터 삶은 고통스러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게다. 더구나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고뇌는 어쩜 당연한 일이리라. 인연이 주는 아픔이 반복되더라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음을 분명 기억해야만 한다. 나의 한쪽이 흔들리더라도 초심으로 손잡아보자. 그러면 운명을 쥐고 계신 그분께서 끝까지 지켜주시리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결코 안 됨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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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지난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 행정 복지 센터, 세무사 사무소, 건강 보험 공단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사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인감 증명서, 가족 관계 증명서, 기본 증명서, 호적 등본, 제적 등본, ……, 입양 관계 증명서를 떼라고 하기에 “없으면 안 떼어도 되지요?”라고 말하였더니 해당 서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 아버지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정확하게 미리 서류를 준비하여서 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처음에는 정말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기에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법과 규칙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정하여 놓는지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규정이 생기겠지요.
규정을 정할 때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왜 그런 규정이 있는지를 압니다.
규정이 없어도 잘되어야 하는데 신뢰가 없고 사랑이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정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규정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이혼장을 써 주라는 규정도 아내를 함부로 버리던 사람들 때문에 허락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아니라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규정을 열심히 외우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어도, 사랑으로 그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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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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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주어는
항상 남편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였기에
그것은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의 두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중요했다면
그것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은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으로 한 몸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가운데에 있는 '와'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앞 단어와 뒷 단어를 동등하게 연결합니다.
이 표현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남성 중심 사회인 당시 사람들에게
당연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의도는
남녀의 평등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남성 중심 사회로 바뀐 것은
물론 성경에서도 남성 중심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였을 것입니다.
유목 생활에서 남자의 강한 힘이 필요했고
전쟁의 상황에서는 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생각하시지만
둘을 차별 대우하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이혼장도 결국
약자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약자의 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각자가 처한 삶의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일 뿐
누가 더 귀하고 누가 덜 귀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로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나날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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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돌아보니 불과 5~60년 전의 일입니다.
가구마다 자녀를 너무 많이 낳다 보니 인구가 너무 급증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반에 70명, 80명이 배정되어 담임 선생님이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한 명 한 명, 인격적 대우가 아니라 도매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있는 시골은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온 마을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을 입구에 큰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너무 귀한 아이들이다 보니,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감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 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4~15)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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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오늘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은 가정이라는 원초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하나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르리라”(창세 2,23)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창세 2,24),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습, 사랑을 표현해낼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여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사랑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해주신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11-12절).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 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도 실천하는 데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된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의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주님은 당신의 돌아가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 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더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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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끝까지 가는 부부의 비밀: 의무가 감정을 이기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도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욕구로 살면 실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지만, 남편이 자신이 벌어온 돈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서로 감정이 상하게 만듭니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는 것입니다.
‘EBS 부모 – 아이 양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묻는 말에 ‘아무것도 아닌 아들’이라 대답했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아빠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내가 맞지?”라는 듯 아내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 옆에서 엄마는 “당신이 하는 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화가 더 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감정 카드를 뽑았는데, ‘외로움, 고통’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무시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감정은 외로움과 고통이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욕구로 생겼을까요? 남편은 ‘존재감(중요하게 여겨짐), 이해’를 뽑았습니다. 남편은 무언가 근저에 인정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이 원인으로 뱃속 깊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했고 거기에서 외로움과 고통의 감정이
생겼으며 그 원인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욕구에 지배당함으로써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이 생겼고 결국 그 원인을 상대에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무는 감정을 이깁니다.
하느님이 주신 의무는 뱀의 욕구를 이기는 새로운 욕구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가 함께 십일조를 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면 부부생활은 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2년 당시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준 네이피어(100)는 결혼생활 79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결혼을 의무로 여겼습니다.
매일 자기 전 뽀뽀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이 의무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의사도 선풍기 틀고 자면 큰일 난다고 어머니가 선풍기를 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자는 게 소원이랍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주님 현존 안에서 돈 때문에 서로의 탓을 하는 일은 사라집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의무’만 남습니다.
사랑의 의무란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맺어주셨음을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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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배우자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2-12)”
1) 이 이야기에 있는 예수님 말씀들은, 모세가 정한 이혼장 규정을(신명 24,1)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폐지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그 규정을 신경 쓸 이유가 없고,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죽은 규정’일 뿐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아내와 헤어져도 됩니까?” 라고 묻지 않고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의 ‘버리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아내를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이고,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정답을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자식을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물었다면?
어떻든 가족을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버린다면, 그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사실, 가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호하고 명확합니다.
“버리면 안 된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소유물이 아니니까, 버릴 권한이나 권리 자체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18.21-24).”
하와는 아담의 분신이고, 사실상 아담 자신입니다.
