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이란 쉽게 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 의해 또는 생애 동안에 일정 기간 동안 스스로의 사명감에 의해 그 사명을 지키므로 인해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서약한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 외관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실인의 서약과 외관은 구별해야 한다. 외관은 형식이고 그가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께 드린 약속이 나실인의 내용물인 것이다. 즉 그가 어떤 약속에 따라 살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앞서 말한 세 가지 외관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외관으로 나타냄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나실인에 대한 파수대의 설명은 본질을 설명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상황만을 설명하고 있으며 나실인을 현대에 잘못 적용시키고 있다. 파수대 해설은 주로 나실인의 행동이 워치타워 교리에 충실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실인의 성격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실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율법을 어겨도 좋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율법을 지키고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의무이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실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충실함 속에서도 개인이 드릴 수 있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지닌 사람들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한나가 하느님께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고 서약한 것은, 아이를 대제사장이 되게 하겠다는 포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일반적인 의무 외에 무언가 하느님께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특정한 사명을 수행시키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여 한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였고 사무엘은 그러한 방식으로 살다보니까, 대제사장이라는 직책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게 됨으로써 하느님께서 그를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임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하여 보면 현대의 적용점이 분명히 나온다. 현대의 나실인이 고대와 다른 점은 외관으로 특별히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술이나 흡연 또는 마약 등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사명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실인의 외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고대와 달리 현대는 고대의 나실인처럼 외관으로 공개적 선언을 하더라도 유대교라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상황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무언가 서원을 수행하려는 사람으로 이해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의 이해와 협조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나실인의 외관적 풍습은 서서히 사라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바울은 사도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것을 나실인의 방식으로 외관을 나타낸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실인의 외관적 특징은 형식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나실인이 마음속으로 가졌던 서약 또는 사명을 지켜내는 것이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 곧 선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러한 서약을 계속해서 지켜나갈 때, 그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파수대의 설명 중, 나실인이 주위 사람으로부터 조롱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왜곡시킨다. 그가 조롱을 받았다면 그는 평소에 하찮게 여겨지던 사람이라 나실인의 외관을 보고 비웃었거나 아니면 외관은 나실인이면서 삶의 방식이 전혀 나실인 답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지, 그의 외관만을 보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런 잘못된 이해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워치타워의 근본 교리가 시한부 종말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모든 성서의 가르침과, 세상을 보는 모든 시각이,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색안경에 의해서 색이 바래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