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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 영도대교와 깡깡이마을 >
부산의 원도심이란 부산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를 말하는데 1876년 근대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로 개발한 곳입니다..
원래 조선인이 살던 동래부를 동래군으로 강등시키고 조선인들을 강제이주시키고 부두가 가까운 원도심을 부산부로 승격시켜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개발했던 곳입니다..
부산의 명물은 바로 영도대교 입니다.
1934년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어요.
길이는 214미터이고 다리의 약 31미터를 들어올리는 도개교입니다
다리밑으로 큰 배들이 지나가게 하려고 그런거지요. 일제 때 큰 배란 황포돛대를 단 배들이죠..높이가 10여미터입니다.
건설 목적은 일본인들이 공업단지로 만든 영도에서 생산된 물자를 철도로 운송해 일본으로 보내기 위함이었어요.
조선인노동자들의 출퇴근도 이유가 되었지요.. 바람 세면 배가 못뜨니..생산에 지장이 있었지요.
공사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고해요.
해방후 한국전쟁 발발시에
그 당시에 들어올리는 다리는 전국에 오직 하나 있는 부산의 명물이라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한국전쟁 때 피난 중에 부득이하게 가족과 헤어질 때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하였어요..
그래서 이산가족 들은 생사를 모르는 가족들을 혹시나 이곳에서 만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이 영도다리 근처를 늘 서성거렸답니다.
그래서 이 다리는 만남의 광장으로 피난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가족을 찾고픈 애환이 담겨있는 곳입니다.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을 찾으니 자연히 점집이 많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립고 답답한 마음에 점바치에게 물으며 살아있고 만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점괘를 듣고 위로를 받았을거예요
영도다리가 생기기 전에 영도사람들은 도선이라는 배를 타고 육지로 일하러 혹은 학교에 다녔어요. 다리밑에서 도선 통통배를 타
2009년까지 통선이 있었어요
이산가족찾기 할 때 수많은 인파가 이곳에 몰렸었지요.. 참으로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다리 위로 전차도 다녔던 영도대교는
이후에 수도관 설치 때문에 드는 기능이 없어졌다가 철거논란이 있었는데
많은 시민들의 바램으로 복구하게 되었고 3년의 공사끝에 2013년부터 다리를 들어올리는데 그 시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룬답니다.
다리를 건너면 영도다리의 추억을 되돌아보면서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느낌을 스토리텔링으로 담은 작품들이 담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매일 2시 정각에 15분간 도개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관광객들이 드는 다리 영도대교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유라리..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 어울린다는 뜻으로 유라시아철도의 출발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대평동
남포동 용두산부산타워 쪽을 봅니다
이 배를 타고 체험할수 있어요.무료
키도 잡아 보고..영도 대평동에서 보이는 자갈치시장과 부산타워..
영도는 이런 곳입니다.옛날이름은 절영도 입니다.사람이 살지 않았고 호랑이를 피해 이곳 섬에 목마장이 있었습니다..영도에는아름답고 황홀한 '대풍포'마을이 있었습니다.
배고픈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곳들을
거닐며 발 밑에서 들려 주는 이야기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절영도 지도로 보는 대풍포는 낚시바늘 모양을 닮은 포구로 이 포구 안쪽에 마치 호수처럼 깊이 그려진 해안을 끼고 있어 한 눈에도 바람이 일고 파도가 높을 때면 어선들이 풍랑을 피해 스며들기에 알맞은 포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풍랑을 만난 어선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바람을 피하던 천혜의 포구였지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 달도 안되어 조선은 일본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외교관계를 체결합니다.절영도에는 1601~1607년 임시왜관이 있었던 곳입니다
왜관은 조선시대 해금정책으로 외부로 열려있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14세기 동아시아 해역에 '왜구'가 창궐하던 시기에 한,중,일삼국의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다난하였습니다 중국은 원의 뒤를 이어 명나라가 탄생하고, 일본과 한반도에도새로운 정권이 탄생합니다.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일본도 남북조가 통일되어 '국왕 대 장군'의 대등한
교린외교가 수립되어 최고통치자들 사이에 사절교환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왜구였습니다.
그런 세월 보내고 200년 후 임진왜란이 터지고 전쟁으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되돌아와
임시로 지낸 마을이 대풍포입니다
한국 최초의 왜관이자 임시 왜관이었던 절영도왜관이 있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1876년 개항이후 조용하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떼거지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집단이주는 황금어장 약탈을 노린 군국주의 일본 정부 당국의 계획적인 이주정책이었지요.