그러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혼인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는 다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지만,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혼인도 ‘거룩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혼인과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집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하고 단순한데,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리면 안 된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0-13.15.).”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결혼한 경우에,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고 하면 헤어지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권고를 ‘바오로 특전’이라고 부르고, 실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무조건 안 된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바탕으로 해서, 일방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의 경우에는, 잘못한 일이 없으니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낸다면,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라는 말도 중요한데, 혼인성사가 신앙인들을 억압하는 족쇄로 작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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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5킬로미터나 되는 크고 단단한 반석을 100년에 한 번씩 흰 무명천으로 닦을 때 그 바위가 다 닳아서 없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하는데, 그냥 아무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무려 오백겁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칠천겁, 두 사람이 부모와 자식 사이로 만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팔천겁이라고 하니,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지요.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만난,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인데, 나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을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갈 소중한 ‘동반자’로 여기며 아끼고 사랑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안 볼 사람,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그들을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서는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오늘 복음은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을 일종의 ‘매매계약’으로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 된다고 여겼기에 여성에게는 재산의 소유권이나 상속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도 아들도 없는 ‘청상과부’들은 먹고 살기가 참으로 막막했지요. 그런데도 남성들은 모세가 버림받은 여성들에게 재혼이라는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인정해준 ‘이혼의 예외규정’을 근거로, 이혼을 여성보다 우위관계에 있는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처럼 여겼습니다. 이혼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헤어지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버리다’라는 말을 쓰는 것에서부터 이미 그런 마음가짐이 드러나고 있지요.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소외되고 상처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냉혹한 모습입니다. 어쨌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았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존중 조차도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이혼 규정에 대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해석은 모세가 의도한 바가 아니거니와,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도 부합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울 생각만 하는 그들에게 창세기의 내용을 예로 드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남자든 여자든 혼자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나름의 장점이 있고 고유한 특성과 자기만의 개성이 있기에 그 자체로 아름답고 매력이 있지만, 자기 혼자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부족함과 약함 또한 지니고 있기에 그런 부분을 보완하고 발전하여 완전한 ‘한 사람’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봐서도 안되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들어서도 안되겠지요. 남녀는 평생을 같이 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함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성사 때 신랑과 신부가 낭독하는 서약문의 내용에서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납니다. “나 000은 당신을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즐거운 일들이 많아서 내 기분이 좋을 때, 내 몸이 어디 아픈데 없이 건강하고 편안할 때 함께 사는 사람을 챙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프고 기분이 안좋을 때, 몸과 마음이 아파서 짜증과 화가 밀려올 때에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배우자를 대하려면 그만큼 상대방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가면서 부부는 서로를 닮아가고 완전해지는 겁니다.
흔히들 결혼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합니다. 혼인하는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행사라는 뜻입니다. 남녀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제 뜻대로 하는 ‘사람의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혼인은 엄연히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그 사람과 나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하느님께서 그와 내가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섭리하지 않으셨다면, 그와 나는 ‘부부’라는 사랑의 공동체로 맺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부라는 사랑의 유대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내 맘일지 모르나, 그 관계 밖으로 나오는 건 내 마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그 사람 모두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시고 섭리하신 것들을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없는 겁니다. 혼인의 그런 특성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맺어주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은 결혼정보 회사가 그러는 것처럼 서로 조건을 맞춰보고 호불호를 따져가며 맘에 들면 만나보라고 그와 나를 짝 지워주신 게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십자가를 보다 수월하고 보람있게, 그리고 기쁘게 끝까지 지고갈 수 있게 하시려고, 그 과정에서 그와 내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게 하시려고, 사랑이라는 멍에를 함께 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내 맘에 안드는 점이 생겼다고, 꼴보기 싫은 모습이 보인다고, ‘성격차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들어 그와 갈라설 생각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멍에를 함께 졌다면, 그 멍에를 우리 어깨에 지워주신 그분 뜻이 드러나도록 힘내서 끝까지 가야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원칙은 비단 남녀사이에만 적용되는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대하는 당신의 마음가짐을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사랑이라는 원칙을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까지 확장해서 적용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어린이의 마음으로, 어린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내 배우자를,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에서도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겁니다. 이 말씀은 어린이를 주어로 보는가 아니면 목적어로 보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어린이를 주어로 본다면 ‘어린이처럼’ 하느님과 그분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어린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대로 실천하는 단순하고 순박한 영혼들입니다. 하느님을 대할 때도 그렇지요. 하느님의 뜻을 욕심이나 편견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받아들인 것들은 일단 따릅니다. 그런 수용과 순명을 통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는 겁니다. 한편 어린이를 목적어로 본다면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이해와 사랑으로 끌어 안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어린이들을 끌어안는 그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 안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내가 걷는 이 길이 그저 고통만 있는 길이 아니라 부활과 영광을 향해 가는 ‘십자가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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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은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그들의 근거는 모세의 법에 이혼장을 써주면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근거를 내세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 4)라고 설명하시지요.
