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에 힘을 보탰다가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오른 원경왕후 민씨 또한 개국 초기의 여걸
이었다. 민씨(1365~1420)는 17세 때인 고려 우왕 8년(1382) 두 살 아래인 이방원과 결혼했다. 민씨의
아버지 민제는 공민왕 때 급제하여 우왕 때는 중앙정계의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대와 함께 여
진족에서 귀화한 뒤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이후에야 비로소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이성
계의 가문보다는 훨씬 명문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했을 때 민씨는 감히 왕비를 꿈꿀 수 있는 군번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향처(鄕
妻)에게서 6남 2녀, 경처(京妻)인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향처 신의왕후 태생인
남편 이방원은 위로 형님이 네 분이나 있었으니 보위는 언감생심 돌아올 차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성계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 중 막내 방석을 지나치게 편애한 나머지 그를 세자로 삼으면서
각중에 왕위계승 문제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정치적 안목과 남다른 야욕까지
겸비한 민씨에게 딴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6세의 방원 역시 정치적 야욕이 남달라서, 11세 된 방석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것은 목숨 걸고 국권
찬탈에 앞장선 자신으로서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대놓고 항
거할 수는 없었다. 방원보다 훨씬 적극적인 민씨는 밤마다 베갯머리송사로 남편을 설득했지만 별무
소용이었다. 그러는 사이 은근히 방원을 견제하던 조선 건국의 기획자 정도전이 방석 편으로 기울었
다. 태조 7년(1398), 정도전은 왕명을 앞세워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과 무기를 모두 반납하라
고 요구했다. 방원으로서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이에 따르기로 했는데, 이때 민씨가 몰래
병장기를 감추어 후일에 대비했다.
때마침 이성계가 와병하자 민씨는 친정동생 민무구‧민무질과 함께 방원을 설득하여 거사를 모의했
다. 이숙번 등 방원의 최측근들과 익안군, 회안군, 상당군, 이거이 등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이때
민씨가 숨겨두었던 병장기를 내주어 왕자들은 물론 노복들까지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정도전은 동
지인 남은의 첩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방원은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과
방번은 물론 왕후의 딸 부부까지 제거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민씨의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이처
럼 전광석화같이 진행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난이 성공하자 방원은 둘째형 방과를 보위에 올렸다. 심약한 성격이라 ‘바지 임금’으로 제격이기 때
문이었다. 이성계의 찬역(簒逆)에 반대하던 첫째형 방우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에 넷째형 방간이 반
기를 들어 위기가 닥쳤다. 이방원은 장인 민제가 천거해준 하륜으로 진용을 보강했다. 정종 2년(140
0) 정월, 방원과 형 방간 간에 건곤일척의 전투가 벌어졌다. 제2차 왕자의 난이었다. 민씨는 직접 전
투에 가담하기 위해 무장한 채 집을 나서다가 주변의 만류로 겨우 말머리를 돌렸다. 방원이 승리하자
정종은 그를 세제로 책봉한 뒤 11월에 선위했다. 제1차 왕자의 난과 마찬가지로 제2차 왕자의 난 또
한 민씨와 친정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남편이 즉위(태종)하자 민씨는 왕비(원경왕후)로 책봉되었다. 왕비는 자신과 친정의 공을 따져 공동
정권으로 여기고 일정 지분을 요구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절대왕권을 금과옥
조로 여기고 있었다. 왕비는 태종이 후궁을 맞이할 때도 노골적으로 패악을 떨며 남편이 후궁을 정식
으로 맞이하는 가례색(嘉禮色)에 참석할 수 없도록 붙잡아 앉히기도 했다. 원경왕후는 이후에도 태종
이 11명의 후궁을 들일 때마다 노골적으로 질투를 하고 행패를 부렸다. 스스로 불행의 씨앗을 심는
행위였다. 그 와중에도 왕후는 세 명의 공주와 여덟 명의 대군을 낳았다. 태종은 11명의 후궁들로부
터도 23명의 왕자와 옹주를 두었다.
재위 6년(1406), 태종은 흉년을 빌미로 각중에 양위를 선포했다. 각본에 따라 신하들이 벌떼같이 철
회를 요구하여 거둬들이기는 했지만, 태종은 이미 성공적으로 올가미를 쳐두었다. 이듬해 태조의 이
복동생인 이화가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탄핵했다. 작년 양위계획 발표 때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
다는 이유였다. 신호를 감지한 양사에서도 대간들이 잇달아 탄핵상소를 올렸다. 태종은 민무구‧민무
질 형제로부터 공신첩을 회수하고 유배했다. 그러고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자 사사상소가 잇
달았다. 재위 10년(1410), 태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두 처남에게 자진을 명했다. 모두 왕비가 지나
치게 지분을 요구한 데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왕비에 대한 폐위 요구도 있었지만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듣지 않았다. 대신 민무휼‧민무회 두 처
남을 노리기 시작했다. 때맞춰 세자 양녕대군이 무휼‧무희 형제가 두 형의 죽음을 부당하게 여긴다고
상주했다. 태종은 두 처남의 직첩을 거두고 유배했다. 그 참에 민씨 집안의 여종이 입궐했다가 태종
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회임했다. 질투에 불탄 왕비는 그녀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여종은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대신들과 삼사를 움직여 왕비 대신 유배되어 있는 그녀의 남은 두 동생을 자진시켰
다. 이로써 태종의 즉위에 가장 공이 컸던 왕비의 네 동생이 모두 죽고 친정은 대가 끊겼다. 모두 왕
비 민씨의 과욕이 빚은 참사였다.
재위 18년(1418),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3남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왕비는 자식
이지만 두 친정동생을 밀고하여 죽인 양녕이 폐위되자 매우 옹골짜게 여겼다. 왕비는 태종이 세자 충
녕의 장인 심온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태종 20년(1420) 원경왕후는 55년 세월을 뒤
로한 채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한 많은 격동의 일생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역시 가을은 과일의 멋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새로 조성된 모란장터의 가을걷이 과일이 유난히 풍성하여 만져도 보고 맛도 본 넉넉함 이었습니다. 원주 지인의 초대는 밤.대추 줍기의 해마다 행사지만 이번은 며칠이 늦은 만추의 행복이 될것 같습니다. 오늘 당장 오라는 전갈이지만 처의 선약으로 며칠을 미루게된 아쉬움 입니다. 좋은 주말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