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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축구의 진수, ‘카테나치오’와 밀라노 더비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으로 공격 축구가 널리 퍼지게 되는가 했지만, 개인기가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던 유럽 축구에는 적합하지 않았죠. 그리고 축구 전술의 선진국 이탈리아는 그 흐름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축구 전술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그 유명한 빗장 수비 ‘카테나치오’(catenaccio, 이탈리아 어로 빗장)의 등장이죠.
<칼 라판 감독의 베로우어 시스템을 도입, '지지 않는 축구'인 수비 축구를 퍼뜨렸던 쥐세페 비아니 감독. 그러나 그의 전술은 아직 베로우어 시스템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의 원형은 1940년대 말 이탈리아의 클럽 살레르니타나(Salernitana)의 쥐세페 비아니(Giuseppe Viani) 감독이 처음 도입했습니다. 칼 라판 감독의 베로우어 시스템을 본떠 리베로(= 베로우어)를 두어 ‘지지 않는 축구’를 펼친 것이었죠. 베로우어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공격 자원을 갖추지 못한 팀들에겐 매력적인 전술이었죠.
그러나 비아나 감독의 전술은 정확히 베로우어 시스템으로 분류되었죠. 큰 차이가 없었던 점이 가장 컸죠. 하지만 비아나 감독은 본격적으로 베로우어 시스템을 도입, 카테나치오의 밑거름을 다진 감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두 명장이 우리가 아는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키게 되었죠.
<AC 밀란의 첫 전성기를 이끌었던 네레오 로코 감독. 리베로 앞에 4명의 수비수를 둔 카테나치오를 사용했지만, 공격 전술에도 일가견이 있던 감독이었다. 당당한 풍채와 카리스마로 ‘대부’ (El Paron)라고 불린 그가 있던 동안 AC 밀란은 유러피안 컵 2회 우승을 포함해 수 차례 우승을 달성하였다. 로코 감독이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것이 유러피안 컵 우승팀에게 주어지는 트로피인 통칭 ‘빅 이어’(Big Ear).>
비아나 감독의 뒤를 이어 네레오 로코(Nerero Roco) 감독은 자신이 이끌던 약팀 트리에스티나를 1947/48 시즌 세리에A에서 2위를 기록하고, 시즌 홈 무패라는 파란을 일으킵니다. 그 또한 카테나치오를 활용하였죠. 덕분에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함에도 트리에스티나는 리그 2위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1961년 AC 밀란 감독으로 부임한 로코 감독은 1962/63년, 1968/69 유러피안 컵(현재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합니다.
로코 감독의 카테나치오는 베로우어 시스템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지만, 수비 전술에서 큰 차이가 있었죠. 베로우어 시스템이나 비아나 감독은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포진시켰지만, 로코 감독은 4명의 수비수를 배치하였습니다. 원래 로코 감독은 나중에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역임했던 지오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였습니다. 처음 트라파토니는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활약하면서 수시로 수비진에 가담, 총 5명의 수비진을 형성하게 한 것이었죠.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트라파토니는 점차 수비수 위치에 고정되었죠.
이 때 리베로를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이자 주장이었던 체사레 말디니에게 맡겼습니다. 30대의 베테랑 수비수였던 체사레 말디니는 뛰어난 커버링과 협력 수비로 수비에 힘을 실어주었죠. 체사레 말디니(Cesare Maldini)가 리베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AC밀란의 카테나치오는 더욱 두터워질 수 있었죠.
<네레오 로코의 AC 밀란에서 체사레 말디니는 전술의 핵심인 리베로를 맡았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의 활약 못지않게 수비의 중축을 담당하였던 그였다. 그리고 20년 뒤 그의 아들 파올로 말디니 역시 AC 밀란에서 뛰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은 현역 시절 로코의 밀란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선수였다. 수비형 미드필더과 중앙 수비수 모두 도맡았던 그가 있기에 로코 감독의 카테나치오가 정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코 감독이 이끄는 밀란은 그저 수비적인 팀은 아니었습니다. 수비 못지않게 강력한 공격력이 있기에 유러피안 컵 우승까지 거머쥘 수가 있었죠. 그는 유능한 미드필더들을 두어 전방 3톱을 보조하게 하였습니다. 트라파토니와 브라질 대표팀에 있던 디노 사니가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이 ‘골든 보이’ 지안니 리베라(Gianni Rivera)였습니다. AC 밀란 역대 레전드에 꼭 꼽히는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판타지스타’였습니다.
