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원리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적어놓은 내용을
믿는 것으로 시작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하나님도 이해해주실 거라고
혹시 믿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말입니다.
성경엔 그렇게 생각하다
죽은 사람이 있다고 성경에
하나님이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웃사'라는 사람이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이 된 지
7년 6개월만에 이스라엘 전체가
드디어 통일국가가 되고
공중에 떠있다시피 한 '언약궤'를
백성 3만명을 뽑아 바알레유다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새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나곤(혹은 기돈)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를 붙들었는데 즉사했답니다.
삼하 6:6~7,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먼저, 언약궤는 레위지파 중 선택된 자나
혹은 제사장이 메어서 이동하게 돼있는데
하나님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만들어
보낸 그대로 답습하여 따라했다는
큰 잘못이 있었고,
또한 '웃사'라는 사람이
손대지 말아야 할 언약궤에
손을 대는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은 웃사 한 사람을 통해
거기에 모인 3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친히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일단 수레 얘기는 지난번에 했고
오늘은 '웃사'문제를 보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처음엔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가져다 놓았는데
다곤 신상이 해체되고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하나님이 치셔서
가드로 옮기게 되고
가드에선 더 큰 재앙으로 치셔서
에그론으로 다시 옮기게 됩니다.
그렇게 7개월간 블레셋 땅에서
언약궤가 있게 되는데 자기들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까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려보내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소로 끌게 하여
벧세메스에 보냈는데 그 마을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이 죽어
다시 북쪽 기럇여아림에 보내게 되고
그곳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게 됩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언약궤가 머무는 동안
벧세메스에서처럼 사람이 죽을까 두려워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언약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왜 이 내용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면 이것이
웃사의 죽음에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6: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웃사의 족보를 잠깐 살펴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것이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였으니까
적어도 30년은 되었을 것이고,
사울이 왕으로 재위한 것이 40년,
다윗이 전 이스라엘을 통일하려고
유다지파의 왕으로 재위한 것이 7.6년이니
적어도 아비나답은 벌써 죽었을 것이고
그 아들 엘리아살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웃사와 아효는 아마도
아비나답의 증손자쯤 되지 않겠나
추측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언약궤를 지키는 자들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규례를 엄수했기 때문이지요.
즉, 엘리아살이 웃사와 아효에게도
언약궤를 지키는 법을 당연히
가르쳐주었을 뿐만아니라
그대로 지켰기에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곤(기돈)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날뛸 때 '웃사'가 갑자기
언약궤를 붙든 것일까요?
언약궤를 만지면 죽을 줄을 몰랐을까요!
그럴리가요!
운반해오는 그 시점까지
자신이 죽지 않았던 이유가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켰기 때문인데
몰라서 그랬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으로 언약궤를
붙들었길래 죽었느냐가 오늘의 핵심입니다.
여기엔 이런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소들이 잠잠히 언약궤를 끌고 갈 땐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돌발상황이 되자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웃사는 그 순간 기우뚱거리는 언약궤를
붙들어 안정시켜 놓는 것이
그동안 지켜오던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궤에 손대면 죽는 줄
뻔히 알고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어떤 물체든 기울면 쓰러지게 돼 있고
그것은 다섯살 짜리 애도 아는 기본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의 경험일 뿐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되지 않은
인간의 죄된 모습일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는 명령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인간 위에 누군가 명령권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지키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행하는
존재이지 명령권자가 아닙니다.
여기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예외가 없습니다.
웃사가 잠깐 생각했던 인간적인 생각,
'이렇게 해서 결과가 좋으면
하나님도 기뻐하실거야!'
혹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붙들리오!'
그러나 그는 이것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한통속으로 자기도 거기에 있었으면
웃사처럼 손을 내밀어 붙들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니 어쩔 수 없다구요?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십시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것은 당신 생각일 뿐입니다.
타협하고 살았는데 아직 멀쩡하시다구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의심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든
거룩을 향해 달려가게끔 돼 있습니다.
생각이든 행동이든 그렇습니다.
세상원리에 역행하며 거슬러가는 삶입니다.
또한 언약궤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하나님 모르는 블레셋 이교도가
빼앗아다 써먹으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아닌 사람들이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거나
돼지머리 놓고 고사지내는 대신
예배로 바꿔서 성공을 바라는 것은
참으로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신자가 부러워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그냥 종교행위이고 부적일 뿐
하나님 아버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스데반 집사의 예처럼
거룩을 향해 돌진하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그 삶을 내가
그대로 살아낼 때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 아래 모여서
구별되지 못한 생각으로
거룩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결코 함께 하실 수가 없으며
거기엔 오직 죽음 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아멘~!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 되길 기도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히 담아갑니다.
http://urim3.blog.me
글을 쓰신 분은 안효섭 목사님입니다. 블로그에 가시면 더 많은 말씀을 만나볼수 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