1903년부터 이주해 오기 시작한 일본어부들이 1910년이면 영도에 230가구 862명
(영도인구의 1/3과 맞먹는 숫자)
이들은 대풍포 마을 갯가에 그들 어선을 수리하기 위한 조선소를 차리기 시작합니다
군국주의 세력으로 팽창한 일본의 대륙침략의 징검다리 발판으로서 영도에 조선소를 정착시키려 대풍포 갯가 일대에는 일본의 조선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그들의 땅인양 차지하고 어선을 만들고 수리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근대 조선공업은 이렇듯 치욕스럽게도 일본의 근대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싹트고 자랐습니다
1887년 10월 다나까 조선소를 시작으로 1892년 나까무라 조선소등 1945년 해방을 맞기
까지 영도에 들어선 조선업체와 그와 관련된 업체가 60여 개소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 절영도의 마지막 첨사였던 박기종은 지금의 대동 대교맨션 부지에
석유대리점을 설립합니다.이 자리는 6,25 전쟁 후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지요
대풍포에 자리를 튼 일본인들은 그들의 거류 지역인 남포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1901년 대풍포 선착장에서 자갈치 시장쪽으로 나룻배길을 엽니다.
조선인들을 실어 나르던 봉래동 뱃길과 경쟁을 하다 1914년에는 나룻배에 디젤엔진을 장착한
동력선(통통배)이 탄생합니다
전용부두까지 만든 대풍포 거주 일본인들은 포구를 메워 땅 장사를 할 욕심에 대풍포
매립권을 양도 받아 1916년부터 1926년까지 바다를 매립하고 주택지를 조성하여 오늘과 같은
지도를 만들었습니다.매립된 마을은 일본인 마을이 됩니다.
매축 마을이 번창 하면서 이곳에 일본 여인들의 홍등가가 들어서는 환락촌으로 흥청거립니다
해방 후에는 일본인 '홍등가'가 사창가로 이름만 바뀌어 성업했던 곳입니다
이 대평동에 6,25전쟁 중인 1951.12월 화재가 발생합니다.섣달 추위에 우물물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불은 홍등가와 피난민촌 600여 세대가 밀집해 있던 이 곳을 싹쓸어 버립니다
매립한 대풍포를 대평동이라 합니다.
대평동은 3면이 육지에 둘러싸인 이방인의 공간이였습니다.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곳은 땅이.매립되고 근대식 건축물이 들어선 한국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섰습니다
그때부터 대평동은 '근대수리조선 1번지'
'배들의 종합병원'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규모가 크고 작은 조선소들이 밀집되면서 조선공업단지로 변모해 갔고 1937년 7월에는
봉래동에 지금의 한진중공업이 설립 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병참기지화 하는 남한 최고의
선박 건조와 선박 수리 공장 단지가 됩니다
해방 후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새로이 건조하는 배는 없고 소형 철선의 선반수리가 주요업종으로 번창해 갔습니다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조선소 도크에 올려진 배들에는 도색을하기 위해 전에 칠한 페인트를
벗겨내야 했습니다.낡은 페인트들을 벗겨 내고 따개비를 제거하기 위해 철판 외벽을 쇠망치로 두들겨서 벗겨내야 했습니다.
철판을 두들기는 소리 "깡 깡 깡,,,," 소리를 차용하여 이 일을하는 여성들을 "깡깡이 아지매"
라고 불렀습니다
대풍포(깡깡이)마을은 70~80년대 한반도 최고의 수리 조선소의 메카로 성장하여
개개인의 숙련공들이 다 있는 선박수리 종합병원이 됐습니다
대평동(깡깡이 마을)마을은 8개의 수리 조선소와 260여개의 공장및 관련 부품 업체들과
주민들이 함께 혼재 되어 있는 마을입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때 갈곳 없는 피난민들이 전국팔도에서 들어 왔습니다
산업화시대에는 '산업역군'으로 원양어선을 타거나 기타 일 등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제주,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 들어 왔습니다.
대동대교 맨션은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로 1층은 배수리 공장과 배 부품 가계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선술집인 니나노집이 길목마다 하나씩 들어섰으며 다방만 30군데에 달하는 파시를 이룬 곳입니다.
마지막 첨사 박기종이 이 곳에 미국계 스탠다드 석유 대리점을 설립한 대동 대교맨션 자리입니다.
해방후 승리 창고로 쓰이다가 6,25때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가수 현인 아버지가 근무하면서 현인이 영선동에 살게 됩니다.전쟁의 참상을 절묘하게 묘사한
노래가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진 노래비에 새겨져있습니다.
금순아!
다시 만날때까지 굳세게 잘 있거라~~!
2002년 83세로 세상을 졸업했습니다.
현인선생동상의 어깨를 어루만지면 노래들이 흘러나옵니다..
1968년 개업한 양다방은 내부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있어 세월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변호인' 촬영지에서 여우 김영애의 삶과 사랑,예술을 이야기합니다.
전차종점 위 남항동 시장 입구에 있던 적산가옥 3층 건물에 여관을 아버지가 운영했습니다.
이 곳이 최초로 선박용 엔진을 장착한 배를 건조한 '다나까 조선소"입니다
대평동은 선박수리의 종합병원입니다.
