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78
6월4일[연중 제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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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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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Al7fj3wXlk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준정 리차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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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나라를 관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 독서로 봉독한 베드로 2서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하느님의 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 베드로 3, 12-13)
우리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아무래도 3가지 점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과연 어떤 곳일까? 도대체 언제쯤 그 나라가 우리에 올 것인가? 우리는 정말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확신은 금물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관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주체이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땅을 치며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적대적인 관계,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아직도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요원한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매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찬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분께서 나눠주시는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지극정성으로 받아 모신다면,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는 건설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 발은 인간 세상에 딛고 서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생활, 티없고 흠없는 생활을 통해, 주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날, 마지막 날, 종말에 대한 베드로 2서의 가르침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쁨을 주는 표현은 ‘새로움’입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하면 그분 가르침에 충실했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부여될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도성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이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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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PQARLLu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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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대처하는 법>
급격히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는 눈 잠깐 감았다 뜨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이전에 가치가 있었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됩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라지게 될 직업들의 순위가 마구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전에 인기가 있었던 법관부터 의사들도 상당수는 A.I. 기술을 이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인기가 점차 줄어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입니다. 이제 가지고 있는 사진 다섯 장만 A.I. 프로그램에 넣으면 증명사진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해답을 전해주십니다. 우리 시각을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법칙에 고정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세상엔 카이사르처럼 변하고 사라질 것들이 있고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도 존재합니다. 건물은 변합니다.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건물이 허물어진다는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법칙을 무시하고 건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집이 허물어지기 직전까지 그 집에 집착하며 안타까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집은 언젠가는 허물어진다는 법칙을 아는 이들은 이 법칙을 이용하여 돈을 법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돈을 많이 버는 이유는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에 시선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건 하우절의 [불변의 법칙]에는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언젠가 워런 버핏과 가깝게 지내는 남자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편의상 그를 짐이라고 부르겠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다. 짐은 2009년 말 워런을 차에 태우고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때였고 오마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상점과 사업체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짐이 워런에게 물었다.
“암울하군요. 과연 경기가 회복될까요?”
그러자 워런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짐, 1962년에 가장 많이 팔린 초코바가 뭔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스니커즈였어요. 그럼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초코바는 뭘까요?”
“모르겠습니다.”
“스니커즈예요.”
그리고 침묵.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있었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언젠가 경기가 회복되겠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또 경기가 좋을 때 언제까지 좋겠느냐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다시 불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돈을 많이 법니다. 그러나 당장의 변화에 정신이 팔린 이들은 그 변화에 휩쓸려 정신없이 고생만 하다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읍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법칙은 세상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차는 법칙대로 굴러갑니다. 그러나 차 자체가 설계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법칙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그 법칙을 넣어준 것이 확실합니다. 곧 창조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반면 신앙이 없는 이들은 법칙을 무시하고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사니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사울 왕이 필리스티아 인들과 전쟁하기 직전 병사들이 빠져나가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올려 하느님을 분노하게 한 예와 같습니다. 이 불순종 행위는 사울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자유를 찾는 이들은 많은 법칙을 아는 이들입니다. 도시락을 팔아 수천억 원의 자산가가 된 켈리 최도 마흔이 넘어 10억 이상의 빚이 있을 때 부자들의 책 [시크릿]을 60번 읽고 그 법칙대로 했더니 5년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김승호 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 썼더니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니 오늘 독서 말씀을 잘 들읍시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중략)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카이사르의 것, 곧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 곧 하느님의 법을 추구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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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6년 2월 저는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1986년 1월에 입대했기 때문입니다. 졸업장은 동창 신학생이 집으로 가져다주었습니다. 미국은 대학 졸업이 5월에 많이 있습니다. 학기의 시작이 한국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대학졸업 축하연설을 검색하면 저명인사들의 축하연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스티브 잡스의 연설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연설에서 아주 인상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을 잃지 말고,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항상 배움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추구하며, 규범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격려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최초로 16강에 진출했던 한국 팀의 감독 히딩크가 한 말과 비슷합니다. 히딩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I'm still hungry!" 