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입찰 1건 마치고, 월요일 또 한 건 예정되어 있고, 금요일 또 한 건...
매일 공사 물량 뽑고, 지역 단가 확인하고, 현장 가서 확인하고, 밤새 어떤 식으로 해야 낙찰될까 고민하고, 입찰 전날 사장님과 고민하고...
10년도 더 지나가 예전, 국내 초대형 발전소 배관공사 계약 업무를 맡아서 4년간 한전 담당 직원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싸우며 협상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말 한마디에 공사비 수억, 수십억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상황인지라 초기의 1년 이상을 매일 야근하고, 주당 2 ~3일은 철야하고 나서는 회사 근처에 한구데 밖에 업슨 사우나에서 잠시 눈 붙이다가 옆자리에서 훌러덩(?) 벗고 취침중이시던 부서 중역을 발견하고는 혼비백산 도망쳐 나온 일도 있었지요.
그렇게 아침을 맞고는 그 전날 발주처 직원과 협상했던 내용을 윗분들께 보고하고 지침을 받아 다시 그 두꺼운 서류를 수정하고 들고 들어가 오후 내내 발주처와 협상, 퇴근 시간이 넘어서야 발주처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와 간단히 저녁식사를 해결하고는 다음날 보고를 위해 그날 협상 내용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면 보통 12시 ~ 1시.
돌도 안지난 딸은 곤히 자다가 제가 들어가는 소리에 잠이 깨어 칭얼거리기 일쑤였지요.
주말도 없었고...
그러다가 그 협상 건이 현장으로 이관되면서 저는 1년여의 본사 생활을 마치고 현장으로 내려가 다시 또 3년여를 매달려서 결국 협상을 마무리지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살았었지요.
동해안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에서요.
딸은 지금도 그당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사택 아파트 뒷베란다 문을 열면 바로 토함산 끝줄기의 송림이 문 앞으로 펼쳐지고, 앞베란다 창문으로는 드넓은 동해바다가 보이던 곳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남았어던가 봅니다.
자그마한 집이었지만 동생도 태어나기 전이라 엄마 아빠의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지냈던 시절이었지요.
요즈음조 딸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뜻 어뜻 그당시의 정서가 내비쳐 보이곤 하는 것이 제게는 힘들었던 생활이었지만 딸에게ㅡㄴ 축복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토요일, 원래는 휴무라 어제 저녁 집으로 가야 했지만, 월요일 입찰 준비로 하루를 더 일하고 오늘 저녁 마지막 비행기로 올라가려 합니다.
어제 늦은 퇴근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차를 돌산대교 쪽으로 돌렸습니다.
회사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던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지요.
길을 모르기에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설정해 두고 길안내를 받으며 그곳을 찾았습니다.
역시 바닷가 길은 빤히 보이는 듯 해도 자연적인 장애물 때문에 무척 돌아서 먼 길이 되더군요.
잘 모르는 초행길은 더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한참을 달려 눈 앞에 나타난 돌산대교는 생각보다 작은 2차선의 약 300미터나 될까 하는 작은 다리였습니다.
차라리 낮에 거넜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록달록한 조명이 켜져 있는 다리를 건너니 한적한 바닷가 산길이 나타났습니다.
우측으로 돌아서 약 5분 가량 달리니 자연 다큐멘터리에 자주 등장하는 여수 수산과학 연구원 건물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니 인적없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이어졌습니다.
중간 중간 제법 큰 동네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외곽 지역이고, 거의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동네인지 한 집도 불 켜진 집이 없이 한적한 길이 이어졌습니다.
제법 큰 언덕을 다 오르고 왼쪽으로 길을 접어들어 꼬불꼬불한 내리막길을 10여분 달리자 바로 바닷가 언덕길이 나타났습니다.
자그마한 포구가 이쓴 바닷가 언덕길이었지만 그렇다고 안 것은 네비게이션의 지도를 통해서였고, 실제로는 컴컴한 가운데 오른쪽으로는 자동차 불빛에 비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정도로 알 수 있는 것이었지요.
여수에서는 수평선을 보기가 힘듭니다.
바다이기는 하지만 한려수도 국립공원이라는 명칭이 웅변하듯이 엄청나게 많은 섬들이 산재해 있고, 순천으로까지 들어가는 순천만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반도인지라 바다 건너 다른 육지가 건너다 보이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아마 어제 밤 찾았던 길을 낮에 차즌다면 수평선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정문을 나와 30미터만 가면 바다이지만 마치 작은 수로같이 이루어진 좁은 바다에 방파제를 쌓는 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지요.
처음 이곳에 와서는 바로 길 건너가 바다인지도 모르고 며칠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아마 이런 식의 입찰은 몇 건 더 진행하고 나면 또다시 내가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겠지요.
잠시 지내고자 내려온 남도의 끝자락, 그곳에서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온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표현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아무리 대포가 위력이 있다 하더라도 참호전에서는 총 끝에 꽂혀있는 칼날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겠지요.
아무리 포를 잘 쏘아도 칼 쓰는 법을 알지 못하면 지고 마는 것이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전쟁입니다.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전쟁이라는 표현밖에는 달리 적당한 표현이 없는 것이 이곳의 실상이지요.
약 두달 후면 이곳 여천 화학단지의 수많은 거대한 공장들이 2~3주 정도 가동을 멈추고 연례보수에 들어가는 시기인지라 누가 더 많은 일을 따내는가에 따라 연간 매출액의 향방이 달라질 정도의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이지요.
덕분에 1주일에 한 두차례씩 입찰을 위한 설명회에 참석하고 입찰 서류를 만들고 전략을 짜내야 하는 생활을 시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무척 바쁜 나날입니다.
아니, 바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남도의 하늘도 오랫만에 구름을 벗어나 있습니다.
첫댓글 글 잘 읽고 갑니다.바쁘게 사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이곳 호치민에는 할 일이없어 빈둥대는 교민이 너무 많아요.그것도 대학까지 나온 고급 인력들이...
민이님 글 오랜만에 잘 읽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회사를 다녀보지 못한 저는 회사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습니다.^^
마치 무용담 읽는 듯한 느낌이..
또한 이렇게 길을 가는 이야기도 무엇인가 호기심을 자아내고요....
삶은 전쟁입니다. 달콤한 휴식 즐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