<밀란이 낳았던 판타지스타 지안니 리베라. 신성과 같은 리베라의 등장으로 AC 밀란은 1961/62 세리에 A 우승을 이룰 수 있었고, 유러피안 컵까지 따낸다. 이 당시 리베라는 19살에 불과한 어린 선수였다. 16살부터 프로 무대에 뛴 그는 60년대 후반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로 뽑혔고 현재 유럽 의회 의원으로 재직 중이다.> 알 파치노?
리베라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 호세 알타피니(José Altafini)를 비롯한 3톱의 밑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습니다.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로 결정적일 때 도움을 올리곤 하였습니다. 플레이메이커를 소화하면서도 직접 공을 몰고 돌파하거나 2선 침투로 득점까지 올리는 등 많은 활약을 해주었습니다. 특히나 로코 감독의 카테나치오는 수비 숫자가 많은 만큼 공격 숫자가 부족해, 리베라의 창조적인 플레이메이킹에 대한 의존도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리베라는 그러한 로코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고도 남을 판타지스타였죠. 여기에 브라질 대표팀 주전이자 볼란테를 맡았던 디노 사니(Dino Sani)가 그 뒤를 받쳐주었습니다. (이전 브라질의 4-2-4 편에서 봤던 그 디노 사니와 동일 인물입니다.)
호세 알타피니 중심의 3톱의 강력한 공격력과 리베라의 빛나는 플레이로 AC 밀란은 카테나치오임에도 막강한 화력을 뿜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비를 굳건히 하되, 플레이메이커를 맡는 판타지스타의 능력에 의존하여 역습의 파괴력을 높이는 이탈리아식 전술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킨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프랑스, 아르헨티나 이중 국적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프랑스에서 보냈고, 감독 경력 대부분은 스페인에서 보냈다. 1958~60년 FC 바르셀로나를 이끌었던 그는 공격 축구를 즐겨 구사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인테르 감독에 부임하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급격한 전환을 맡게 된다. 그것이 바로 카테나치오다.>
그리고 한 감독도 카테나치오를 본격적으로 정착시키게 됩니다. AC 밀란의 지역 라이벌인 인테르나시오날(Internacional, 줄여서 인테르)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였습니다. 1960년 로코 감독이 AC 밀란에 부임하기 이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건너온 에레라 감독은 로코와는 다른 자신만의 카테나치오를 꾸리게 됩니다. 인테르에 부임했던 에레라 감독은 바르셀로나에서 해온 것처럼 스페인식 공격 축구를 펼쳤지만, 부임 후 2년 동안 우승을 거두지 못 하였습니다.
결국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던 에레라 감독은 그만의 카테나치오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3명의 수비수 뒤에 리베로(스위퍼)를 두되, 두 명의 선수를 독특하게 운용하여 이탈리아식의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킵니다.
<인테르의 전설이자, 현대 풀백의 오버래핑 시초 격인 자친토 파케티. 공격수 못지않은 그의 능력은 에레라 감독 전술의 핵심이었다.나중에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인테르의 회장을 맡았고,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의 등번호 3번은 현재 영구 결번이다. 그 옆은 당대 최고 멤버를 자랑했던 브라질 대표팀에서 활약하지 못했지만, 에레라 감독의 전술의 또 하나의 핵심이었던 자이르. 그는 토르난테라는 생소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인테르와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자친토 파케티(Giacinto Facchetti)가 전술의 핵심이었죠. 에레라 감독은 왼쪽 풀백 파케티를 오버래핑시켜 공격에 가담, 공수 균형을 맞추게 하였습니다.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던 파케티는 공격에 힘을 실어주며 직접 득점까지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수비수임에도 1965/66 시즌에 두 자릿수 득점까지 올리기도 하였죠. 따라서 인테르는 파케티의 오버래핑을 통해 유연하게 공수 균형을 맞출 수 있었죠. 현대 축구에서 풀백의 오버래핑을 활용하는 전술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데, 그 시초가 바로 자친토 파케티였습니다. 그래서 파케티를 ‘현대 풀백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레라 감독의 또 하나의 변칙적인 전술 운용을 소화한 선수로는 자이르(Jair, 혹은 야일)가 있었습니다. 펠레 등이 버티고 있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활동량이 많은 오른쪽 윙어였죠. 그의 장점을 살려 에레라 감독은 자이르에게 독특한 역할을 맡깁니다. 윙어로써 계속 공격에 참여하도록 하되, 수비 시에는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 상대 윙어를 차단하게 하였죠. 상당히 넓은 범위를 홀로 맡다시피 했지만, 자이르는 모두 소화할 수 있는 활동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비력 또한 준수하였고요.
