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사십리연^기수부모연"
임 진사의 회갑 잔치는 김삿갓이 나타남으로써 졸지에 김삿갓을 위한 환영연으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김삿갓은 매우 계면쩍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생은 술을 마실 만큼 마셨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꽁무니를 빼려고 하자, 임 진사는 한사코 손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선생이 오시기는 마음대로 오셨지만, 가시는 것만은 맘대로 못 가시옵니다.
선생께 부탁드릴 일이 있사오니, 꼭 들어
주십시오."
김삿갓은 "부탁"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저에게 무슨 부탁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선생도 보셨다시피, 이 자리는 우리 집안에서는 다시 없는 기쁜 자리 올시다.
이 자리에 선생께서 참석해 주신 것을 두고두고 기념하고 싶사오니,
선생은 이 자리에서 자작시 한 편만 친필휘호를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 가문에서는 대대로 물려가며 가보로 삼겠습니다."
"시생의 글씨를 가보로 삼으시다뇨. 무슨 말씀 이시옵니까?"
김삿갓은 지금 까지 수많은 즉흥시를 읊어 왔지만,
누구 한테 부탁을 받고 휘호를 해 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임 진사는 간곡히 부탁을 하며, 사람을 시켜 지필묵 까지 갖다 놓게 하는 것이 아닌가.
'동여 놓고 치는 매는 피할 수 없다'고 했던가.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피할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 제 글씨가 서툴기는 하지만 시를 한수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연히 수연을 축하하는 시를 써야 하겠지만,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어서 시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손에 붓을 든 김삿갓이 눈을 들어 사허정 아래를 굽어 보니, 능라도의 푸른 버드나무 숲과 하얀 모래밭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는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붓을 든 김삿갓의 손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가련강포망(可憐江浦望)
저 멀리 강포 풍경 아름다워라
명사십리연(明沙十里連)
고운 모래가 십리나 이어져 있네.
영인개개습(令人個個拾)
그 모래 하나하나 모두 주워다 놓고
기수부모년(其數父母年)
양친부모 그만큼 수를 누리게 하소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모래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에 즉흥적으로 써갈긴 시였다.
이것을 지켜 보던 어느 하객은 너무도 놀라워,
"야아, 시 한 편을 눈 깜빡할 사이에 써갈기니 과연 시선이 틀림 없구나!"
하고 감탄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하객은,
"시도 좋지만, 글씨가 또한 명필일세 그려!"
하고 맞장구를 쳐 보인다.
임 진사는 휘호를 한 폭 받고 나자 춤을 출듯이 기뻐하며 옆에 있는 자식들에게 명령한다.
"애들아!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그냥 돌아 가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어른을 우리 집 별당으로 모시게 하여라." >>> >>> >>>
*사평35"소설/김삿갓에서 퍼옴"