그리고 한국 팀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남겼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신앙도 그 시작은 ‘갈망’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갈망입니다. 나병환자도, 소경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이방인의 여인도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은 물론 영혼까지 치유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또 다른 졸업 축하 연설을 보았습니다. 졸업생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들려준 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Joy와 Sad는 같은 3문자이다.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이다. Love와 Hate는 같은 4문자이다.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이다. Truth와 False는 같은 5단어이다.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이다. Friend와 Enemy는 같은 6문자이다.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이다. Forgive와 Condemn은 같은 7문자이다.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이다. Positive와 Negative는 같은 8단어이다. 그러나 의미는 정반대이다. 미래는 선택에 달려있단다.”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일 수 있지만, 내가 가기에 그곳이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문명은, 희망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선택한 선구자들의 희생과 열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나자렛의 마리아의 선택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따라라.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어디론가 가야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께 나갈 때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은 은총과 그분의 앎을 더욱 키워가면서 시작됩니다. 긍정의 눈으로,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하며, 친구들과 함께 진리를 추구할 때 시작됩니다. 미워하기보다 사랑할 때 우리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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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질문은 예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 것이냐 하며 함정을 만든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15절) 하신다. 예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고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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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는 세상 마지막 날이 될 “하느님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날은 주님을 거스른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지만, 주님을 믿고 바라며 기다린 이들에게는 구원과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마지막 날은 혼돈 속의 멸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입니다.(이사 65,17 참조)
마지막 날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으로 지상 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죽음이 지닌 상실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죽음이 마치 온 생명을 찢고 파괴하여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지상 생활의 완성이며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운명이며,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과제입니다. 죽음이라는 과제는 사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양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절망과 두려움의 순간이 아닌 삶의 완성으로,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실현되는 구원의 순간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고, 새로운 삶으로 옮아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앙이 깊었습니다. 부모들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세심하게 준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마지막 날을 세심하게 준비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날마다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너그러운 자비에 맡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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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3-17)
1)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합니까,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하시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는 민족의 반역자다.”라고 떠들고 다녔을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시면,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반역자라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라는 말씀은, 그들이 파 놓은 함정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곧바로 데나리온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로마 황제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고,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 라고, 마치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것은, 자신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 아마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시거나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황제의 것’만 생각하느라고 ‘하느님의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황제의 것’이란 원래 없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세금을 바치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세금을 바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이미 로마 황제의 통치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로마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왜 세금 문제로 고민하는 척 하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3)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을, “정치는 정치고, 종교는 종교다. 종교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마라.”로 해석하면서, 우리 교회가 사회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온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정치도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입니다.
4)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6)
독재자의 독재 권력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허무한 것이고, 그들의 집권 기간은 잠깐 동안의 ‘아침잠’과도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4-25)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나지 않으려면,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4-16)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주님 뜻을 거스르는 독재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뜻을 거스르는 악법은 법이 아니라 악입니다. <아주 잠깐 동안은 악인들의 허세가 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다 주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뜻을 거스르는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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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신부님]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미움에 끌려 다니게 되지요. 미움이라는 놈이 나를 마구 흔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잘못되었을 때 더 기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먹었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요 신앙인이라고 해서 초월되는 것도 아닙니다.그래서 미움을 털어 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 역시 이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묻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로 올무를 씌우려는 것'(마르 12,13)이었지요.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다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수석 사제 및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 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마르 12,16)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황제의 것"(마르12,17)이라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을까요? 예수님보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백성들의 존경도 훨씬 높고 많이 받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대로 순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종교적 관습이나 권력자들의 잘못을 들쳐내고 비판하셨지요.