이렇게 파케티에 이어 자이르까지 수비에 가담하면 인테르는 순간적으로 5백을 구성할 수 있었죠. 이처럼 자이르는 공수 모두 활약하였고, 그의 역할을 가리켜 ‘토르난테’ (Tornante, 귀환자라는 의미)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파케티가 오버래핑하면 그에 맞춰 왼쪽 윙어인 마리오 코르소를 중앙으로 침투시켜, 중앙에 있는 루이스 수아레즈의 플레이메이킹을 지원토록 하였습니다. 에레라 감독과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이적해온 스페인 국적의 루이스 수아레즈(Luis Suárez Miramontes)는 공격수였으나, 미드필더로 전향하여 창의적인 플레이메이킹을 펼쳐주었죠.
(참고로 이 루이스 수아레즈는 현재 우루과이 대표팀의 동명이인 루이스 수아레즈보다 훨씬 전에 활약한 선수였고, 1960년 스페인 선수로는 최초로 발롱도르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지안니 리베라에 대항하는 인테르의 판타지스타 산드로 마쫄라. 어릴 적 수페르가 참사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는 인테르에서 활약하며 아버지의 한을 풀었다. 독특한 외모에도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갖췄던 그는 라이벌 팀의 판타지스타 지안니 리베라와 라이벌이었다.하지만 정작 둘은 라이벌임에도 서로를 존경하였으며,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여기에 당시 인테르에는 산드로 마쫄라(Sandro Mazzola)라는 뛰어난 플레이메이커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뛰어난 축구 재능을 발휘하며 인테르의 공격을 진두지휘했죠. ‘위대한 토리노’ (La Grande Torino)를 이끌었던 아버지 슈퍼스타 발렌티노 마쫄라(Valentino Mazzola)의 뒤를 이어 축구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949년 5월 4일 토리노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한 수페르가 참사(Superga air disaster)로 사망하였습니다.
(1958년 바비 찰튼 등 생존자가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뮌헨 참사와 달리, 이때 31명 모두 사망하면서 생존자가 없었습니다. 이 참사로 당시 유럽을 호령했던 ‘위대한 토리노’의 황금기도 끝을 맺게 됩니다.)
토리노에서 명성을 날렸던 아버지와 달리, 아버지의 대표팀 동료였던 베니토 로렌찌의 배려로 인테르에서 뛰게 된 마쫄라는 1962/63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끌면서 인테르의 핵심 선수가 되었습니다. 에레라 감독 휘하에서 그는 탁월한 득점력까지 선보이며 인테르에 많은 우승컵을 안겼습니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콧수염 때문에 ‘일 바포’ (Il Baffo)라 불렸던 그는 17시즌 동안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인테르에서 은퇴하였습니다.
흔히 ‘양대 밀란’이라 불리는 인테르와 AC 밀란은 역사적으로 라이벌 팀이었고, 마쫄라도 같은 포지션인 AC 밀란의 리베라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대표팀은 둘 중 누구를 쓸지 고심하였고, 결국 전반 후반 둘을 나누어 교체로 기용하는 전술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를 ‘스타페타’ (Staffetta, relay와 같은 뜻) 전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듯 에레라 감독은 파케티, 자이르와 마쫄라 등을 활용하여 수비 축구임에도 충분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단단한 수비에 파괴력 있는 공격을 갖춘 인테르는 최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세리에 A 3회 우승, 유러피안 컵 2회 우승에 인터컨티넨탈 컵(Intercontinental Cup, 현재의 FIFA 클럽 월드컵의 시초) 우승까지 맛 보았죠. 에레라 감독 시절의 인테르를 ‘위대한 인테르’ (La Grande Inter)라고 불렀습니다. 이 위대한(La Grande)라는 칭호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단 2팀만이 얻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산드로 마쫄라가 있던 때의 인테르, 그리고 아버지 발렌티노 마쫄라가 있던 당시의 토리노 단 2팀이었죠.
비슷한 시기에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킨 로코 감독과 에레라 감독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밀라노 시에 위치한 양대 밀란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에레라 감독은 1960~68년, 로코 감독은 1961~63년과 1967~73년 감독을 역임하였습니다. (1963~1967년엔 토리노 감독을 역임) 그리고 이들이 맡았던 AC 밀란은 노동자 계층, 인테르는 부르주아 계층을 대표하면서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리베라와 마쫄라라는 각 클럽을 대표하는 스타들의 라이벌 구도까지 양대 밀란의 경쟁 구도에 열기를 지폈죠. 그래서 AC 밀란과 인테르가 번갈아 60년대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하였고, 유러피안 컵 우승컵도 드는 등 둘 다 황금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전술인 카테나치오가 정착되는 동시에 밀라노 더비(Millano Derby), 혹은 데르비 델라 마도니나(Derby della Madonnina, 마도니나는 밀라노 대성당의 성모 마리아 상을 뜻함)가 더욱 불타오르게 된 셈이었죠.