이 곳에 입항하면 깨끗이 치료 받아 싱싱한 배로 나갑니다.도크에 배가 오르면 깡깡이 아지매가 맨 먼저 투입됩니다.망치로 두들겨 배의 녹을 뜯어내고 조개류,따개비를 제거한 자리에 페인트 칠을 하던 망치소리는 사라져 망치소리 가득했던 호황기가 그립습니다.근대화의 산업역군이라고 부르지만 남은 건 병든 몸.늙은고철같다고 스스로 말 합니다.
건너편 용두산 공원에는 변재천 신사를 만들고 용미산자리에는 임진왜란의 선봉장 "가또기요마사'를 모시는 옥수신사를 짓고 참배
했습니다.참, 한심한 세월이였습니다.
과거에는 녹슨철 조개류들을 망치로 끌로 긁어 냈는데 지금은 고압 으로 쏴 벗겨 냅니다
방진 마스크도 없이 안전장비도없이 줄 위에 오르면 점심때가 되어야 화장실을 갈 수 있었습니다.
살아온 날 돌아 보면 마음 다친 날들도 많았지만 꽃피울 새끼들 생각하며 두드리고 긁어 냈을
깡깡이 아지매들.우리 시대의 어머니가 보입니다!
흰여울길을 함께 걷습니다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고뇌
속에서 이 길을 걸어 갔을까요?
대평동의 일터 골목길 에는
역사가 켜켜히 쌓여있습니다.
답사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세상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다리 밑에 있던 많은 점 집들.
힘들고 지친 손님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해주던 역술가들이 최고의 인문학자입니다.
풍어와 무사귀환을 빌고 빌던
아내의 모습이 늘 있는 신당..
보존해야 할 문화자산입니다.
일본할매 '카미사마' 를 모시던 곳..
조선소에서 만든 배들 첫 출항때 무사운항과 풍어제 지내던 곳..
지금도 동제를 지냅니다..
세월을 두드리며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귀하가 꽃입니다.
"손마다 연장들고 어서 바삐
나오라'던 선주는 없고 고철이
쌓여 있습니다
대평동 깡깡이 아지매들을
늙은 고철에 비유합니다.
깡깡이 아지매들의 쉼터.
영도조선소!
3대째 이어오고 있는 조선소입니다.
고철이 말을 하고
있다. 쇠 냄새를 맡는다!
이곳은 대평동이라 부르는 곳인데 깡깡이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풍포 라고 했습니다.
기다리 대 바람 풍 ..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고기잡이를 나갈 때를 맞춘다는 뜻이지요.
여기는 우리나라 근대조선의 발상지입니다. 1900년대부터 동력선을 만들면서 태풍으로부터 안전한 이 곳 영도에 다나카조선소를 비롯해 여러 조선소가 생겼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여러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에서 군선을 제조하기 위해 물색한 곳이 바로 이 곳이며 대형철강조선소인 조선중공업을 설립하였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일제시대에는 귀환동포들이
한국동란때는 피난민이 모여든
대평동 매축지 마을이
조선업과 원양어업의 전진기지가 되었습니다.
기름과 식수를 한 달에 한 번씩
입항호는 배에 공급하는 통통배
큰 배에 선적할 생필폼을 싣고
갈 통선(용달차)--통통배에 실어 날랐습니다.
프로페러,어망,페인트,통신,금형, 볼트,공구, 선박엔진,벨브,터빈, 배관,엔지니어링,카본,작업복등
자기 분야의 숙련공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1인자들로서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배들의
종합병원이라는 대평동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세계 어디에 이런 곳이 있을까요?
수리를 마친 깨끗한 모습.
이제부터 만선을..
높이를 알 수 있는 눈금이 선명합니다.
선박 명칭 새기는 작업이 남았지요.
수리를 마친 배를 다시
바다에 띄우기 직전 모습.
부식 방지를 위한 아연판을
부착해야 출항 할 수 있습니다.
최백호의 "대평동 연가"
최백호 어머니는 영선동에서
돌아 가시고 아버지 최원봉은
28살 나이에 무소속으로 2대
국회의원에 당선 됐지만 6,25가
터지고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조사하러 갔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지친 갈매기는 울며 떠나고
아린 가슴으로 항구는 잠들지
못하네" 갈매기 날개를 형상화
한 자갈치 건물 지붕이 날아 오를듯 다가옵니다
영도가 천지개벽한 사진..
지금은 고압의 물을 뿌려 배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합니다
외판소재는 지금도 망치로 두들
겨 배 표면의 녹슨 부분을 제거
하고 그라인더로 갈아 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투어코스를 걸으며 이야기하며 두시간이 후딱 지났지만 들려줄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네요..
부산을 알기 위해 시간 내어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고마워서
늘 즐겁게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