우리가 하듯이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알면서 넘어가고 모르면서도 지나는 거지. 너무 따지며 살지마. 너만 피곤해져.’ 하는 투의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려 하셨기에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그를 따르게 되자 더 이상 두었다가는 그들의 권위가 도전 받을 것 같고, 또한 시기심에 예수님의 언행이 용납되지 않자 트집을 잡아서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집권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시자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잘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무조건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을 써가며 간교한 올가미를 놓게 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4)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지나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신앙인이지만 최소한 양심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까지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마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못 박았던 것처럼 하느님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미움이 있다면 빨리 털어버리십시오. 미움의 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온 몸을 조정하여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새로운 삶과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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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 말씀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입니다.
이것을 질문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세상의 다스림보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결탁하고 그분을 궁지에 빠지게 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하시면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사람이 되고, ‘황제를 섬기라.’고 하시면 하느님을 거역하는 예언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되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정치의 질서와 종교의 질서는 구분되는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다른 것이나, 속된 것 안에 거룩한 것이 존재하며, 거룩한 것 안에 속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지만 이 세상의 삶을 꾸려 나가려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종교가 이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권력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권고하여야 합니다.
거룩한 질서와 속된 질서가 섞여 있는 이 현세에서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질서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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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주시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 대답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황제는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누가 황제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 아니십니까? 세상에 어찌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신앙적인 것은 종교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황제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가 복음의 빛을 받아 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246항 참조)
부조리와 불평등, 억압과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모든 이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선을 긋고 무심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쓰시는 만큼 교회는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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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2,17)
세상을 살아가면서 대부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과 세금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세금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세금과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표현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2,17)라는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금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유대인들은 성막을 지을 때 최초로 세금을 냈습니다.(탈30,11~16) 사무엘이 왕을 내세우는 것을 반대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1사8,14~18)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이유도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종교세를 매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열왕12,4)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소득의 28%를 세금을 바쳤기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내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2,14)라고 묻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물었던 의도는 예수님의 답변을 꼬투리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는 불순한 의도이자 속셈이었지만, 당대 현실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러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는 그만큼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일본의 식민지 통치 시대를 거쳤기에 로마의 식민지 유다의 미묘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금 납부 여부는 로마 식민지 법에 복종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법을 따르느냐는 문제와 결부된 사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일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했지만,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다, 는 입장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세금 납부 여부는 양날의 칼처럼 미묘한 실제적인 문제였기에 예수님 또한 이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이제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질문의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빼도 박도 못한 난처한 상황에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난처한 상황은 한 마디로 진퇴양난의 기로였던 것입니다. 즉, ‘세금을 내라’고 하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시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5,12)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 후에 기지를 발휘하여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순간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서 의기양양한 그들은 이렇게 지시한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한 대로 동전 한 닢을 가져오자,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12,16)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2,17)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돌려주라, 돌려드려라, 는 말은 결국 땅에 발붙여 사는 동안 화폐를 발행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하늘나라 시민은 하느님께 속한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또 다른 차원이라고 봅니다.
마태오 복음 17장에 보면, “당신네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17,24) 하고 묻자, 베드로 사도는 엉겁결에 물론 스승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심을 알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기에, “내십니다.”(17,25) 하고 답변하였습니다. 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나서,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하거든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17, 27) 하고 말씀하심을 통해 베드로를 위로하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십니다. 더 큰 일,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은 의연함과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진리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로 당당하게 세상 집권자들 앞에 살아야 합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편’이지만, 진리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소유이며 하느님께 속한 자녀입니다.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우리네 삶이 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른 분별력을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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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15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노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부부의 모습이 너무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자마자 “신부님! 저희 죽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연은 전화금융사기 사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보이스피싱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를 잘 모르는 연세 많은 노부부는 경찰청이라는 상대방의 말을 굳게 믿고 그가 말해주는 통장에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옮긴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칠순이어서 자녀들이 큰 잔치를 해주었고, 용돈이라면서 준 돈이었는데 자녀들 볼 면목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런 돈을 사기당했다면서, 세상에 살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눈물만 흘리시는 노부부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찾아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살고 싶어서임을 알기에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결론은 억울해도 그 돈 없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달 할아버지 앞으로 연금이 나오고 있었고, 두 발 편하게 뻗고 잘 수 있는 좋은 집도 있습니다. 또 부모를 끔찍이 생각하는 효심 깊은 자녀들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도 있습니다. 있는 것을 따지고 보니 잃어버린 것이 억울하고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 수 있는 이유가 많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행복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더 나쁜 상황만을 찾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자격도 없다면서 스스로 최악의 상황으로 밀어 넣습니다.