‘위대한 인테르’의 시기를 이끈 에레라 감독은 60년대 후반부터 페루치오 발카레지(Ferruccio Valcareggi)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공동으로 수행했습니다. 대표팀에서도 에레라 감독은 파케티의 오버래핑을 활용하면서 토르난테까지 성공적으로 이식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후 카테나치오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전술이 되었고, 많은 이탈리아 클럽들이 모방하면서 이탈리아 축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유러피안 컵에서 위력을 떨친 카테나치오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재 카테나치오는 흔히 극단적인 수비 축구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카테나치오의 기본적인 전술 원리 또한 수비 축구에 기반을 두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정작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킨 에레라 감독이나 로코 감독은 단순히 수비에만 전념하지 않았습니다. 로코 감독은 3톱과 리베라를 통해, 에레라 감독은 파케티와 자이르, 마쫄라를 통해 나름대로 맞춤 공격 전술을 펼쳤죠.
카테나치오가 극단적인 수비 축구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에레라 감독 본인은 카테나치오를 도입한 팀들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그의 말에 따르면, 다른 팀들은 카테나치오의 수비적인 면만 받아들였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수비 축구를 구사하는 팀들은 약팀이 대부분이고, 파케티와 마쫄라, 리베라 같은 유능한 선수를 보유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죠. 결국, 이런 점들이 에레라 감독이 이러한 말을 하게 한 원인이 아닌가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1960년대는 브라질의 공격 축구와 이탈리아의 수비 축구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은 4-2-2-2로 그 명맥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카테나치오는 60년대 후반 들어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설명드릴 네덜란드가 만든 한 전술의 등장으로 카테나치오가 깨지면서 변화를 겪게 된 것이었죠.
<네덜란드 축구에 카테나치오가 무너졌지만, 과감한 전술 변화로 카테나치오를 부활시킨 엔조 베아르조트. 파이프 담배 애호가였던 그의 새로운 카테나치오 ‘조나 미스타’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그 결실을 보이며 이탈리아에 44년만의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참고로 11년 동안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며 최장 기간 감독으로 꼽히고 있다.>
결국 카테나치오 역시 변화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엔조 베아르조트(Enzo Bearzot)는 카테나치오의 기본 원리인 대인 방어 대신 지역 방어를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 기존의 1-3-3-3, 1-4-2-3에서 4-4-2 포메이션으로 변화를 줍니다. 하지만 베아르조트 감독은 4백 라인을 상당히 독특하게 운용하였습니다.
보통 4백 라인은 2명의 풀백과 2명의 센터백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베아르조트 감독은 카테나치오의 핵심인 스위퍼(리베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명을 리베로와 2명의 센터백으로 지역 방어를 펼치되, 왼쪽 풀백을 수시로 오버래핑시켰습니다. 공격 시에는 왼쪽 풀백이 공격에 힘을 실어주고, 수비 시에는 4백을 형성하면서도 리베로를 활용한 카테나치오의 장점도 살린 것이었죠.
또한 미드필더 4명도 독특하게 구성하였는데, 1명의 고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와 1명의 플레이메이커를 두어 중앙 미드필더가 이 둘 사이에서 보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오른쪽 윙어로 배치, 오버래핑으로 공격수 위치까지 가담케 하여 3톱을 구성할 수 있었죠. 이때 오른쪽 빈 공간을 수비형 미드필더가 커버링하게 하였죠. 그리고 2톱은 한 명의 센터 포워드와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구성하였습니다. 대신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왼쪽 측면 진출을 자주 하게 두었습니다. 오버래핑하는 왼쪽 풀백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죠.