마음이 완고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남녀를 평등하게 만드셨는데도 불구하고 유목사회에서
여자를 마치 재산 중에 하나로 꼽으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규정을 십계명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그래서 여자의 생명을 가볍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장을 써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부의 결합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일심동체(一心同體)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부부를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부부는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아름다운 것은 법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서로를 아끼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공유하는 것이 많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언젠가 미얀마에서 일하는 교우가 휴가를 나왔다가 서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교우는 앞으로 부인에게 잘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이 무안해 하며
또 그 소리한다고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미얀마에 있을 때 한 영국인이 있었는데 그는 매일 책일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젠틀맨은 늘 책을 읽는가보다 생각을 했는데 일 년이 지나도 쉬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너희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책을 읽냐?'라고
질문했더니 뜻밖의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외국 땅에서 자기 오기를 기다리는 부인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부인과 제일 기쁜 시간은 함께 식사를 하면 책을 읽은 대목을 설명해 주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부인과 대화하기 위해서 매일 책을 읽는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는 부인을 위해서 한 줄의 책이라도 읽었는가?하고 자문해 보았다고 합니다.
책커녕 꽃 한 송이 아니 부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화분의 꽃 하나 갖다 준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기는 부인을 위해서 영국사람과 똑 같이는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작은 것이라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 학생 시절에 지낼 때 제일보기 좋은 장면을 고르라면 주황색 가로등에
산보하는 노부부라고 하겠습니다.
서로 팔짱을 끼고 무슨 이야기가 많은지 오래도록 도로를 산보하는 모습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부부는 매일 보고 사는데 '저토록 할 이야기가 많을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에는 말 없는 대화가 더 끊이지 않겠지요.
가끔씩 이곳에서도 산행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부근 시골스런 마을의 식당에 들어
갈 때가 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부부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을 행복이 가까이 있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창세기의 야훼계 저자는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게 잠이 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
저자의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그 만큼 부부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사랑의 특징 중에 하나가 서로 공감을 갖는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가 일생 서로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야 하겠습니다.
부부가 서로 공감하는 바탕은 여러 방법이라 하겠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무어니 해도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부부는 서로 말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을 합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존중하는 것이
바탕이라면 말이 서툴고 많지 않더라도 서로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열려져 있는
마음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폭이 넓은 것이지요.
사랑은 상대를 기다려주고 들어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화로서 부부의 사랑이
잘 표현되며 그러한 부부는 행복하고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 법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부부는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에서
일치하며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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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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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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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연중 제27주일
위기 때에 빛나는 신앙을 갖는 삶
<2024.10.6>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9:1~19절)
❝위기 때에 빛나는 신앙을 갖는 삶❞
❚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 위기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 위기 앞에서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1~7절).
랍사게의 말을 전해 들은 히스기야는 자기 옷을 찢고, 너무나 슬퍼서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갔습니다(1절). 위기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어떤 외적인 조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 의지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굵은 베를 입게 했고, 이사야에게 보내어 도움을 구하게 하였습니다(2절). 히스기야는 눈앞에 닥친 처절하고 급박한 위기 상황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있는 처지를 알리며 이사야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3~4절).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은 앗수르 왕의 신복이 쏟아 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5~6절). 이어서 하나님이 앗수르 왕에게 한 영을 넣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것이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본국에서 칼로 인하여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했습니다(7절).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위기 앞에서 먼저 자신을 낮추는 겸비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아울러 위기를 당하면 낙심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렵고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인생에 가장 우선순위에 있으며, 문제 해결의 최선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절체절명의 위기와 난관 앞에서 단순히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줄 세상적인 방법을 찾기에 급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하는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위기 앞에서 말씀을 확실히 붙들어야 합니다(8~13절).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게 떠났다는 말을 듣고 립나 성에서 싸우고 있는 왕을 만났습니다(8절). 앗수르 왕은 애굽의 왕 디르하가가 싸우러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람들을 보내며 말했습니다(9절). 앗수르의 여러 왕들과 자신이 진멸한 많은 나라들과 그 나라의 신들에 대해 열거하며, 아무도 앗수르에게서 유다를 구원할 수 없으니(11~13절), “네가 의지하는 하나님께 속지 마라.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네 하나님의 말을 믿지 말라...”(10절)라고 말했습니다.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가 유다 백성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 때문에 앗수르의 전략에 반응하지 않자, 앗수르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모독에서 유다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불신을 갖도록 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거짓 약속으로 히스기야와 유다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믿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위협하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강력한 공격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의 기본 체력을 든든히 해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 체력을 향상 시키도록 우리는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신앙의 기본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에 일일이 반응하여 영적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공허한 위협과 유혹 앞에서 굴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더욱 굳게 붙들고 살아가므로 위기 때에 더욱 빛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위기 앞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14~19절).
히스기야는 사신들이 보낸 편지를 받아 읽고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14절).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약속했던 대로 반드시 개입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듯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문제 해결을 의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이자 언약궤 위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만나 주시며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15절). 그는 여호와께서 천하만국 가운데 홀로 하나님이시며 천지를 만드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그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떠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유다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올바른 기도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되며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의의 통치가 굳건히 서게 해 달라고 기도(19절)해야 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질 것이라...’(시 50:15)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의뢰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만나면 정말로 우리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지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만났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환난과 문제가 다가올 때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함으로 위기 때에 더욱 빛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어 위기를 만날 때, 더욱 하나님 앞으로 겸손히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려울 때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다는 엄청난 특권을 살려 환난과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9:1~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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