과거 순교자들, 또 많은 성인·성녀들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습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만 계신다면 다른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기쁨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세금 문제를 물어봅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로마 황제의 편이냐면서 민족의 반역자라고 외칠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황제의 말을 거역하는 황제의 반역자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 드리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 하나로도 만족할 수 있는 굳은 믿음입니다. 그래야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 것만을 바라보면 살 수 있습니다. 커다란 만족 안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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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경제민주화를 밤낮으로 외친다고 서민 경제가 나아지지 않습니다. 보편복지를 외쳐도 실질적으로 재원 마련 대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은 정치적 연합주의라 칭하는 포플리즘이 문제입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 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 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이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 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여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서로 다른 탈랜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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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마르코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나의 것은
너 아닌
나에게
너의 것은
나 아닌
너에게
하느님의 것은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오로지 하느님께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니
나는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오로지 하느님께
너는
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니
너는
너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오로지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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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 버리나이다.”(시편 90,10)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 90,1)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은은한 밤꽃 향기에 젖어드는 마음입니다. 근래 보기드문 아름다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어머니의 달, 5월 성모성월은 물론이고 아드님의 달, 6월 예수성심성월중 어제의 날씨도 참 좋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수도원을 사랑하여 결성된 모임인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의 달이기도 하네요. 또 이번주 금요일은 요즘 계속된 대축일을 마감짓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씨가 참 예뻐요!”
어제 수도원을 방문하여 성사를 보던 수녀님의 표현이 흡사 하느님이 예쁘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저절로 시편 성구를 연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하늘에 초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산과 들이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주도다.”(시편 19.2)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라고 눈들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하늘입니다. 누가 저보고 취미가 뭐냐고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하늘보며 하느님 사랑을 관상하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다음 시편의 고백은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 16,2)
6월은 예수성심성월입니다. 6월 들어 고백성사를 본 분들에게 보속의 ‘처방전 말씀’으로는 한결같이 다음 시편말씀을 써드리고 어린이를 안고 있는 그림에 “사랑해요”라는 말마디가 새겨진 붉은 스탬프를 찍어 드렸습니다.
“저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 18,2)
문화영성대학원에서 전례를 강의하는 원장수사의 강의 소재가 참 재미있고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궁금해서 물어 봤더니 한번은 “개두포, 장백의, 띠, 중백의, 영대”였고, 다음에는 “주교관, 반지, 지팡이, 가슴 십자가”였고, 어제 물었더니 “전례 색깔”이라 했고 이에 대한 제 답글입니다.
“색깔의 신비도 무궁하군요! 모든 색깔의 깊이에는 신비의 하느님이 계시겠군요. 색깔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네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싶네요. 좌우간 수고많습니다.”