4-4-2 포메이션을 기본 틀로 두되, 왼쪽 풀백과 오른쪽 윙어의 활용을 통해 3-5-2, 3-4-3, 심지어 3-3-4까지 변칙적인 운용이 가능한 복잡한 전술이었죠. 이러한 복잡한 전술을 사람들은 ‘조나 미스타’ (Zona Mista) 라고 불렀습니다. ‘조나 미스타’의 ‘유동적, 복합적 공간 활용’이란 의미만큼 누구나 쉽사리 구사할 수 없는 전술이었죠.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엔 이 복잡한 전술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1978년 월드컵에선 21세의 나이에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고, 다음 대회 1982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끌었던 안토니오 카브리니. 자친토 파케티의 후계자라 불릴 정도로 철통 같은 수비, 정확한 공격을 자랑했던 현대 풀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계 최고의 리베로로 칭송 받아 부족함이 없는 가에타노 시레아. 동료들과 함께 카테나치오를 구축하면서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이탈리아의 빗장을 더욱 굳게 걸어 잠갔다. 실제로 그는 2010년 유로스포츠 선정 역대 월드컵 최고의 스위퍼로 선정이 되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왼쪽 풀백을 맡은 안토니오 카브리니(Antonio Cabrini)는 21세의 나이에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습니다. 카브리니는 자친토 파케티가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정확한 크로스와 슈팅으로 공격에도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냉철한 상황 판단을 자랑했던 리베로 가에타노 시레아(Gaetano Scirea)의 지휘 아래 풀비오 콜로바티(Fulvio Collovati)와 클라우디오 젠틸레(Claudio Gentile), 쥐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가 번갈아 수비진을 든든히 지켰습니다. 누구도 우승하리라 예상치 못 한 이탈리아 대표팀의 우승 비결은 시레아와 동료들의 철저한 수비력이었죠. 더불어 카브리니의 위력 있는 오버래핑도 이탈리아의 숨겨진 무기였죠.
<‘로마의 왕자’ 토티 이전에 AS 로마에서 맹활약했던 브루노 콘티. 공수 가리지 않는 활동량과 작은 키에도 가공할 드리블 실력으로1982년 월드컵 우승에 큰 기여를 하였다. 가히 1980년대 판타지스타로 불렸던 선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어준 득점왕 파울로 로시. 승부 조작으로 몇 년간 경기를 뛰지 못 해 많은 이들이 우려를 보냈으나, 브라질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활약으로 득점왕에게 주어지는 골든 슈, 그리고 골든 볼까지 받게 되었다. 더불어 이탈리아 대표팀까지 우승시킨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공격에선 오른쪽 윙어인 브루노 콘티(Bruno Conti) 또한 자신의 역할을 확실히 해주었습니다. 60m 단독 드리블까지 성공시켰던 콘티는 오른쪽 윙어임에도 ‘판타지스타’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수비 시에도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끝인 득점은 1982년 월드컵 득점왕 파올로 로시(Paolo Rossi)가 책임졌습니다. 승부 조작 사건으로 인해 3년 간 자격 정지란 징계로 인해 선수 생활을 하지 못 했지만, 1982년 월드컵을 앞두고 사면되어 대표팀에 참가했습니다. 걱정과 우려가 앞섰지만, 그는 강호 브라질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결승전 득점으로 방점을 찍으며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역적에서 불세출의 영웅으로 거듭난 최고의 공격수였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지안카를로 안토뇨니(Giancarlo Antognoni), 투지 넘치는 활동량의 마르코 타르델리(Marco Tardelli)가 이들의 뒤를 확실히 받쳐주었습니다. 그리고 브루노 콘티의 오버래핑으로 생기는 공백을 가브리엘레 오리알리(Gabriele Orialli)가 헌신적으로 막아주면서 수비 또한 탄력을 받을 수 있었죠.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했던 이탈리아 대표팀 베스트 일레븐.>
사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을 앞두고 베아르조트 감독의 이탈리아 대표팀의 우승 가능성을 점친 예상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개최국 스페인, 1980년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팀 서독, 남미의 강호 브라질, 미셸 플라타니(Michel Platini)의 프랑스 등이 우승 후보로 꼽혔죠.그만큼 카테나치오의 위력이 반감되었고, 자연스레 이탈리아 축구 또한 약화되었으니깐요.
사실 이탈리아는 조별 예선도 3무로 간신히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토너먼트에선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던 아르헨티나를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 우승 후보 브라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펠레가 은퇴한 뒤였으나,‘하얀 펠레’ 지코와 190cm의 거구 테크니션 소크라테스 등 ‘황금의 4중주’ 세대를 보유하고 있었죠.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파올로 로시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조나 미스타’를 앞세운 이탈리아가 우승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니 미스타는 워낙 복잡한 체계로 구성된 전술이라, 이 이상으로 변칙적인 전술을 가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80년대 들어 조니 미스타에 대한 파훼법이 나오면서, 카테나치오도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카테나치오는 여전히 이탈리아 축구의 뿌리이며, 현재의 이탈리아 축구도 수비를 탄탄히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