이런 시간과 공간을 성화하는 전례 상징들에 대한 아름다운 강의들 또한 하느님 사랑, 교회 사랑의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요,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 예수님 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굿뉴스 인터넷을 여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는 성구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하느님 사랑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산다면 저절로 찬미와 감사요 기쁨과 평화요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참 난해한 질문입니다만 예수님은 천상지혜로 참 자유롭게 통과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말마디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정말 이런 예수 스승님의 진가(眞價)를,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입증하는 다음 문답입니다. 예수님의 천상지혜로 빛나는 통쾌한 장면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양자택일의 문제요, 어떻게 대답하든 이들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치라 하면 민족반역자로, 또 바치지 말라하면 국사범으로 몰릴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답변합니다. 이어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을 달라하여 받은후 답변이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김안에 있는 참 자유(the true freedom in services)'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모든 것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제 판단은 각자가 해야 합니다. 하느님 중심만 확고하다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유롭게 결정할 일입니다. 황제는 물론 세상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있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느님 앞에 모두는 상대적 가치만 지닐뿐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낸다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각자 판단할 수 뿐이 없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바둑용어가 생각납니다. 명분에 집착하다 큰 것을 잃는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병자호란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의 어리석음도 주전파들의 주장에 휩쓸린 탓입니다. 후에 주화파의 최명길의 분별의 지혜와 용기덕분에 살아난 인조요 조선입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지론인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절묘한 조화와 균형의 지혜가 필수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올바른 분별의 지혜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다음 옛 어른의 지혜에 따른 삶이라면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세상을 지키는 존재는 특별한 소수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소중히 일상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다.”<다산>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속이지 않으며, 실패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진정한 영웅이다.”<채근담>
오늘로서 제1독서 베드로 후서는 끝납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 귀한 위로와 격려의 가르침이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서 나설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 3,15ㄱ.17-18참조)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께 대한 앎을 날로 키워주시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잘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이제와 영원히 주님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 90;14,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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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오늘 주님께서는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나누어 말씀하시는데 저의 프란치스칸적이고 신앙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곧 말이 안 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말도 안 된다고 너무 쉽게 일축해서는 안 되고, 뭔가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해봐야겠지요.
제 생각에 그것은 진짜 황제의 것이 아니라 황제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것 돌려 달라고 하니 돌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한가지 뿐입니다. 모든 것은 다 그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지만 이 세상 사는 동안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고 그것은 성실히 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종교인들의 과세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개신교 목사들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 것을 근거로 내지 않지만 우리 가톨릭은 오늘 주님 말씀에 따라 1994년부터 세금을 내고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궁금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1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유형무형의 선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무소유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에서 프란치스코는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실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주셔서 잠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이제 더 필요한 사람의 것이 돼야 하기에 프란치스코는 더 필요한 사람 곧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주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길을 가다가 점심이 되어 남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 먹었습니다. 남의 포도밭이 아니라 하느님 포도밭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밭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인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았고, 동행하던 마세오 형제는 도망쳐 맞지 않았지요. 그는 그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익살을 떨며 길을 갑니다.
‘마세오 형제는 잘 먹었네. 프란치스코 형제는 잘 얻어맞았네.’
저는 또 이 얘기를 근거로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할 때 행진자들에게 과일이나 채소들을 서리해 오라고 하고, 아무 죄책감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상당수 참여자가 그렇게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제가 나서서 하면 몇 분이 따라 하는 정도지만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프란치스칸 정신을 각인케 하기 위함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재물뿐 아니라 재능까지,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 돌려드리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우리가 되기로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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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12,17)
<하느님의 것!>
오늘 복음(마르12,13-17)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곧 예수님을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뜨리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4)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에 로마의 통치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바쳐야 한다.'고 말하면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임수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동전의 초상과 글자가 황제의 것'인 것을 확인하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려라."(마르12,17)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들은 매우 감탄합니다. 예수님의 이 명확한 답변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위선, 곧 세속적인 일에는 충실하면서도 하느님의 일에는 충실하지 않은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국가와 하느님 사이에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설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의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으로도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는 '주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인데,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4-15)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려고 애쓰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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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MbWBOB0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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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 17)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삶의 기본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감사하며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앙의
기본과
본질과
처음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해답을
선사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돈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세속의 황제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삶의 숭고한
가치를
배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시기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을
잊지않고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관심입니다.
사랑과 나눔은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나눔과 관심은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떠나는
우리들
삶입니다.
고정적인 판단도
살아있는 모든
집착도 결국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하느님께로 이끄는
깨어있음의
것들입니다.
깨어있음이
봉헌이며
마음의
열림이며
기도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마음을
돌려드립니다.
위태위태한 삶이
하느님의 것으로
제자리를 찾는
하느님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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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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